마르키온 반박 5권

ADVERSVS MARCIONEM LIBER QVINTVS

테르툴리아누스

1

기원 없이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기원은 모든 사물의 존재 상태에서 앞서는 만큼, 그 사물들을 다시 검토할 때에도 그만큼 앞서야 한다. 그래야 그 상태에 대해 확정할 수 있다. 어떤 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서 그것이 있는지를 확신하지 않으면, 그것이 무엇이며 어떠한지 가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작은 저작의 순서를 따라 이 주제에 이른 나는 사도 바울의 기원도 마르키온에게 묻는다. 나는 어떤 새 제자이고 다른 누구의 가르침도 들은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아무것도 경솔하게 믿어서는 안 되며 기원을 알지 못한 채 믿는 것은 무엇이든 경솔하게 믿는 것이라는 것 말고는 당분간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또 내가 복음서의 사도 명단에서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 사도라고 나에게 단언될 때, 나는 이 탐구를 마땅한 권리에 따라 엄밀한 검토에 부친다. 게다가 그가 나중에, 주가 이미 하늘에서 쉬고 있을 때 주에게 뽑혔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이것을 일종의 선견 부족으로 여긴다. 그리스도가 그가 자기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미리 알지 못했고, 사도직이 이미 정해지고 사도들이 저마다의 일로 보내진 뒤에야 내다보아서가 아니라 일이 닥쳐서, 말하자면 뜻에서가 아니라 필요에서 그를 덧붙여야 한다고 여겼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폰토스의 선주여, 그대가 훔친 물건이나 금지된 물건을 그대의 배에 한 번도 실은 적이 없고 짐을 빼돌리거나 변조한 적이 한 번도 없다면, 하나님의 일에서는 더욱 조심스럽고 성실하게 우리에게 밝혀 주기 바란다. 그대는 어떤 증표를 받고 사도 바울을 실었는가? 누가 그에게 칭호의 표지를 찍었는가? 누가 그를 그대에게 넘겨주었는가? 누가 그를 배에 실었는가? 그것을 밝혀야 그대가 그를 떳떳하게 내놓을 수 있다. 바울이 자기 사도직의 모든 문서를 내놓은 이에게 속한 사람으로 증명되지 않도록 이렇게 말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사도라고 공언했다. 그것도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을 통한 것도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다.” 물론 누구든 자기 자신에 대해 공언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공언은 다른 사람의 권위로 완성된다. 한 사람은 쓰고 다른 사람은 서명하며, 한 사람은 봉인하고 다른 사람은 공문서에 기록한다. 아무도 자기 자신에 대해 공언자이면서 증인이 될 수는 없다. 이 밖에도 그대는 분명히 “내가 그리스도다” 하고 말할 자들이 많이 오리라는 말씀을 읽었다.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거짓말하는 자가 있다면, 자기가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선포하는 자는 얼마나 더 있겠는가? 나는 아직 제자이자 탐구자의 역할로 말하고 있다. 이제부터 그대의 믿음을 꺾고 그대의 뻔뻔함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다. 그대는 그 믿음을 증명할 근거를 갖고 있지 않고, 소유권을 주장하면서도 그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다른 신의 것이라고 하고, 사도도 이제 다른 신의 것이라고 하자. 다만 그 둘은 창조주의 문서가 아니고서는 증명되지 않는다. 사실 나에게는 창세기도 오래전에 바울을 약속해 두었다. 야곱이 자기 아들들에게 내린 저 예표들과 예언적 축복들 가운데서 베냐민에게 이르렀을 때,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다. 아침에는 아직 먹고 저녁에는 먹이를 줄 것이다” 하고 말했다. 그는 베냐민 지파에서 바울이 나오리라는 것을 내다보았던 것이다. 바울은 아침에 먹는 물어뜯는 이리, 곧 젊은 시절에 교회들의 박해자로서 주의 가축 떼를 황폐하게 할 이이고, 그 뒤 저녁에 먹이를 줄 이, 곧 이미 나이가 기울 무렵 이방인들의 교사로서 그리스도의 양들을 먹여 기를 이였다. 또한 사울이 처음에는 다윗을 가혹하게 추격하다가, 그 뒤 악을 행하고도 선으로 갚음을 받고서 뉘우치고 사과한 일도, 지파로 보아서는 사울 안에서 바울을, 동정녀의 혈통으로 보아서는 다윗 안에서 예수를 예고한 것일 뿐이다. 예표들의 이러한 신비가 그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분명 사도행전이 바울의 이 이력을 나에게 전해 주었고, 그대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다. 거기에서 나는 박해자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을 통한 것도 아닌 사도임을 보여 준다. 거기에서 나 자신도 그를 믿게 되고, 거기에서 그대를 그의 변호에서 몰아낸다. 그리고 그대가 이렇게 말해도 두렵지 않다. “그러면 그대는 사도 바울을 부인하는가?” 나는 내가 지키는 이를 모독하지 않는다. 내가 부인하는 것은 그대가 증명하지 않을 수 없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부인하는 것은 그가 내 사람임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또는 그대가 우리의 믿음에 기댄다면, 그 믿음을 이루는 것들을 받아들여라. 그대가 그대의 믿음에 호소한다면, 그 믿음의 기초를 놓는 것들을 내놓아라. 그대가 믿는 것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라.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믿는가? 또 그대가 믿는 것이 있다는 것은 오직 그에 의해서만 증명되는데, 그에게 맞서 믿는 그대는 도대체 어떤 신자인가? 이제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사도도 내 것에서 받아 가져라. 사도는 그리스도와 똑같이 내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같은 전선에서 싸우고, 바로 그 항변의 자리에서 도전할 것이다. 곧 창조주의 사도임이 부정되고 더 나아가 창조주에 맞서는 이로 내세워지는 사도라면, 창조주를 따라서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창조주의 율법에서 떨어져 나간 만큼 단호하게 다른 신을 공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유대교에서 돌이키게 하면서 어떤 신에 대한 믿음으로 돌이키게 하는지를 함께 보여 주지 않았다는 것은 그럴듯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로 옮겨 가야 하는지 모르고서는 아무도 창조주에게서 옮겨 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가 이미 다른 신을 계시했다면, 사도의 증언도 뒤따라야 했다. 그리스도가 계시한 그 신의 사도가 아닌 것으로 여겨지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고, 그리스도가 이미 계시한 신을 사도가 감추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대로 그리스도가 신에 관해 그런 것을 아무것도 계시하지 않았다면, [그러면] 그 신은 더더욱 사도가 계시해야 했다. 이제는 다른 누구도 그 신을 계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조차 계시하지 않았다면 그 신은 의심할 여지 없이 믿을 수 없는 신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미리 놓아 둔 것은, 그리스도가 다른 신을 전하지 않았음을 증명했듯이 사도도 다른 신을 퍼뜨리지 않았음을 똑같이 증명하겠다고 이제부터 공언하기 위해서다. 그것도 바로 바울의 편지들 자체에서 증명할 것이다. 이 편지들 역시 그 수에서까지 훼손되었다는 판단은 이단의 복음서가 지닌 형태로 이미 앞서 내려졌어야 할 것이다.

Nihil sine origine nisi deus solus. quae quantum praecedit in statu omnium rerum, tantum praecedat necesse est etiam in retractatu earum, ut constare de statu possit, quia nec habeas dispicere quid quale sit, nisi certus an sit, cum cognoueris unde sit. et ideo ex opusculi ordine ad hanc materiam deuolutus apostoli quoque Pauli originem a Marcione desidero, nouus aliqui discipulus nec ullius alterius auditor, qui nihil interim credam nisi nihil temere credendum, temere porro credi quodcumque sine originis agnitione credetur, quique dignissime ad sollicitudinem redigam istam inquisitionem, cum is mihi adfirmatur apostolus, quem in albo apostolorum apud euangelium non deprehendo. denique audiens postea eum a domino adlectum iam in caelis quiescente, quasi improuidentiam existimo, si non ante sciit illum sibi necessarium Christus, sed iam ordinato officio apostolatus et in sua opera dimisso ex incursu, non ex prospectu adiciendum existimauit, necessitate, ut ita dixerim, non uoluntate. quamobrem, Pontice nauclere, si numquam furtiuas merces uel inlicitas in acatos tuas recepisti, si numquam omnino onus auertisti uel adulterasti, cautior utique et fidelior in dei rebus edas uelim nobis, quo symbolo susceperis apostolum Paulum, quis illum tituli charactere percusserit, quis transmiserit tibi, quis imposuerit, ut possis eum constanter exponere. ne illius probetur, qui omnia apostolatus eius instrumenta protulit, 'ipse se', inquit, 'apostolum est professus, et quidem non ab hominibus nec per hominem, sed per Iesum Christum'. plane profiteri potest semetipsum quis, uerum professio eius alterius auctoritate conficitur. alius scribit alius subscribit, alius obsignat alius actis refert. nemo sibi et professor et testis est. praeter haec utique legisti multos uenturos, qui dicant: ego sum Christus. si est qui se Christum mentiatur, quanto magis qui se apostolum praedicet Christi? adhuc ego in persona discipuli et inquisitoris conuersor, ut iam hinc et fidem tuam obtundam, qui unde eam probes non habes, et impudentiam suffundam, qui uindicas et unde possis uindicare non recipis. sit Christus, sit et apostolus nunc alterius, dum non probantur nisi de instrumento creatoris. nam mihi Paulum etiam Genesis olim repromisit. inter illas enim figuras et propheticas super filios suos benedictiones Iacob, cum ad Beniamin direxisset: Beniamin, inquit, lupus rapax; ad matutinum comedet adhuc et ad uesperam dabit escam. ex tribu enim Beniamin oriturum Paulum prouidebat, lupum rapacem ad matutinum comedentem, id est prima aetate uastaturum pecora domini ut persecutorem ecclesiaium, dehinc ad uesperam escam daturum, id est deuergente iam aetate oues Christi educaturum ut doctorem nationum. nam et Saulis primo asperitas insectationis erga Dauid, dehinc paenitentia et satisfactio, bona pro malis recipientis, non aliud portendebat quam Paulum in Saule secundum tribus et Iesum in Dauid secundum uirginis censum. haec figurarum sacramenta si tibi displicent, certe Acta Apostolorum hunc mihi ordinem Pauli tradiderunt, a te quoque non negandum. inde apostolum ostendo persecutorem non ab hominibus neque per hominem, inde et ipsi credere inducor, inde te a defensione eius expello nec timeo dicentem: tu ergo negas apostolum Paulum? non blasphemo quem tueor. nego, ut te probare compellam; nego, ut meum esse conuincam. aut, si ad nostram fidem spectas, recipe quae eam faciunt; si ad tuam prouocas, ede quae eam praestruunt. aut proba esse quae credis aut, si non probas, quomodo credis? aut qualis es aduersus eum credens, a quo solo probatur esse quod credis? habe nunc et apostolum de meo sicut et Christum, quam meum apostolum quam et Christum: isdem et hic dimicabimus lineis, in ipso gradu prouocabimus praescriptionis, oportere scilicet et apostolum, qui creatoris negetur immo et aduersus creatorem proferatur, nihil docere, nihil sapere, nihil uelle secundum creatorem, et inprimis tanta constantia alium deum edicere, quanta a lege creatoris abrupit. neque enim uerisimile est, ut auertens a Iudaismo non pariter ostenderet, in cuius dei fidem auerteret, quia nemo transire posset a creatore nesciens, ad quem transeundum sibi esset. siue enim Christus iam alium deum reuelauerat, sequebatur etiam apostoli testatio, uel ne non eius dei apostolus haberetur, quem Christus reuelauerat, et quia non licebat abscondi ab apostolo qui iam reuelatus fuisset a Christo; siue nihil tale de deo Christus reuelauerat, [at] tanto magis ab apostolo debuerat reuelari qui iam non posset ab alio, non credendus sine dubio, si nec ab apostolo reuelatus. quod idcirco praestruximus, ut iam hinc profiteamur nos proinde probaturos nullum alium deum ab apostolo circumlatum, sicut probauimus nec a Christo, ex ipsis utique epistolis Pauli, quas proinde mutilatas etiam de numero forma iam haeretici euangelii praeiudicasse debebit.

2

갈라디아 사람들을 가르치는 편지가 유대교에 맞서는 으뜸가는 편지라는 것은 우리도 인정한다. 우리는 옛 율법을 치워 버리는 그 모든 일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 일 역시 창조주의 경륜에서 나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우리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선포한 새롭게 함에 대해 이 저작의 진행 가운데 이미 여러 번 다룬 그대로다. 그런데 창조주는 옛것들이 그치리라고, 곧 새것들이 일어나리라고 약속했고, 그리스도는 이 <물러남의> 때를 구분하여 - 율법과 예언자들은 요한까지다 - 요한에게 경계를 세워 그때부터 그치는 옛것들과 시작되는 새것들의 두 질서 사이를 나누었다면, 요한 뒤에 계시된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도 반드시 옛것들은 약화시키고 새것들은 확증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그는 다른 신이 아니라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돌본다. 옛것들이 물러가리라는 것도 창조주에게서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에서도 율법의 허묾과 복음의 세움은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이것들은 갈라디아 사람들의 그 선입견과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말하자면 창조주의 그리스도이므로 창조주의 율법을 그대로 둔 채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미리 여겼다. 율법이 그 제정자에 의해 폐기된다는 것은 아직 믿기 어려운 일로 보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이 사도에게서 아예 다른 신에 대해 들었다면, 다른 신을 따르느라 버린 그 신의 율법에서 자기들이 떠나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스스로 알았을 것이다. 새로운 신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새로운 규율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배우려고 누가 더 오래 기다리겠는가? 오히려 복음에서 선포된 신성은 율법에서 언제나 알려져 있던 그 신성과 같았으나 규율은 같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의 쟁점 전체는 창조주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의 율법이 복음에 의해 배제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 쟁점을 없애 보라. 그러면 문제도 사라진다. 그런데 문제가 사라지면, 다른 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 창조주의 질서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을 모두가 스스로 알았을 것이므로, 믿음 자체가 스스로 일러 주었을 것을 사도가 그토록 강하게 가르칠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의 전체 의도는, 앞으로도 우리가 제시하겠지만, 창조주의 경륜에서 나오는 율법의 물러남 말고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또 그가 어떤 새로운 신도 언급하지 않는다면 - 이 주제에서보다 그렇게 했을 법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새로운 신성이라는 이 하나뿐이고 더없이 충분한 규정으로 율법을 물리칠 근거를 내놓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가 어떤 뜻으로 다음과 같이 쓰는지가 분명해진다. “너희를 은혜로 부른 이에게서 너희가 이처럼 빨리 옮겨 가 다른 복음으로 가는 것이 나는 놀랍다.” 그것은 생활 방식에서 다른 복음이지 종교에서 다른 것이 아니며, 규율에서 다른 것이지 신성에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에서 은혜로 불러내야 했지, 창조주에게서 다른 신에게로 불러내야 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들을 창조주에게서 떼어 놓아서, 그들이 창조주에게로 옮겨 가는 것이 이렇게 다른 복음으로 옮겨 가는 것처럼 보이게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다른 복음은 전혀 없다고 덧붙이는 것도, 그가 있다고 변호하는 그 복음이 창조주의 것임을 확증한다. 만일 창조주도 이사야를 통해 복음을 약속하여 “시온에 복음을 전하는 자여, 높은 산에 오르라.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하는 자여, 힘껏 소리를 높이라” 하고 말하고, 또 사도들을 두고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 좋은 것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때맞추어 왔는가” 하고 말한다면, 그들은 물론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다. 이렇게도 말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에 이방인들이 희망을 걸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를 이방인들의 빛으로 삼았다.” 그런데 새로운 신의 복음도 있고, 그대가 원하는 대로 그때 사도가 그 복음을 변호한 것이라면, 이제 두 신에게 두 복음이 있는 셈이다. 그리고 다른 복음도 있는데 다른 복음은 전혀 없다고 말한 사도는 거짓말을 한 셈이 된다. 그는 자기 복음을 하나뿐이라고 못 박는 대신 더 나은 것으로 내보이는 방식으로 변호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아마 그대는 여기서 빠져나가려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늘에서 온 천사가 다르게 복음을 전하더라도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고 덧붙였다. 창조주도 복음을 전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다시 스스로를 얽어맨다. 그대가 묶이는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다른 복음을 이미 부정한 사람이 두 복음을 확증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앞에 내세운 그의 뜻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나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다르게 복음을 전한다면.” 이것은 예를 들어 한 말이다. 게다가 그 자신도 다르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것이라면, 천사도 물론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그가 천사를 거명한 것은, 천사도 믿어서는 안 되니 [사도도 믿어서는 안 되니] 사람들은 더더욱 믿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였지, 천사를 창조주의 복음과 연결하려는 <뜻에서가> 아니었다. 이어서 그는 박해자에서 사도가 된 자기 회심의 경과를 훑어 가면서 사도행전의 기록을 확증한다. 그 기록에서는 이 편지의 주제 자체도 확인된다. 곧 어떤 사람들이 끼어들어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고, 그때 사도들이 이 문제에 관해 질문을 받고 영의 권위에 따라 조상들 자신도 감당할 수 없었던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서는 안 된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점에서도 사도행전이 바울과 일치한다면, 그대들이 왜 사도행전을 거부하는지 이제 분명해진다. 사도행전은 창조주 말고 다른 신을 선포하지 않고, 창조주의 그리스도 말고 다른 이의 그리스도를 선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의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것도 사도행전이라는 문서 말고는 다른 데서 증명되지 않으니 말이다. 사도행전이 바울 자신의 증언대로 그의 이력을 보여 줄 때에는 그 사도와 부분적으로 일치하고, 창조주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을 전할 때에는 부분적으로 어긋나서, 율법을 버리도록 가르치는 방식을 사도들에게서 받은 바울이 사도들의 선포는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그럴듯하지 않다.

Principalem aduersus Iudaismum epistolam nos quoque confitemur quae Galatas docet. amplectimur etenim omnem illam legis ueteris amolitionem, ut et ipsam de creatoris uenientem dispositione, sicut saepe iam in isto ordine tractauimus de praedicata nouatione a prophetis dei nostri. quodsi creator quidem uetera cessura promisit, nouis scilicet orituris, Christus uero tempus distinx<it decess>ionis istius, - lex et prophetae usque ad Iohannem - terminum in Iohanne statuens inter utrumque ordinem desinentium exinde ueterum et incipientium nouorum, necessarie et apostolus in Christo post Iohannem reuelato uetera infirmat, noua uero confirmat, atque ita non alterius dei fidem curat quam creatoris, apud quem et uetera decessura praedicabantur. igitur et legis destructio et euangelii aedificatio pro me faciunt in ista quoque epistola ad eam Galatarum praesumptionem pertinentes, qua praesumebant Christum, ut puta creatoris, salua creatoris lege credendum, quod adhuc incredibile uideretur legem a suo auctore deponi. porro, si omnino alium deum ab apostolo audissent, ultro utique scissent abscedendum sibi esse a lege eius dei, quem reliquissent alium secuti. quis enim expectaret diutius discere, quod nouam deberet sectari disciplinam qui nouum deum recepisset? immo quia eadem quidem diuinitas praedicabatur in euangelio, quae semper nota fuerat in lege, disciplina uero non eadem, hic erat totus quaestionis status, an lex creatoris ab euangelio deberet excludi in Christo creatoris. denique aufer hunc statum, et uacat quaestio. uacante autem quaestione, ultro omnibus agnoscentibus discedendum sibi esse ab ordine creatoris per fidem dei alterius, nulla apostolo materia competisset id tam presse docendi, quod ultro fides ipsa dictasset. igitur tota intentio epistolae istius nihil aliud docet quam legis decessionem uenientem de creatoris dispositione, ut adhuc suggeremus. si item nullius noui dei exerit mentionem, quod nusquam magis fecisset quam in ista materia, ut rationem scilicet ablegandae legis unica hac et sufficientissima definitione proponeret nouae diuinitatis, apparet quomodo scribat: miror uos tam cito transferri ab eo, qui uos uocauit in gratiam, ad aliud euangelium, ex conuersatione aliud, non ex religione, ex disciplina, non ex diuinitate, quoniam quidem euangelium Christi a lege euocare deberet ad gratiam, non a creatore ad alium deum. nemo enim illos mouerat a creatore, ut uiderentur sic ad aliud euangelium transferri, quasi dum ad creatorem transferuntur. nam et adiciens, quod aliud euangelium omnino non esset, creatoris confirmat id, quod esse defendit. si enim et creator euangelium repromittit dicens per Esaiam: ascende in montem excelsum qui euangelizas Sioni, extolle uocem in ualentia tua qui euangelizas Hierusalem; item ad apostolorum personam: quam tempestiui pedes euangelizantium pacem, euangelizantium bona, utique et nationibus euangelizantium, quoniam et: in nomine eius, inquit, nationes sperabunt, Christi scilicet, cui ait: posui te in lumen nationum, est autem euangelium etiam dei noui, quod uis tunc ab apostolo defensum, iam ergo duo sunt euangelia apud duos deos, et mentitus erit apostolus dicens, quod aliud omnino non est, cum sit et aliud, cum sic suum euangelium defendere potuisset, ut potius demonstraret, non ut unum determinaret. sed fortasse, ut hinc fugias: 'et ideo', dices, 'subtexuit: licet angelus de caelo aliter euangelizauerit, anathema sit, quia et creatorem sciebat euangelizaturum'. rursus ergo te implicas. hoc est enim, quo adstringeris: duo enim euangelia confirmare non est eius, qui aliud iam negarit. tamen lucet sensus eius, qui suam praemisit personam: sed et si nos aut angelus de caelo aliter euangelizauerit. uerbi enim gratia dictum est. ceterum si nec ipse aliter euangelizaturus, utique nec angelus. ita angelum ad hoc nominauit, quo multo magis hominibus non esset credendum, quando nec angelo, [et nec apostolo] non <quo> angelum ad euangelium referret creatoris. Exinde decurrens ordinem conuersionis suae de persecutore in apostolum scripturam Apostolicorum confirmat, apud quam ipsa etiam epistulae istius materia recognoscitur, intercessisse quosdam, qui dicerent circumcidi oportere et obseruandam esse Moysi legem, tunc apostolos de ista quaestione consultos ex auctoritate spiritus renuntiasse non esse imponenda onera hominibus, quae patres ipsi non potuissent sustinere. quodsi et ex hoc congruunt Paulo Apostolorum Acta, cur ea respuatis iam apparet, ut deum scilicet non alium praedicantia quam creatorem nec Christum alterius quam creatoris, quando nec promissio spiritus sancti aliunde probetur exhibita quam de instrumento Actorum, quae utique uerisimile non est ex parte quidem apostolo conuenire, cum ordinem eius secundum ipsius testimonium ostendunt, ex parte uero dissidere, cum diuinitatem in Christo creatoris adnuntiant, ut praedicationem quidem apostolorum non sit secutus Paulus, qui formam ab eis dedocendae legis accep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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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그는 십사 년 후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의 후원을 얻으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쓴다. 자기 복음의 규범에 관하여 그들과 의논하여, 혹시 그가 그들의 형식에 못 미치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면 그 많은 해 동안 헛되이 달렸거나 달리고 있는 것이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그만큼 그들에게 인정받고 확증받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대들은 바로 그들을 누구보다도 유대교에 더 가까운 자들로 이해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가 디도도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말할 때, 그는 이제 아직 율법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그들이 뒤흔든 것은 할례 문제 하나뿐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시작한다. 그가 바로 그 때문에 거짓 형제들, 몰래 들어온 형제들이라고 부르는 자들이다. 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창조주에 대한 온전한 믿음에서 율법의 존속 말고는 다른 것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복음을 왜곡했지만, 그것은 창조주의 그리스도를 꾸며 내려고 성경을 변조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율법을 배제하지 않으려고 옛 규율을 고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말한다. “몰래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에, 곧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우리의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살이에 굴복시키려고 몰래 들어온 자들 때문에, † 우리는 한시도 굴복하여 양보하지 않았다.” 사실 그 뜻 자체와 그 까닭에 주목해 보자. 그러면 성경이 변조된 것이 드러날 것이다. 그가 먼저 “나와 함께 있던 디도도 헬라인이었지만 억지로 할례를 받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이렇게 덧붙일 때, “몰래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에” 등등, 그는 분명히 반대되는 행동의 이유를 대기 시작하며, 무엇 때문에 그 일을 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 일을 하게 만든 그 사정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 일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보여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대가 말해 주면 좋겠다. 저 거짓 형제들이 그들의 자유를 엿보려고 몰래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그들이 굴복하여 양보했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양보했다.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아직 미숙하고 율법 준수에 관해 여전히 망설이던 믿음에 걸맞았다. 사도 자신도 혹시 자기가 헛되이 달렸거나 달리고 있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엿보는 거짓 형제들을 좌절시켜야 했다. 바울이 자기가 <헛되이> 달리지 않았음을 알기 전에, 선임자들이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기 전에, 그들의 <동의>를 얻어 이방인들에게 선포하는 직무를 맡기 전에, 그들이 그 자유를 유대교의 종살이로 끌고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어쩔 수 없이 잠시 양보했다. 그래서 그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고 머리를 깎은 자들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이유도 설명된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이 일들은 아주 참되어서, 유대인들을 얻으려고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이 되었고 율법 아래 사는 자들 때문에 율법 아래 사는 자가 되었으며, 그렇게 저 몰래 들어온 자들 때문에도 그리했고, 마침내 모든 사람을 얻으려고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도와 맞아떨어진다. 이 일들도 이것에서 이해되기를 요구한다면 말이다. 이것 또한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비록 배제하면서도 당분간은 때에 맞추어 허용했던 그 율법의 주인인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선포한 자였다. 만일 그가 새로운 신을 내세웠다면 그 율법은 즉시 치워 버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바울에게 오른손을 내밀고,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그들은 할례자들에게 가되 다만 궁핍한 자들을 기억하기로 직무 분담에 관해 약정한 것은 잘된 일이다. 이것도 가난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을 돌보는 창조주의 율법을 따른 것이다. 이는 그대들의 복음서를 검토할 때 입증되었다. 이처럼 율법에서 무엇을 지키기로 합의했는지가 제시되는 것을 보면, 문제는 오직 율법에 관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복음의 진리를 향해 바른 걸음으로 걷지 않는 베드로를 책망했다.” 물론 그는 책망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식생활의 일관성 없음 때문이었다. 베드로는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사람들의 부류에 따라 식생활을 바꾸었다. 신성의 어떤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만일 그가 마르키온파가 믿게 하려는 대로 믿<었더라면>, 애매한 처신이라는 더 작은 이유로도 베드로 자신을 봐주지 않은 그는 그 차이에 관해서 다른 이들에게도 면전에서 맞섰을 것이다. 그 밖의 것에 관해서는, 사도가 계속해서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게 하라. 다만 그 믿음은 율법도 그의 것인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사실 만일 신성 자체의 차이가 있었다면 그 차이가 이미 저절로 믿음을 율법에서 갈라놓았을 터이니, 그는 믿음을 율법에서 구별하려고 애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자기가 허문 것을 다시 세우지 않은 것은 마땅하다. 그런데 율법은 요한의 소리가 광야에서 외친 때부터 허물어져야 했다. “주의 길을 준비하라.” 이는 시내는 메워지고 언덕과 산은 낮아지며 굽은 곳과 거친 곳은 곧고 평평하게 되려는 것, 곧 율법의 어려움이 복음의 쉬움으로 바뀌려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그들의 결박을 우리에게서 끊고 그들의 멍에를 우리에게서 벗어 버리자”라는 시편 말씀의 때가 왔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이방 민족들이 소란하고 백성들이 헛된 일을 꾸미며, 세상의 왕들이 나서고 통치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한” 때부터였다. 그것은 이제 사람이 율법의 종살이에서가 아니라 믿음의 자유에서 의롭게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 이것을 예언자 하박국이 선언했다면, 그대는 그리스도처럼 사도도 예언자들을 확증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의인이 그 안에서 살 믿음은, 일하는 자가 그 안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는 율법의 주인인 바로 그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율법 안에는 저주가 있고 믿음 안에는 복이 있다면, 그대는 그 둘이 다 창조주에게서 제시되었음을 본다. 그는 말한다. “보라, 내가 네 앞에 저주와 복을 두었다.” 한 저자가 제시하는 차이를 그대는 그대의 주장의 근거로 내세울 수 없다. 그 차이는 사물들의 차이이기는 해도 그렇다고 저자들의 차이는 아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었는지를 사도 자신이 가르쳐 주니, 그가 얼마나 우리 편에, 곧 창조주에 대한 믿음 편에 서 있는지 분명하다. 사실 창조주가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다”라고 선언했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다른 신에게 속한 자로 보이고 그 때문에 이미 그때 율법에서 창조주에게 저주를 받은 자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면 창조주가 알지도 못하던 자를 어떻게 미리 저주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창조주가 자기 아들을 자기의 저주에 내준 것이, 그대의 저 신이 그를 저주에 굴복시킨 것보다, 더구나 남의 사람을 위해 그렇게 한 것보다 더 어울리지 않을 까닭이 무엇인가? 결국 이것이 창조주가 아들에게 한 일로서 잔혹해 보인다면, 그대의 신에게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것이 그대의 신에게서도 합리적이라면, 나의 하나님에게서도 마찬가지이고, 나의 하나님에게서 더욱 그렇다. 사실 그리스도의 저주를 통해 사람에게 복을 마련한 일은, 언젠가 사람 앞에 저주와 복을 둘 다 제시한 자의 일이라고 믿는 편이, 그대에게서 둘 중 어느 것도 공언한 적이 없는 자의 일이라고 믿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다.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영적인 복을 받는다.” 이 믿음은 분명 창조주를 따라 의인이 그것으로 사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믿음은, 믿음이라는 은혜의 형식을 소유한 그 하나님에게 속한다. 그러나 그가 “너희는 모두 믿음의 아들들이다”라고 덧붙일 때, 이단의 교묘한 솜씨가 앞에서 무엇을 지워 버렸는지 드러난다. 그것은 곧 아브라함에 대한 언급이다. 그 언급에서 사도는 우리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고 단언하며, 그 언급에 따라 여기서도 “믿음의 아들들”이라고 적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믿음의 아들들인가?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면 누구의 믿음인가? 사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으며 그 후로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불릴 자격을 얻었고,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믿음으로써 ** 아브라함처럼 마찬가지로 의롭게 되고, 의인이 믿음으로 사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생명을 얻는다면, 그렇게 해서 그는 앞에서는 우리를 믿음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고 선언했고, 여기서는 믿음의 아들들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 믿음을 통해 아브라함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었다. 그가 믿음을 할례에서 떼어 놓았다는 바로 그 점에서, 그는 육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믿었던 아브라함의 아들들을 세우려 한 것이 아닌가? 결국 한 신에 대한 믿음이 다른 신의 형식에 받아들여져서, 그 다른 신이 믿는 자들을 의로 여기고 의인들을 <믿음으로> 살게 하며 민족들을 믿음의 아들들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이 모든 것은 이미 전부터 그것이 알려져 있던 자의 것이다.

Denique ad patrocinium Petri ceterorumque apostolorum ascendisse Hierosolyma post annos quatuordecim scribit, ut conferret cum illis de euangelii sui regula, ne in uacuum tot annis cucurrisset aut curreret, si quid scilicet citra formam illorum euangelizaret. adeo ab illis probari et constabiliri desiderarat, quos, si quando, uultis Iudaismi magis adfines subintellegi. cum uero nec Titum dicit circumcisum, iam incipit ostendere solam circumcisionis quaestionem ex defensione adhuc legis concussam ab eis, quos propterea falsos et superinducticios fratres appellat, non aliud statuere pergentes quam perseuerantiam legis, ex fide sine dubio integra creatoris, atque ita peruertentes euangelium, non interpolatione scripturae, qua Christum creatoris effingerent, sed retentione ueteris disciplinae, ne legem creatoris excluderent. ergo propter falsos, inquit, superinducticios fratres, qui subintrauerant ad speculandam libertatem nostram, quam habemus in Christo, ut nos subigerent seruituti, † nec ad horam cessimus subiectioni. intendamus enim et sensui ipsi et causae eius, et apparebit uitiatio scripturae. cum praemittit: sed nec Titus, qui mecum erat, cum esset Graecus, coactus est circumcidi, dehinc subiungit: propter superinducticios falsos fratres et reliqua, contrarii utique facti incipit reddere rationem, ostendens propter quid fecerit quod nec fecisset, [nec ostendisset] si illud, propter quod fecit, non accidisset. denique dicas uelim, si non subintroissent falsi illi fratres ad speculandam libertatem eorum, cessissent subiectioni? non opinor. ergo cesserunt, quia fuerunt propter quos cederetur. hoc enim rudi fidei et adhuc de legis obseruatione suspensae competebat, ipso quoque apostolo ne in uacuum cucurrisset aut curreret suspecto. itaque frustrandi erant falsi fratres, speculantes libertatem Christianam, ne ante eam in seruitutem abducerent Iudaismi quam sciret se Paulus non <in> uacuum cucurrisse, quam dexteras ei darent antecessores, quam ex c<ons>ensu eorum in nationes praedicandi munus subiret. necessario igitur cessit ad tempus, et sic ei ratio constat Timotheum circumcidendi et rasos introducendi in templum, quae in Actis eduntur, adeo uera, ut apostolo consonent profitenti factum se Iudaeis Iudaeum, ut Iudaeos lucrifaceret, et sub lege agentem propter eos, qui sub lege agerent, sic et propter superinductos illos, et omnibus nouissime omnia factum, ut omnes lucraretur. si haec quoque intellegi ex hoc postulant. id quoque nemo dubitabit, eius dei et Christi praedicatorem Paulum, cuius legem, quamuis excludens, interim tamen pro temporibus admiserat, statim amoliendam, si nouum deum protulisset. bene igitur, quod et dexteras Paulo dederunt Petrus et Iacobus et Iohannes et de officii distributione pepigerunt, ut Paulus in nationes, illi in circumcisionem, tantum ut meminissent egenorum: et hoc secundum legem creatoris, pauperes et egenos fouentis, sicut in euangelii uestri retractatu probatum est. adeo constat de lege sola fuisse quaestionem, dum ostenditur quid ex lege custodiri conuenerit. 'sed reprehendit Petrum non recto pede incedentem ad euangelii ueritatem'. plane reprehendit, non ob aliud tamen quam ob inconstantiam uictus, quem pro personarum qualitate uariabat, timens eos, qui erant ex circumcisione, non ob aliquam diuinitatis diuersitatem, de qua et aliis in faciem restitisset qui de minore causa conuersationis ambiguae Petro ipsi non pepercit, si quomodo Marcionitae uolunt credi<disset.> De cetero pergat apostolus negans ex operibus legis iustificari hominem sed ex fide, eius dumtamen dei, cuius et lex. nec enim laborasset fidem a lege discernere, quam diuersitas ipsius diuinitatis ultro discreuisset, si fuisset. merito non reaedificabat quae destruxit. destrui autem lex habuit, ex quo uox Iohannis clamauit in eremo: parate uias domini, ut fierent riui et colles et montes repleti et humiliati et tortuosa et aspera in rectitudinem et in campos, id est legis difficultates in euangelii facilitates. meminerat iam et psalmi esse tempus: disrumpamus a nobis uincula eorum et abiciamus a nobis iugum ipsorum, ex quo tumultuatae sunt gentes et populi meditati sunt inania, adstiterunt reges terrae et magistratus congregati sunt in unum aduersus dominum et aduersus Christum ipsius, ut iam ex fidei libertate iustificaretur homo, non ex legis seruitute, quia iustus ex fide uiuit. quod si prophetes Abacuc pronuntiauit, habes et apostolum prophetas confirmantem, sicut et Christus. eius ergo dei erit fides, in qua uiuet iustus, cuius et lex, in qua non iustificatur operarius. Proinde si in lege maledictio est, in fide uero benedictio, utrumque habes propositum apud creatorem: ecce posui, inquit, ante te maledictionem et benedictionem. non potes distantiam uindicare - quae etsi rerum est, non ideo auctorum - quae ab uno auctore proponitur. cur autem Christus factus sit pro nobis maledictio, ipso apostolo edocente, manifestum est, quam nobiscum faciat, id est secundum fidem creatoris. neque enim quia creator pronuntiauit: maledictus omnis ligno suspensus, ideo uidebitur alterius dei esse Christus et idcirco a creatore iam tunc in lege maledictus. aut quomodo praemaledixisset eum creator, quem ignorabat? cur autem non magis competat creatori filium suum dedisse maledictioni suae quam illi deo tuo subdidisse maledictioni, et quidem pro homine alieno? denique si atrox uidetur hoc in creatore circa filium, proinde tuo in deo; si uero rationale et in tuo, proinde et in meo, et magis in meo. facilius enim credetur eius esse per maledictionem Christi benedictionem prospexisse homini, qui et maledictionem aliquando et benedictionem proposuerit ante hominem, quam qui neutrum umquam sit apud te professus. 'accipimus igitur benedictionem spiritalem per fidem,' inquit: ex qua scilicet uiuit iustus secundum creatorem. hoc est ergo, quod dico: eius dei fidem esse, cuius est forma gratiae fides. Sed et cum adicit: omnes enim filii estis fidei, ostenditur, quid supra haeretica industria eraserit: mentionem scilicet Abrahae, qua nos apostolus filios Abrahae per fidem adfirmat, secundum quam mentionem hic quoque 'filios fidei' notauit. ceterum quomodo filii fidei? et cuius fidei, si non Abrahae? si enim Abraham deo credidit et deputatum est <ei> iustitiae atque exinde pater multarum nationum meruit nuncupari, nos autem, credendo deo magis ***, proinde iustificamur, sicut Abraham, et uitam proinde consequimur, sicut iustus ex fide uiuit: sic fit, ut et supra filios nos Abrahae pronuntiarit, qua patris fidei, et hic filios fidei, per quam Abraham pater nationum fuerat repromissus. ipsum quod fidem a circumcisione reuocabat, nonne Abrahae filios constituere quaerebat, qui in carnis integritate crediderat? denique alterius dei fides ad formam dei alterius non potest admitti, ut credentes iustitiae deputet, ut iustos <ex fide> uiuere faciat, ut nationes filios fidei dicat. totum hoc eius est, apud quem ante iam notum 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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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 대한 같은 언급 아래에서, 마르키온이 바로 그 의미로 반박당하는데도,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직 사람의 예를 따라 말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세상의 원소들 아래 놓여 그것들을 섬기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예를 따라 한 말이 아니다. 이것은 예가 아니라 진리이기 때문이다. 실로 어떤 어린아이가, 물론 분별에서 어린아이라는 뜻이며 이방인들이 바로 그러한데, 자기가 신으로 우러러보는 세상의 원소들 아래 매여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가 그때 사람의 예를 따라 말한 것은 이것이었다. “그렇지만 사람의 언약이라도 아무도 무시하거나 덧붙이지 못한다.” 그는 효력이 지속되는 사람의 언약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언약을 옹호했던 것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약속들이 말해졌다. 여럿을 가리키듯 ‘자손들에게’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를 가리키듯 ‘자손에게’라고 말했으니, 이는 그리스도다.” 마르키온의 해면은 부끄러워하라! 다만 내가 그가 지워 버린 것들을 다시 다루는 것은 덤일 뿐이다. 그가 남겨 둔 것들로 그를 반박하는 편이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가 차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냈다.” 물론 그는 세상을 이루는 바로 그 때들의 하나님이며, 때의 표징들인 해들과 달들과 성좌들과 별들도 정해 둔 이요, 마침내 자기 아들의 나타남을 때들의 끝에 두기로 정하고 또 미리 선포한 이다. “마지막 날들에 주의 산이 드러날 것이다.” 또 요엘에 따르면 “마지막 날들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신에 부어 주겠다.” 때가 차기를 기다리는 일은, 때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때의 끝도 자기에게 속한 이의 몫이었다. 반면에 아무런 활동도 선포도 없고 그러므로 어떤 때도 갖지 않은 저 한가한 신은, 때가 차도록 하고 이제 차야 할 때를 기다리도록 할 만한 무슨 일을 도대체 했는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면, 그가 창조주를 섬기면서 창조주의 때를 기다렸다는 것은 참으로 허황한 일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자기 아들을 보냈는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기 위해서”다. - 이것은 이사야에 따르면 굽은 것들을 곧은 길로, 험한 것들을 평탄한 길들로 만들기 위해서이고,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생겨나게 하기 위해서다. “새 율법이 시온에서,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이다.” - 또 “우리가 아들의 명분을 받게 하기 위해서”다. 물론 아들이 아니었던 우리 이방인들이다. 실로 “그 자신이 이방인들의 빛이 될 것이고”, “그의 이름에 이방인들이 희망을 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임이 확실하도록 “그는 자기 영을 우리 마음에 보냈고, 그 영이 부르짖는다. 아빠, 아버지.” 실로 그는 “마지막 날들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신에 부어 주겠다”고 말한다. 은혜를 약속한 이가 아니라면 누구의 은혜이겠는가? 만든 이가 아니라면 누가 아버지이겠는가? 그러므로 이러한 부요함을 얻은 뒤에는 “약하고 천한 원소들”로 돌아가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로마인들 사이에서도 원소(elementa)라는 말은 흔히 첫 글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의 원소들을 깎아내림으로써 사람들을 그 원소들의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게 하려 한 것이 아니다. - 물론 그는 앞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본성상 신들인 것들을 섬긴다면”이라고 말함으로써, 원소들을 신으로 여기는 자연학적, 곧 자연에 관한 미신의 오류를 꾸짖지만, 그렇게 하면서도 원소들의 하나님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 오히려 그는 자기가 어떤 원소들을 뜻하는지, 곧 율법의 첫 글자들을 뜻한다는 것을 스스로 밝힌다. “너희가 날들과 달들과 절기들과 해들을 지킨다.” 내 생각에는 안식일들과 정결한 만찬들과 금식들과 큰 날들도 그러하다. 창조주의 결정에 따라, 할례와 마찬가지로 이것들도 그만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창조주는 이사야를 통해서도 말했다. “너희의 초하루들과 안식일들과 큰 날을 내가 견디지 않겠다. 너희의 금식과 축제일들과 의식들을 내 영혼이 미워한다.” 또 아모스를 통해서도 말했다. “내가 너희 의식들을 미워하고 내던졌다. 너희 성회들에서 나는 향기를 맡지 않겠다.” 또한 호세아를 통해서도 말했다. “내가 그의 모든 즐거움과 그의 의식들과 안식일들과 그의 초하루들과 그의 모든 성회를 그치게 하겠다.” 그대는 “자기가 세웠던 것들을 그가 지워 버렸단 말인가?”라고 말하는가? 다른 이보다는 오히려 그가 지웠다. 그렇지 않고 다른 이가 지웠다면, 그 다른 이는 창조주 자신도 정죄했던 것들을 없앰으로써 창조주의 판결을 도운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가 왜 자기 율법들을 깨뜨렸는가 하는 문제는 여기서 다룰 것이 아니다. 창조주가 그것들을 깨뜨릴 것임을 우리가 증명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로써 사도가 창조주에 맞서 아무것도 규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율법을 치워 버리는 일 자체도 창조주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둑들에게서 흔히 장물 가운데 무언가가 떨어져 단서가 되듯이, 나는 마르키온도 아브라함에 대한 마지막 언급을 남겨 두었다고 믿는다. 어떤 언급보다도 지워야 했을 언급인데도 말이다. 다만 그는 그것을 부분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실로 만일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여종에게서, 다른 하나는 자유인 여자에게서 났다. 그러나 여종에게서 난 자는 육신을 따라 났고, 자유인 여자에게서 난 자는 약속을 통해 났다. - 이것들은 비유(곧 다른 것을 미리 가리키는 것들)이다. 이들은 두 언약(또는 우리가 번역된 것을 발견하듯이 ‘두 보여 줌’)이니, 하나는 시내 산에서 나와 율법을 따라 유대인들의 회당으로 낳아 종이 되게 하고, 다른 하나는 모든 통치와 권세와 주권과 이 세대뿐 아니라 오는 세대에서도 일컬어지는 모든 이름 위로 낳되, 우리가 서약하여 들어간 거룩한 교회로 낳는다. 그 교회는 우리 어머니다.” 그래서 그는 덧붙여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인 여자의 자녀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분명히 드러냈다. 그리스도교의 고귀한 신분은 자유인 여자에게서 난 아브라함의 아들 안에 비유의 신비를 지니고 있고, 유대교의 율법적 종살이도 여종의 아들 안에서 그러하며, 따라서 두 경륜이 모두, 우리가 두 경륜의 밑그림을 발견하는 그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것을. 그가 “그리스도가 그 자유로 우리를 종에서 놓아주었다”고 말한 것 자체가, 주인이었던 이를 놓아준 이로 세운 것이 아닌가? 남의 종들은 갈바조차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유인들을 더 쉽게 풀어 주었을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율법의 종살이가 속해 있던 이에게서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종에서 놓인 자들이 다시 종의 멍에, 곧 율법의 멍에에 매이는 것은 마땅히 합당하지 않았다. 이미 시편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의 결박을 끊고 그들의 멍에를 우리에게서 던져 버리자.” 이는 “통치자들이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함께 모인” 뒤의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종살이에서 벗어난 이들에게서 종살이의 표지 자체인 할례를 지워 버리기를 고집했다. 물론 예언의 선포가 지닌 권위에 근거한 것이었고, 그는 예레미야를 통해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너희 마음의 포피를 베어 할례를 받으라.” 모세도 “너희는 너희 마음의 완고함을 베어 할례하라”고 했으니, 곧 육신을 베라는 것이 아니다. 끝으로, 그가 다른 신에게서 와서 할례를 배제한 것이라면, 왜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와 마찬가지로 무할례도 아무 효력이 없다고 말하는가? 그가 할례와 맞서는 신에게서 왔다면, 자기가 공격하던 할례의 맞수인 무할례를 앞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할례와 무할례가 모두 한 하나님에게 돌려졌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믿음이 앞서므로 둘 다 효력이 없었다. 그 믿음은 이렇게 기록된 믿음이다. “이방인들이 그의 이름을 믿을 것이다.” 또 그 믿음은, 그가 사랑을 통해 완성된다고 말함으로써 이렇게도 창조주의 것임을 보여 준 믿음이다. 그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말한다면, 이것도 창조주의 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 그가 이웃을 향한 사랑을 말한다 해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도 창조주의 것이다. “그러나 너희를 어지럽히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어느 신에게서 받는가? 지극히 선한 신에게서인가? 그러나 그 신은 심판하지 않는다. 창조주에게서인가? “그러나 창조주도 할례를 옹호하는 자를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창조주 말고 심판할 다른 이가 없다면,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율법을 그치게 하기로 정했기 때문이 아니라면 율법의 옹호자들을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율법을 마땅히 확증해야 할 부분에서는 확증하기까지 한다면 어떻겠는가? 실로 그는 “온 율법이 너희 안에서 이루어졌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한다. 아니면 그가 ‘이루어졌다’를 이제 더는 이룰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되기를 바란다면, 그렇다면 그는 내가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기를 바라지 않는가? 이것도 율법과 함께 그쳐 버렸다는 듯이? 그러나 이 계명은 언제나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주의 율법은 적대자에게서도 인정을 받았고, 그에게서 손실이 아니라 요약을 얻었으니, 그 전체가 이제 한 계명으로 모아졌다. 그러나 이 일도 율법을 만든 이보다 다른 이에게 더 어울리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그가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율법을 이룰 것이다”라고 말할 때, 이것이 누군가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너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이 말을 통해 “서로 너희 짐을 지라”는 말이 들린다)가 그리스도의 율법이며 그것이 창조주의 율법이라는 것, 따라서 그리스도의 율법이 창조주의 율법인 이상 그리스도는 창조주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너희가 잘못 생각한다.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르키온의 신은 조롱당할 수 있다. 그는 분노할 줄도 보복할 줄도 모른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것을 거둘 것이다.” 그러므로 보응과 심판의 하나님이 위협하는 것이다. “선을 행하면서 지치지 말자.” 또 “때가 있는 동안 선을 행하자.” 창조주가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고 부정해 보라. 그러면 다른 가르침이 다른 신성에 속한다고 해도 좋다. 더욱이 그가 보응을 선포한다면, 썩음의 추수도 생명의 추수도 같은 이에게서 올 것이다. “때가 이르면 우리가 거둘 것이다.” 전도자도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곧 창조주의 종인 나에게도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나 세상의 하나님이 못 박힌 것은 아니다. “나도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다.” 그러나 세상의 하나님에 대하여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세상을 그 생활 방식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버림으로써 그것과 서로 꿰뚫리고 서로에 대해 죽는다. [그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박해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가 자기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들, 물론 족쇄로 생긴 몸의 흔적들을 지니고 있다고 덧붙일 때, 그는 그리스도의 육신이 겉보기뿐인 육신이 아니라 참되고 견고한 육신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흔적들이 몸의 흔적임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Sub eadem Abrahae mentione, dum ipso sensu reuincatur, adhuc, inquit, secundum hominem dico: dum essemus paruuli, sub elementis mundi eramus positi ad deseruiendum eis. atquin non est hoc humanitus dictum, non enim exemplum est, sed ueritas. quis enim paruulus - utique sensu, quod sunt nationes - non elementis subiectus est mundi, quae pro deo suspicit? illud autem fuit, quod tum secundum hominem dixit: sed tamen testamentum hominis nemo spernit aut superordinat. exemplo enim humani testamenti permanentis diuinum tuebatur: Abrahae dictae sunt promissiones et semini eius. non dixit 'seminibus', quasi pluribus, sed 'semini' tamquam uni, quod est Christus. erubescat spongia Marcionis! nisi quod ex abundanti retracto quae abstulit, cum ualidius sit illum ex his reuinci, quae seruauit. cum autem euenit impleri tempus, misit deus filium suum, utique is, qui etiam ipsorum temporum deus est, quibus saeculum constat, qui signa quoque temporum ordinauit, soles et lunas et sidera et stellas, qui filii denique sui reuelationem in extremitatem temporum et disposuit et praedicauit: in nouissimis diebus erit manifestus mons domini, et: in nouissimis diebus effundam de meo spiritu in omnem carnem, secundum Iohelem. ipsius erat sustinuisse tempus impleri, cuius erat etiam finis temporis sicut initium. ceterum deus ille otiosus nec operationis nec praedicationis ullius atque ita nec temporis alicuius, quid omnino egit, quod efficeret tempus impleri et iam implendum sustineri? si nihil, satis uanum est, ut creatoris tempora sustinuerit seruiens creatori. cui autem rei misit filium suum? ut eos, qui sub lege erant, redimeret - hoc est ut efficeret tortuosa in uiam rectam et aspera in uias leues secundum Esaiam, ut uetera transirent et noua orirentur: lex noua ex Sion et sermo domini ex Hierusalem - et ut adoptionem filiorum acciperemus, utique nationes, quae filii non eramus. et ipse enim erit lux nationum et in nomine eius nationes sperabunt. itaque ut certum esset nos filios dei esse, misit spiritum suum in corda nostra clamantem: abba, pater. in nouissimis enim, inquit, diebus effundam de meo spiritu in omnem carnem. cuius gratia, nisi cuius et promissio gratiae? quis pater, nisi qui et factor? post has itaque diuitias non erat reuertendum ad infirma et mendica elementa. elementa autem apud Romanos quoque etiam primae litterae solent dici. non ergo per mundialium elementorum derogationem a deo eorum auertere cupiebat, - etsi dicendo supra: 'si ergo his, qui in natura sunt dei, seruitis,' physicae, id est naturalis, superstitionis elementa pro deo habentis suggillat errorem, nec sic tamen elementorum deum taxans - sed quae uelit intellegi elementa, primas scilicet litteras legis, ipse declarat: dies obseruatis et menses et tempora et annos. et sabbata, ut opinor, et caenas puras et ieiunia et dies magnos. cessare enim ab his quoque, sicut et circumcisione, oportebat ex decretis creatoris. qui et per Esaiam: neomenias uestras et sabbata et diem magnum non sustinebo, ieiunium et ferias et caerimonia uestra odit anima mea; et per Amos: odi, reieci caerimonias uestras, et non odorabor in frequentiis uestris; item per Osee: auertam uniuersas iocunditates eius et caerimonia eius et sabbata et neomenias eius et omnes frequentias eius. 'quae ipse constituerat,' inquis, 'erasit'? magis quam alius; aut si alius, ergo ille adiuuit sententiam creatoris, auferens quae et ille damnauerat. sed non huius loci quaestio, cur leges suas creator infregerit. sufficit, quod infracturum probauimus, ut confirmetur nihil apostolum aduersus creatorem determinasse, cum et ipsa amolitio legis a creatore sit. Sed ut furibus solet aliquid excidere de praeda in indicium, ita credo et Marcionem nouissimam Abrahae mentionem dereliquisse, nulla magis auferenda, etsi ex parte conuertit. si enim Abraham duos liberos habuit, unum ex ancilla et alium ex libera, sed qui ex ancilla carnaliter natus est, qui uero ex libera per repromissionem, - quae sunt allegorica (id est aliud portendentia); haec sunt enim duo testamenta (siue 'duae ostensiones', sicut inuenimus interpretatum): unum a monte Sina in synagogam Iudaeorum secundum legem generans in seruitutem, alium super omnem principatum generans uim dominationem et omne nomen quod nominatur, non tantum in hoc aeuo sed et in futuro, in quam repromisimus sanctam ecclesiam, quae est mater nostra - ideoque adicit: propter quod, fratres, non sumus ancillae filii, sed liberae, utique manifestauit et Christianismi generositatem in filio Abrahae ex libera nato allegoriae habere sacramentum, sicut et Iudaismi seruitutem legalem in filio ancillae, atque ita eius dei esse utramque dispositionem, apud quem inuenimus utriusque dispositionis deliniationem. ipsum quod ait: qua libertate Christus nos manumisit, nonne eum constituit manumissorem, qui fuit dominus? alienos enim seruos nec Galba manumisit, facilius liberos soluturus. ab eo igitur praestabitur libertas, apud quem fuit seruitus legis. et merito non decebat manumissos rursus iugo seruitutis, id est legis, adstringi, iam psalmo adimpleto: disrumpamus uincula eorum et abiciamus a nobis iugum ipsorum, postquam archontes congregati sunt in unum aduersus dominum et aduersus Christum ipsius. de seruitute igitur exemptis ipsam seruitutis notam eradere perseuerabat, circumcisionem, ex praedicationis scilicet propheticae auctoritate, memor dictum per Hieremiam: et circumcidimini praeputia cordis uestri; quia et Moyses: circumcidetis duricordiam uestram, id est non carnem. denique si circumcisionem ab alio deo ueniens excludebat, cur etiam praeputiationem negat quicquam ualere in Christo sicut et circumcisionem? praeferre enim debebat aemulam eius, quam expugnabat, si ab aemulo circumcisionis deo esset. porro, quia et circumcisio et praeputiatio uni deo deputabantur, ideo utraque in Christo uacabant propter fidei praelationem, illius fidei, de qua erat scriptum: et in nomine eius nationes credent, illius fidei, quam dicendo per dilectionem perfici sic quoque creatoris ostendit. siue enim dilectionem dicit quae in deum, et hoc creatoris est: diliges deum ex toto corde tuo et ex tota anima tua et ex totis uiribus tuis, siue quae in proximum, et: proximum tuum tamquam te creatoris est. Qui autem turbat uos iudicium feret. a quo deo? ab optimo? sed ille non iudicat. a creatore? 'sed nec ille damnabit adsertorem circumcisionis'. quodsi non erit alius, qui iudicet, nisi creator, iam ergo non damnabit legis defensores nisi quia ipse eam cessare constituit. quid nunc, si et confirmat illam ex parte, qua debet? tota enim, inquit, lex in uobis adimpleta est: diliges proximum tuum tamquam te. aut si sic uult intellegi 'adimpleta est', quasi iam non adimplenda, ergo non uult, diligam proximum tamquam me, ut et hoc cum lege cessauerit? sed perseuerandum erit semper in isto praecepto. ergo lex creatoris etiam ab aduersario probata est, nec dispendium, sed compendium ab eo consecuta est, redacta summa in unum iam praeceptum. sed nec hoc alii magis competit quam auctori. atque adeo cum dicit: onera uestra inuicem sustinete, et sic adimplebitis legem Christi, si hoc non potest fieri nisi quis diligat proximum sibi tamquam se, apparet: diliges proximum tibi tamquam te, per quod auditur: inuicem onera uestra portate, Christi esse legem, quae sit creatoris, atque ita Christum creatoris esse, dum Christi est lex creatoris. Erratis, deus non deridetur. atquin derideri potest deus Marcionis, qui nec irasci nouit nec ulcisci. quod enim seuerit homo, hoc et metet. ergo retributionis et iudicii deus intentat. bonum autem facientes non fatigemur et: dum habemus tempus, operemur bonum. nega creatorem bonum facere praecepisse, et diuersa doctrina sit diuersae diuinitatis. porro si retributionem praedicat, ab eodem erit et corruptionis messis et uitae. tempore autem suo metemus, quia et Ecclesiasticus: tempus, inquit, omni rei. Sed et mihi, famulo creatoris, mundus crucifixus est, non tamen deus mundi, et ego mundo, non tamen deo mundi. mundum enim quantum ad conuersationem eius posuit, cui renuntiando mutuo transfigimur et inuicem morimur. [persecutores uocat Christi.] cum uero adicit stigmata Christi in corpore suo gestare se - utique corporalia compedum - iam non putatiuam, sed ueram et solidam carnem professus est Christi, cuius stigmata corporalia osten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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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편지에서는 미리 세운 논증이 그렇게 흘러가서 나는 그 편지의 머리말을 다루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도 그것을 다룰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 머리말은 물론 모든 편지에 공통되고 똑같다. 그가 편지를 받는 이들에게 머리말에서 “안녕”이 아니라 “은혜와 평강”을 적는다는 점에 대해,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유대교를 허무는 자가 아직도 유대인의 관습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평강이라는 이름으로 인사하고, 예전에도 성경에서 그렇게 문안했기 때문이다 - 오히려 나는 그가 자기 직무로서 창조주의 선포를 옹호했다고 이해한다: “좋은 것을 전하는 자들, 평강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얼마나 때에 맞는가!” 그는 좋은 것들의, 곧 하나님의 은혜의 평강을 복음으로 전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평강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이것들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로부터” 전하면서 우리의 신비에도 들어맞는 공통된 이름들을 쓰므로, 어떤 하나님 아버지와 어떤 주 예수가 선포되는지는 덧붙은 속성들을 보고 그것들이 누구에게 더 들어맞는지 따지지 않고서는 가려낼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먼저 나는 아버지 하나님을 인간과 만물의 창조주이자 그것들을 세운 이 말고 다른 이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다. 다음으로, 아버지에게는 권능 때문에 주라는 이름도 붙으며, 아들도 아버지를 통해 이 이름을 얻는다고 규정한다. 이어서, 은혜와 평강은 그것들을 선포한 이에게 속할 뿐 아니라 노여움을 샀던 이에게<도> 속한다고 규정한다. 은혜는 노여움에 대해서만, 평강은 전쟁에 대해서만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성은 규율을 어김으로써, 온 인류는 본성을 외면함으로써 창조주에게 죄를 짓고 반역했다. 그러나 마르키온의 신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도, 분노할 줄 모르기 때문에도 노여움을 살 수 없었다. 그렇다면 노여움을 사지 않은 이에게서 무슨 은혜가 오는가? 반역을 당하지 않은 이에게서 무슨 평강이 오는가?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구원을 얻을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말하고, 이것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보여 주려고 덧붙인다: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이 창조주의 것이고 어리석음으로 여겨진 십자가의 문제에 관계된다면, 따라서 십자가도,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도, 십자가에 관계된 것을 선포한 창조주에게 속할 것이다. 아니면 창조주가 질투하는 자로서 그리스도의, 곧 자기 적수의 십자가가 어리석음으로 여겨지게 하려고 지혜를 없앴다면, 창조주는 자기 것이 아닌 그리스도, 선포할 당시에 알지 못하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해 도대체 어떻게 무언가를 선언할 수 있었겠는가? 또 지극히 선하고 자비가 넘치는 신에게서 왜 어떤 이들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믿어 구원을 얻고,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리석음으로 여겨져 멸망을 얻는가? 그렇지 않다면, 백성과 인류가 산 어떤 노여움을 지혜와 총명을 잃게 하는 것으로 벌한 것은 창조주가 한 일이다. 다음 구절들이 이것을 확증할 것이다. 그가 “하나님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지 않았느냐?”라고 말할 때, 그리고 여기서도 “세상이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지혜를 통해 하나님을 깨닫지 못했으므로, 하나님은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해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좋게 여겼다”라고 그 까닭을 덧붙일 때 그렇다. 그러나 먼저 “세상”에 대해 따져 보겠다. 지극히 교묘한 이단자들은 특히 이 대목에서 “세상”을 세상의 주로 해석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단순한 말하는 방식에 따라 세상 안에 있는 인간으로 이해한다. 이 방식에서 우리는 흔히 담고 있는 것을 담긴 것 대신 쓴다: “경기장이 외쳤다”, “광장이 말했다”, “바실리카가 술렁였다”라고 하는데, 곧 이 장소들에서 일을 벌인 사람들을 뜻한다. 그러므로 세상의 신이 아니라 인간이 마땅히 하나님을 알았어야 할 지혜 <안>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했으므로, 곧 유대인은 성경의 지혜 안에서, 모든 민족은 지은 것들의 지혜 안에서 알지 못했으므로, 그 때문에 지혜를 통해 자기 <지혜 안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바로 그 하나님은 십자가의 어리석은 선포를 믿는 이들을 누구든 구원함으로써 어리석음으로 인간의 지혜를 되받아치기로 정했다. 이미 하나님에 대해 확신하고 있어야 했던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물론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자기 지혜를 내세우는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새로운 신이 선포되었다면, 믿을 근거로 삼을 표적을 구한 유대인들이나 더 잘 믿을 근거로 삼을 지혜를 좇은 헬라인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이처럼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내려진 보응 자체도 하나님이 질투하는 이요 심판자임을 확증한다. 그는 질투하고 심판하는 갚음으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했다. 그런데 인용되는 성경의 주인에게 그 이유들도 속한다면, 따라서 창조주를 다루는 사도는 분명 이해되지 못한 창조주를 이해시키려고 가르치는 것이다. 또 그가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으로 선포한다는 점도, 그에 관해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한 창조주의 예언을 확증한다: “보라, 내가 시온에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바위를 두었다.” “그런데 그 바위는 그리스도였다”는 말은 마르키온도 남겨 두었다. 그런데 사람들보다 지혜로운 하나님의 어리석음이란 하나님의 십자가와 죽음이 아니면 무엇인가? 사람들보다 강한 하나님의 약함이란 하나님의 탄생과 육신이 아니면 무엇인가? 그렇지 않고 그리스도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육신으로 지어지지도 않았으며, 그래서 십자가도 죽음도 참으로 겪지 않았다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도 약한 것도 전혀 없었고, 이제는 하나님이 지혜로운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한 것도 아니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한 것도 아니고, 있는 것들, 곧 참으로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천하고 가장 작고 멸시받는, 없는 것들, 곧 참으로 있지 않은 것들을 택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정한 것 가운데 참으로 하찮고 천하고 멸시받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사람이 정한 것만 그렇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조주에게서는 이미 옛것들이 어리석음과 약함과 천함과 보잘것없음과 멸시받을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나님이 피 흘리는 제사와 기름 냄새 나는 번제를 요구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 더 약한 것이 무엇인가? 그릇과 침상을 정결하게 하는 것보다 더 약한 것이 무엇인가? 이미 부끄러워하는 육신을 또 다른 방식으로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천한 것이 무엇인가? 동해보복을 명하는 것만큼 비천한 것이 무엇인가? 음식을 가려 금하는 것만큼 멸시받을 것이 무엇인가? 내가 아는 한, 모든 이단자가 구약 전체를 비웃는다. 하나님이 지혜로운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했기 때문이다 - 마르키온의 신은 그런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 반대되는 것을 반대되는 것으로 논박하려는 질투도 없기 때문이다 - 이는 어떤 육신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고, 기록된 대로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서 자랑하게” 하려는 것이다. 누구 안에서인가? 물론 이것을 명한 이 안에서이다. 창조주가 마르키온의 신 안에서 자랑하라고 우리에게 명했다면 몰라도.

Praestructio superioris epistolae ita duxit, ut de titulo eius non retractauerim, certus et alibi retractari eum posse, communem scilicet et eundem in epistulis omnibus. quod non utique salutem praescribit eis, quibus scribit, sed gratiam et pacem, non dico: quid illi cum Iudaico adhuc more, destructori Iudaismi? - nam et hodie Iudaei in pacis nomine appellant et retro in scripturis sic salutabant - sed intellego illum defendisse officio suo praedicationem creatoris: quam maturi pedes euangelizantium bona, euangelizantium pacem. euangelizatur enim bonorum, id est gratiae dei pacem, quam praeferendam sciebat. haec cum a deo patre nostro et domino Iesu adnuntians communibus nominibus utatur competentibus nostro quoque sacramento, non puto dispici posse, quis deus pater et dominus Iesus praedicetur nisi ex accidentibus, cui magis competant. primo quidem patrem deum praescribo non alium agnoscendum quam et hominis et uniuersitatis creatorem et institutorem; porro patri etiam domini nomen accedere ob potestatem, quod et filius per patrem capiat; dehinc gratiam et pacem non solum eius esse, a quo praedicabantur, sed <et> eius, qui fuerit offensus. nec gratia enim fit nisi offensae nec pax nisi belli. et populus autem per disciplinae transgressionem et omne hominum genus per naturae dissimulationem et deliquerat et rebellauerat aduersus creatorem. deus autem Marcionis et quia ignotus non potuit offendi et quia nescit irasci. quae ergo gratia a non offenso? quae pax a non rebellato? Ait crucem Christi stultitiam esse perituris, uirtutem autem et sapientiam dei salutem consecuturis, et ut ostenderet, unde hoc eueniret, adicit: scriptum est enim: perdam sapientiam sapientium et prudentiam prudentium inritam faciam. si haec creatoris sunt et ad causam crucis pertinent stultitiam deputatam, ergo et crux et per crucem Christus ad creatorem pertinebit, a quo praedicatum est quod ad crucem pertinet. aut si creator, qua aemulus, idcirco sapientiam abstulit, ut crux Christi, scilicet aduersarii, stultitia deputetur, ecquomodo potest aliquid ad crucem Christi non sui creator pronuntiasse, quem ignorabat, cum praedicabat? sed et cur apud deum optimum et profusae misericordiae alii salutem referunt, credentes crucem uirtutem et sapientiam dei esse, alii perditionem, quibus Christi crux stultitia reputatur? si non, creatoris est aliquam et populi et humani generis offensam detrimento sapientiae atque prudentiae multasse. hoc sequentia confirmabunt, cum dicit: nonne infatuauit deus sapientiam mundi? cumque et hic adicit, quare: quoniam in dei sapientia non intellexit mundus per sapientiam deum, boni duxit deus per stultitiam praedicationis saluos facere credentes. sed prius de mundo disceptabo. quatenus subtilissimi haeretici hic uel maxime mundum per dominum mundi interpretantur, nos autem hominem qui sit in mundo intellegimus, ex forma simplici loquelae humanae, qua plerumque id, quod continet, ponimus pro eo, quod continetur: 'circus clamauit' et 'forum locutum est' et 'basilica fremuit', id est qui in his locis rem egerunt. igitur quia homo, non deus mundi in sapientia non cognouit deum, <in> qua cognoscere debuerat, et Iudaeus in sapientia scripturarum et omnis gens in sapientia operum, ideo deus idem, qui sapientia <in sapientia> sua non erat adcognitus, statuit sapientiam hominum stultitia repercutere, saluos faciendo credentes quosque in stultam crucis praedicationem. quoniam Iudaei signa desiderant, qui iam de deo certi esse debuerant, et Graeci sapientiam quaerunt, qui suam scilicet, non dei sapientiam sistunt. ceterum si nouus deus praedicaretur, quid deliquerant Iudaei signa desiderantes, quibus crederent, aut Graeci sapientiam sectantes, cui magis crederent? ita et remuneratio ipsa in Iudaeos et Graecos et zeloten deum confirmat et iudicem, qui ex retributione aemula et iudice infatuauerit sapientiam mundi. quodsi eius sunt et causae, cuius adhibentur scripturae, ergo de creatore tractans apostolus non intellecto creatori utique docet intellegendo. etiam quod scandalum Iudaeis praedicat Christum, prophetiam super illo consignat creatoris dicentis per Esaiam: ecce posui in Sion lapidem offensionis et petram scandali. 'petra autem fuit Christus' etiam Marcion seruat. quid est autem stultum dei sapientius hominibus, nisi crux et mors dei? quid infirmum dei fortius hominibus, nisi natiuitas et caro dei? ceterum si nec natus ex uirgine Christus nec carne constructus ac per hoc neque crucem neque mortem uere perpessus est, nihil in illo fuit stultum et infirmum, nec iam stulta mundi elegit deus, ut confundat sapientia, nec infirma mundi elegit deus, ut confundat fortia, nec inhonesta et minima et contemptibilia, quae non sunt, id est quae non uere sunt, ut confundat quae sunt, id est quae uere sunt. nihil enim a deo dispositum uere modicum et ignobile et contemptibile, sed quod ab homine. apud creatorem autem iam uetera stultitiae et infirmitati et inhonestati et pusillitati et contemptui deputari possunt. quid stultius, quid infirmius, quam sacrificiorum cruentorum et holocaustomatum nidorosorum a deo exactio? quid infirmius, quam uasculorum et grabattorum purgatio? quid inhonestius, quam carnis iam erubescentis alia dedecoratio? quid tam humile, quam talionis indictio? quid tam contemptibile, quam ciborum exceptio? totum, quod sciam, uetus testamentum omnis haereticus inridet. stulta enim mundi elegit deus, ut confundat sapientia - Marcionis deus nihil tale, quia nec aemulatur contraria contrariis redarguere - ne glorietur omnis caro, ut, quemadmodum scriptum est: qui gloriatur, in deo glorietur. in quo? utique in eo, qui hoc praecepit. nisi creator praecepit, ut in deo Marcionis gloriemur.

6

그러므로 사도는 이 모든 말로써 자기가 온전한 자들 가운데서 어느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지 보여 준다. 곧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없애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헛되게 하며, 세상의 지혜로운 것들을 어리석게 만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경륜한 하나님의 지혜다. 그는 이 지혜가 감추어져 있었다고 말한다. 이 지혜는 어리석은 것들 안에, 작은 것들 안에, 천한 것들 <안에> 있었고, 예표와 우의와 수수께끼 아래에도 숨어 있었다. 이 지혜는 나중에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될 것이었다. 창조주는 그리스도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고, 이사야의 목소리를 통해 보이지 않고 감추어진 보화들을 자기가 드러내겠다고 약속했다. 사실 무엇인가를 감추어 두었다고 여겨질 만한 일을 전혀 하지 않은 그 신이 무엇인가를 감추었다는 것은 도무지 믿기 어렵다. 그 신이 존재한다면 그 자신도 숨어 있을 수 없을 것이고, 그의 어떤 신비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는 그 자신도 알려져 있고 그의 신비들도 알려져 있다. 그 신비들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공공연히 진행되었으나 상징적인 의미들로 그늘져 있었고, 그 안에 하나님의 지혜가 숨어 있었다. 이 지혜는 때가 되면 온전한 자들 가운데서 이야기될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세대들 이전에 미리 정해져 있었다. 그 세대들도 창조주의 것이 아니면 누구의 것인가? 세대들이 시간들로 짜여 있고, 시간들은 날과 달과 해로 맞추어지며, 또 날과 달과 해는 창조주가 이 일을 위해 둔 태양과 달과 별들로 표시된다면 - 그는 “그것들이 달과 해의 표징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 세대들도 창조주의 것이고, 세대들 이전에 미리 정해졌다고 일컬어지는 모든 것도 세대들의 주인 말고 다른 이의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아니면 마르키온은 자기 신의 세대들을 증명해 보라. 세대들이 그 안에서 헤아려지는 세계 자체, 말하자면 시간들의 그릇을 보여 주고, 시간들의 어떤 표징이나 도구도 제시해 보라. 아무것도 보여 주지 못한다면 나는 다시 돌아가 이 점도 말하겠다. 그런데 그 신은 왜 창조주의 세대들 이전에 우리의 영광을 미리 정했는가? 세대가 시작될 때 그 영광을 계시했다면, 그가 그것을 세대들 이전에 미리 정했다고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창조주의 세대들이 거의 다 지나간 지금에야 그 일을 한다면, 그는 세대들이 거의 끝난 뒤에야 계시할 것을 차라리 세대들 안에서가 아니라 세대들 이전에 헛되이 미리 정한 것이다. 계시하는 데 늑장을 부리는 자에게는 미리 정하는 데 서둘렀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주에게는 둘 다 어울린다. 곧 세대들 이전에 미리 정한 것도, 세대들의 끝에 계시한 것도 어울린다. 그는 자기가 미리 정하고 계시한 것을 세대들의 중간 기간에도 예표와 수수께끼와 우의로 미리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도가 우리의 영광에 관해 이 세대의 통치자들 가운데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고, 알았더라면 결코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이므로, 이단자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주를 ** 곧 다른 신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논증하여 이것마저 창조주 자신에게 돌린다. 더 나아가 우리가 앞에서 우리의 영광이 창조주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 정해져야 하는지 보여 준 상대에게는, 창조주 곁에 감추어져 있던 그 영광이 창조주의 모든 능력들과 권능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당연하다는 점이 이미 판정된 것이어야 한다. 종들에게도 주인들의 계획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데, 하물며 저 배교한 천사들과 범죄의 우두머리인 마귀 자신에게는 더욱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그 죄과 때문에 창조주의 경륜에 관한 모든 앎에서 더욱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주장하겠다. 그러나 이제는 나도 “이 세대의 통치자들”을 창조주의 능력들과 권능들로 해석하는 것이 맞지 않다. 그 사도가 그들에게 무지를 돌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복음서에 따르면 마귀도 시험 때에 예수를 알아보았고, 공통의 문서에 따르면 악한 영은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고 예수라 불리며 그들을 멸하러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더 강한 다른 이가 제압하고 그의 세간을 차지한 저 무장한 강한 자의 비유는 ** 마르키온에게서 창조주에 관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창조주는 영광의 주에게 제압당하는 동안 더는 그를 몰랐을 수 없고, 자기가 맞서 이길 수 없던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없었다. 그러면 남는 결론은 - 내 생각으로는 이것이 믿을 만하다 - 창조주의 능력들과 권능들이 영광의 주, 곧 그의 그리스도를 알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다. 극악한 종들도 바로 그런 절망과 넘치는 악의로 자기 주인들을 서슴없이 죽인다. 내 성경에는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키온에 따르면 그 사도도 이 대목에서 영광의 주에 대한 무지를 창조주의 능력들에게 돌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사도는 그 능력들이 이 세대의 통치자들로 이해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도가 영적인 통치자들에 관해 말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세속의 통치자들에 관해 말한 것이다. 곧 으뜸 백성, 물론 이방 민족들 가운데 있지 않은 그 백성과, 그 백성의 관원들 자신과, 헤롯 왕과, 또 빌라도에 관해 말한 것이다. 빌라도를 통해서는 이 세대의 더 큰 통치권인 로마의 권위가 다스리고 있었다. 이렇게 상대편의 논증들이 무너질 때 우리의 해석들도 세워진다. 그러나 그대는 여전히 우리의 영광이 그대의 신의 것이고 그의 곁에 감추어져 있었다고 주장하려 한다. 그렇다면 왜 그 신과 그 사도는 아직도 같은 문서에 기대는가? 그가 어디서나 예언자들의 말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실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으며,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는가?” 이것은 이사야의 말이다. 그는 우리 하나님의 본보기들과도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가 자신을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단언하는데, 우리는 창조주가 이사야를 통해 이 말로 하나님의 가르침의 터를 잡는 자를 가리켰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실로 그는 “내가 유대에서 다른 것들과 함께 지혜로운 건축자도 없애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유대, 곧 유대교에서 옮겨져 그리스도교를 세우는 일에 쓰이고 유일한 터인 그리스도를 놓을 사람으로 그때 지목된 이가 바로 바울 자신이 아니었는가? 창조주가 같은 예언자를 통해 이것에 관해서도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보라, 내가 시온의 기초에 귀하고 존귀한 돌을 놓으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땅의 건물을 짓는 자라고 공언하여, 그를 믿는 자들의 터가 될 자기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면 모르겠다. 각 사람이 그 터 위에 합당한 가르침이든 합당하지 않은 가르침이든 세우는 대로, 그의 공적이 불로 검증되고 그에게 상이 불로 갚아진다면, 이것은 창조주에게 속한 일이다. 우리가 그 위에 세운 것, 물론 창조주 자신의 터, 곧 창조주 자신의 그리스도 위에 세운 것이 불로 심판받기 때문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고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사람이 창조주의 소유이고 작품이며 형상이고 모양이라면 - 육신은 흙을 통해, 영혼은 숨을 통해 그러하다 - 그러므로 마르키온의 신은 통째로 남의 것 안에 거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창조주의 성전이다. 그런데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망가뜨리면 그도 망가뜨림을 당할 것이다.” 물론 성전의 하나님에 의해서다. 그는 보복자를 내세워 위협함으로써 창조주를 내세워 위협했다.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어리석은 자가 되라.” 왜 그런가?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님 앞에서인가? 앞서 다룬 것들이 이 뜻에 관해서도 우리에게 아무것도 미리 판정해 주지 않았더라도, 그가 여기서도 이렇게 덧붙여 주니 다행이다.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들을 그들의 악함 가운데서 붙잡는 이.” 그리고 다시, “주는 지혜로운 자들의 생각들이 헛된 줄을 안다.” 사실 우리는 전체에 걸쳐 이 원칙을 세워 둔 셈이다.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해 가르친 것이 아니라면, 자기가 무너뜨려야 할 그 하나님의 어떤 말도 쓸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그러므로 아무도 사람을 두고 자랑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것도 창조주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사람에게 소망을 두는 사람은 비참하다.” 또 “사람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좋다.” 자랑하는 것도 그러하다.

Igitur per haec omnia ostendit, cuius dei sapientiam loquatur inter perfectos, eius scilicet, qui sapientiam sapientium abstulerit et prudentiam prudentium inritam fecerit, qui infatuauerit sapientia mundi, stulta eligens eius et disponens in salutem. hanc dicit sapientiam in occulto fuisse, quae fuerit in stultis et in pusillis et <in> inhonestis, quae latuerit etiam sub figuris, allegoriis et aenigmatibus. reuelanda postmodum in Christo, posito in lumen nationum a creatore promittente per Esaiae uocem patefacturum se thesauros inuisibiles et occultos. nam ut absconderit aliquid is deus, qui nihil egit omnino, in quod aliquid abscondisse existimaretur, satis incredibile. ipse si esset, latere non posset, nedum aliqua eius sacramenta. creator autem tam ipse notus quam et sacramenta eius, palam scilicet decurrentia apud Israhel, sed de significantiis obumbrata, in quibus sapientia dei delitiscebat. inter perfectos narranda suo in tempore, proposita uero in proposito dei ante saecula. cuius et saecula, nisi creatoris? si enim et saecula temporibus structa sunt, tempora autem diebus et mensibus et annis compinguntur, dies porro et menses et anni solibus et lunis et sideribus creatoris signantur in hoc ab eo positis, - et erunt enim, inquit, in signa mensium et annorum - apparet et saecula creatoris esse et omne, quod ante saecula propositum dicatur, non alterius esse, quam cuius et saecula. aut probet dei sui saecula Marcion; ostendat et mundum ipsum, in quo saecula deputentur, uas quodammodo temporum, et signa aliqua uel organa eorum. si nihil demonstrat, reuertor, ut et illud dicam: cur autem ante saecula creatoris proposuit gloriam nostram? posset uideri eam ante saecula proposuisse, quam introductione saeculi reuelasset. at cum id facit paene iam totis saeculis creatoris prodactis, uane ante saecula proposuit et non magis intra saecula quod reuelaturus erat paene post saecula. non enim eius est festinasse in proponendo, cuius est retardasse in reuelando. creatori autem competit utrumque: et ante saecula proposuisse et in fine saeculorum reuelasse, quia et quod proposuit et reuelauit medio spatio saeculorum in figuris et aenigmatibus et allegoriis praeministrauit. sed quia subicit de gloria nostra, quod eam nemo ex principibus huius aeui scierit, ceterum si scissent, numquam dominum gloriae crucifixissent, argumentatur haereticus principes huius aeui dominum ***, alterius scilicet dei Christum, crucifixerit, ut et hoc in ipsum redigat creatorem. porro cui supra ostenderimus, quibus modis gloria nostra a creatore sit † deputanda, praeiudicatum esse debebit eam, quae in occulto fuerit apud creatorem, merito igno<ra>tam etiam ab omnibus uirtutibus et potestatibus creatoris, quia nec famulis liceat consilia nosse dominorum, nedum illis apostatis angelis ipsique principi transgressionis, diabolo, quos magis extraneos fuisse contenderim ob culpam ab omni conscientia dispositionum creatoris. sed iam nec mihi competit 'principes huius aeui' uirtutes et potestates interpretari creatoris, quia ignorantiam illis adscribit apostolus. Iesum enim et secundum nostrum euangelium diabolus quoque in temptatione cognouit, et secundum commune instrumentum spiritus nequam sciebat eum sanctum dei esse et Iesum uocari et in perditionem eorum uenisse. etiam parabola fortis illius armati, quem alius ualidior oppressit et uasa eius occupauit, ***, si in creatoris accipitur apud Marcionem, iam nec ignorasse ultra potuit creator dominum gloriae, dum ab eo opprimitur, nec in cruce eum figere, aduersus quem ualere non potuit, et superest, ut - secundum me quidem credibile sit - scientes uirtutes et potestates creatoris dominum gloriae, Christum suum, crucifixerint, qua desperatione et malitiae redundantia serui quoque scelestissimi dominos suos interficere non dubitant; scriptum est enim apud me satanam in Iudam introisse. secundum autem Marcionem nec apostolus hoc loco patitur ignorantiam adscribi uirtutibus creatoris in gloriae dominum, quia scilicet non illas uult intellegi principes huius aeui. quod si non uidetur de spiritalibus dixisse principibus, ergo de saecularibus dixit, de populo principali, utique non inter nationes, de ipsis archontibus eius, de rege Herode, etiam de Pilato, et quo maior principatus huius aeui, Romana dignitas praesidebat. ita et cum destruuntur argumentationes diuersae partis, nostrae expositiones aedificantur. sed uis adhuc gloriam nostram dei tui esse et apud eum in occulto fuisse. et quare adhuc eodem et deus instrumento et apostolus nititur? quid illi cum sententiis prophetarum ubique? quis enim cognouit sensum domini, et quis illi consiliarius fuit? Esaiae est. quid illi etiam cum exemplis dei nostri? nam quod architectum se prudentem adfirmat, hoc inuenimus significari depalatorem disciplinae diuinae a creatore per Esaiam: auferam enim, inquit, a Iudaea inter cetera et sapientem architectum. et numqui non ipse tunc Paulus destinabatur, de Iudaea, id est de Iudaismo, auferri habens in aedificationem Christianismi, positurus unicum fundamentum, quod est Christus? quia et de hoc per eundem prophetam creator: ecce ego, inquit, inicio in fundamenta Sionis lapidem pretiosum, honorabilem, et qui in eum crediderit non confundetur. nisi si structorem se terreni operis deus profitebatur, ut non de Christo suo significaret, qui futurus esset fundamentum credentium in eum. super quod prout quisque superstruxerit, dignam scilicet uel indignam doctrinam, si opus eius per ignem probabitur, si merces illi per ignem rependetur, creatoris est, quia per ignem iudicatur nostra superaedificatio, utique sui fundamenti, id est sui Christi. Nescitis quod templum dei sitis et in uobis inhabitet spiritus dei? si homo et res et opus et imago et similitudo - et caro per terram et anima per afflatum - creatoris est, totus ergo in alieno habitat deus Marcionis, si non, creatoris sumus templum. quod si templum dei quis uitiauerit, uitiabitur, utique a deo templi. ultorem intentans creatorem intentauit. stulti estote, ut sitis sapientes. quare? sapientia enim huius mundi stultitia est penes deum. penes quem deum? si nihil nobis et ad hunc sensum pristina praeiudicauerunt, bene, quod et hic adstruit: scriptum est enim: deprehendens sapientes in nequitia illorum; et rursus: dominus scit cogitationes sapientium, quod sint superuacuae. in totum enim praescriptum a nobis erit nulla illum sententia uti potuisse eius dei, quem destruere deberet, si non illi doceret. ergo, inquit, nemo glorietur in homine, et hoc secundum creatoris disciplinam: miserum hominem, qui spem habet in hominem et: bonum est fidere in deo, quam fidere in hominibus; ita et gloriari.

7

“그리고 그 자신이 어둠에 숨겨진 것들을 밝힐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를 통해서다. 그는 그리스도를 민족들의 빛으로 약속했고, 자신을 콩팥과 마음을 살피는 등불이라고 선언했다. 각 사람에게 돌아갈 칭찬도 그에게서 올 것이다. 칭찬의 반대도 그에게서 오니, 심판자에게서 오는 것이다. 그대는 말한다. “분명 여기서만큼은 그가 세상을 세상의 신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세상에게, 그리고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세상으로 세상의 사람들을 뜻했다면 뒤이어 사람들을 따로 거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대가 그렇게 논증하지 못하도록, 성령의 섭리가 그가 어떤 뜻으로 말했는지를 보여 주었다. “우리는 세상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 곧 세상을 섬기는 천사들에게, 그리고 그 천사들이 섬기는 사람들에게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그토록 굳센 사람은, 성령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더욱이 자신이 복음으로 낳은 아들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세상의 신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부르기를 두려워했던 모양이다. <그 신을> 거슬러 선포한다고 보이려면 드러내 놓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는데도 말이다.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그 사람이 창조주의 율법에 따라 미움을 샀다고 나는 주장하지 않는다. 사도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공적 종교의 규율을 따랐다고 하자. 그러나 그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주라고 정죄할 때, 그는 정죄하는 하나님의 전령이다. 그가 또 어떻게 말했는지도 살펴볼 일이다. “육신을 멸하도록, 그리하여 영이 주의 날에 구원을 받도록.” 그는 육신의 멸망에 대해서도, 영의 구원에 대해서도 판결했고, ‘악을 가운데서 제거하라’고 명하면서 창조주가 가장 자주 내린 판결을 상기시켰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내버려, 너희가 누룩 없는 자들인 것처럼 새 반죽이 되게 하라.” 그러므로 누룩 없는 빵은 창조주에게서 우리의 예표였다. 그와 같이 우리의 유월절인 그리스도도 희생 제물이 되었다. 유월절이 짐승의 구원하는 피와 그리스도의 피가 닮았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예표가 아니라면, 왜 그리스도가 유월절인가? 창조주의 절기들이 우리 것이 아니었다면, 무엇이 우리와 그리스도에게 그 절기들의 형상을 입혔는가? 그는 우리를 음행에서 돌이키면서 육신의 부활을 밝힌다. 그는 말한다. “몸은 음행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한 것이고, 주는 몸을 위한다.” “성전이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이 성전을 위하는 것처럼.” 그렇다면 하나님에게서 성전이 없어지고 성전에게서 하나님이 없어진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대는 보고 있다. 하나님이 일으켰고 또 우리를 일으킬 그 이를 하나님은 몸으로도 일으켰다. 몸은 주를 위하고 주는 몸을 위하기 때문이다. 그가 덧붙이는 말도 적절하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단자는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이미 우리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부활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우리는 큰 값으로 산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환영이었고 우리 몸을 위해 치를 몸의 실체를 전혀 갖지 않았다면, 분명 아무 값도 치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도 우리를 속량할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무언가 큰 것으로 이 몸들을 속량했다면, 이 몸들은 이제 우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이므로 그 안에 음행을 들여서는 안 될 것이며, 그는 큰 값으로 산 것들을 분명 자신을 위해 온전히 지킬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멸망할 몸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지니고 다니겠는가? 이어서 혼인 문제와 맞붙을 차례다. 마르키온은 사도보다 더 철저하여 혼인을 금한다. 사실 사도는 절제의 선을 더 낫게 여기지만, 혼인이 맺어지는 것도, <또> 혼인 생활을 하는 것도 허락하며, 혼인을 끊기보다 유지하라고 권한다. 분명 그리스도는 이혼을 금하고, 모세는 허락한다. 그런데 마르키온은 신자들에게서 모든 동침을 없애고 - 그의 예비 신자들이야 알아서 할 일이다 - 혼인하기도 전에 이혼을 명하니, 그는 누구의 판결을 따르는가? 모세인가, 그리스도인가? 그런데 사도도 아내가 남편에게서 떠나지 말고, 만일 떠났으면 혼인하지 말고 지내거나 남편과 화해하라고 명할 때, 이혼을 전적으로 금하지는 않았으니 이혼을 허락한 것이고, 먼저 혼인을 끊지 말라고 하고 혹시 끊어졌다면 회복되기를 원했으니 혼인을 확증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제의 이유로 무엇을 드는가? “때가 단축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다른 신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때의 단축이 <누구에게서> 오든, 때의 단축에 걸맞은 것도 그에게서 올 것이다. 아무도 남의 때를 위해 마음 쓰지 않는다. 마르키온, 그대는 그대의 신이 하찮은 신이라고 단언하는 셈이다. 창조주의 때가 어떤 점에서든 그 신을 옥죄고 있으니 말이다. 분명 그는 오직 주 안에서만 혼인해야 한다고, 곧 어떤 신자도 이방인과 혼인을 맺지 말라고 규정함으로써, 이방 족속과의 혼인을 어디서나 금하는 창조주의 율법을 지킨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라고 그가 어떤 뜻으로 말했는지는 분명하다. 그들이 참으로 신인 것처럼 말한 것이 아니라, 신이 아닌데도 그렇게 불리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그는 우상의 제물에 대해 논하려 하면서 우상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상이 아무것도 아님을 안다.” 그런데 창조주가 신이라는 것은 마르키온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도가 신이라 불리지만 신이 아닌 자들 가운데 창조주도 넣었다고 볼 수는 없다. 설령 그들이 신이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만물이 그에게서 나온 한 하나님 아버지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물이 그에게서 나왔다”는> 우리에게 누구를 가리키는가? 만물이 그의 것인 이가 아니겠는가? 그 만물이란 무엇인가? 그대는 앞에 나온 대목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 “만물이 다 너희 것이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이처럼 그는 창조주를 만물의 하나님으로 삼는다.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그에게서 나오며, 이것들은 다른 신의 것일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만물 가운데 그리스도도 그에게서 나온다. 그는 각 사람이 자기 수고로 넉넉히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먼저 군인과 목자와 농부의 예를 들었다. 그러나 그 예들에는 신적 권위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마지못해 창조주의 율법을 맞세운다. 그가 허물고 있던 그 율법을 말이다. 자기 신의 것으로는 그런 율법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타작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그리고 덧붙인다. “소들에 관한 일이 주와 상관이 있느냐?” ** 사람들을 위하여 소들[에 관해서]까지 인자하다는 것인가? 그는 말한다. “이것은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율법이 우리와 관련하여 우의적이며 복음으로 사는 자들을 옹호한다는 것을 입증했고, 그 때문에 복음 전하는 자들이 율법의 주인 말고 다른 이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도 입증했다. 그 율법은 그들을 미리 돌보았으니, 그가 이렇게 말할 때 그렇다. “이것은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율법이 준 권리를 쓰려 하지 않았다. 값없이 수고하기를 더 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을 자기 자랑과 관련지었고, 누구도 그 자랑을 헛되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율법을 허무는 것과 관련지은 것이 아니다. 그는 다른 이가 그 율법을 쓰리라는 것을 입증했다. 그런데 보라, 눈먼 마르키온은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물을 마시던 그 바위에도 걸려 넘어진다. 사실 만일 그 바위가 그리스도였다면 - 물론 창조주의 그리스도다. 그 백성도 창조주의 백성이었다 - 그는 무엇을 위해 그것을 낯선 신비의 예표로 해석하는가? 아니면 바로 이것을, 곧 옛것들이 그것들을 통해 알아보아야 할 그리스도를 예표했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인가? 실제로 그는 백성이 맞은 나머지 결말을 훑어 나가려 하면서 먼저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말해 보라. 창조주가 다른 신, 그것도 알려지지 않은 신의 사람들을 위해 본보기를 만들었는가? 아니면 한 신이 다른 신에게서, 그것도 경쟁자에게서 본보기를 빌려 오는가? 그는 내 믿음을 떼어 내는 바로 그것을 가지고 나를 겁주어 자기 편으로 삼는가, <아니면> 적수가 나를 그를 위해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인가? 이제 내가 그 백성과 같은 죄를 짓는다면, 나도 같은 일을 당할 것인가, 아닌가? 그런데 같은 일을 당하지 않는다면, 그는 내가 당하지도 않을 일들을 헛되이 두려워하라고 내놓는 셈이다. 그런데 나는 누구에게서 당할 것인가? 창조주에게서라면, 그가 내릴 법한 그런 일들을 당하겠는가? 그리고 질투하는 하나님이 자기 경쟁자의 죄인을 오히려 감싸 주지 않고 벌한다면, 그것이 어찌 된 일이겠는가? 저 신에게서라면 - 그러나 그 신은 벌할 줄 모른다. 이처럼 창조주의 규율을 ** 위한 것이 아니라면 사도의 이 진술 전체는 아무 근거도 없이 무너진다. 마지막으로 그는 결론에서도 서두에 호응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들은 세대의 끝이 다다른 우리를 깨우치려고 기록되었다.” 오, 남의 그리스도인들까지 벌써 미리 알고 깨우치는 창조주라니! 앞에서 다룬 것들과 같은 내용은, 그런 것이 있을 때마다 건너뛴다. 어떤 것들은 짧게 정리하고 넘어간다. 율법을 거슬러 모든 먹을거리를 허락한 것이 다른 신의 큰 논거라니! 마치 우리도 율법의 짐이 벗겨졌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그 짐은 그것을 지운 이, 곧 새롭게 하겠다고 약속한 이가 벗겨 주었다. 이처럼 음식을 거두어 갔던 이가 처음부터 베풀었던 것을 되돌려 주었다. 게다가 만일 우리 하나님을 허무는 다른 어떤 신이 있었다면, 그는 자기 사람들에게 적수의 물자로 살아가는 것만큼은 무엇보다도 금했을 것이다.

Et occulta tenebrarum ipse inluminabit, utique per Christum, qui Christum in lumen nationum repromisit quique se lucernam pronuntiauit scrutantem renes et corda. ab illo erit et laus unicuique, a quo et contrarium laudis, ut a iudice. certe, inquis, uel hic mundum deum mundi interpretatur dicendo: spectaculum facti sumus mundo, et angelis et hominibus, quia, si mundum homines mundi significasset, non etiam homines postmodum nominasset. immo, ne ita argumentareris, prouidentia spiritus sancti demonstrauit, quomodo dixisset: spectaculum facti sumus mundo, dum angelis, qui mundo ministrant, et hominibus, quibus ministrant. uerebatur nimirum tantae constantiae uir, ne dicam spiritus sanctus, praesertim ad filios scribens, quos in euangelio generauerat, libere deum mundi nominare, aduersus <quem> nisi exerte non posset uideri praedicare. non defendo secundum legem creatoris displicuisse illum, qui mulierem patris sui habuit - communis et publicae religionis secutus sit disciplinam -: sed cum eum damnat dedendum satanae, damnatoris dei praeco, est. uiderit et quomodo dixerit: in interitum carnis, ut spiritus saluus sit in die domini, dum et de carnis interitu et de salute spiritus iudicarit et 'auferri' iubens 'malum de medio' creatoris frequentissimam sententiam commemorauerit. Expurgate uetus fermentum, ut sitis noua consparsio, sicut estis azymi. ergo azymi figurae erant nostrae apud creatorem. sic et pascha nostrum immolatus est Christus. quare pascha Christus, si non pascha figura Christi per similitudinem sanguinis salutaris pecoris et Christi? quid nobis et Christo imagines induit sollemnium creatoris, si non erant nostrae? Auertens autem nos a fornicatione manifestat carnis resurrectionem. corpus, inquit, non fornicationi, sed domino, et dominus corpori, 'ut templum deo et deus templo'. templum ergo deo peribit et deus templo? atquin uides: quem deus suscitauit et nos suscitabit, in corpore quoque suscitauit, quia corpus domino et dominus corpori. et bene quod aggerat: nescitis corpora uestra membra esse Christi? quid dicet haereticus? membra Christi non resurgent, quae nostra iam non sunt? empti enim sumus magno. plane nullo, si phantasma fuit Christus nec habuit ullam substantiam corporis, quam pro nostris corporibus dependeret. ergo et Christus habuit quo nos redimeret, et si aliquo magno redemit haec corpora, in quae admittenda fornicatio non erit ut in membra iam Christi, non nostra, utique sibi salua praestabit quae magno comparauit. iam nunc quomodo honorabimus, quomodo tollemus deum in corpore perituro? Sequitur de nuptiis congredi, quas Marcion constantior apostolo prohibet. etenim apostolus, etsi bonum continentiae praefert, tamen coniugium et contrahi permittit <et> usui esse, et magis retineri quam disiungi suadet. plane Christus uetat diuortium, Moyses uero permittit: Marcion totum concubitum auferens fidelibus - uiderint enim catechumeni eius - repudium ante nuptias iubens, cuius sententiam sequitur, Moysi an Christi? atquin et apostolus, cum praecipit mulierem a uiro non discedere aut, si discesserit, manere innuptam aut reconciliari uiro, et repudium permisit, quod non in totum prohibuit, et matrimonium confirmauit, quod primo uetuit disiungi et, si forte disiunctum, uoluit reformari. sed et continentiae quas ait causas? quia tempus in collecto est. putaueram, 'quia deus alius in Christo'. et tamen <a> quo est collectio temporis. ab eo erit et quod collectioni temporis congruit. nemo alieno tempori consulit. pusillum deum adfirmas tuum, Marcion, quem in aliquo coangustat tempus creatoris. certe praescribens tantum in domino esse nubendum, ne qui fidelis ethnicum matrimonium contrahat, legem tuetur creatoris, allophylorum nuptias ubique prohibentis. Sed et si sunt qui dicuntur dei, siue in caelis siue in terris apparet quomodo dixerit: non quasi uere sint, sed quia sint qui dicantur, quando non sint. de idolis enim coepit, de idolothytis disputaturus: scimus quod idolum nihil sit. creatorem autem et Marcion deum non negat. ergo non potest uideri apostolus creatorem quoque inter eos posuisse, qui dei dicantur et tamen non sint, quando, et si fuissent, nobis tamen unus esset deus pater, ex quo omnia. <ex quo omnia> nobis, nisi cuius omnia? quaenam ista? habes in praeteritis: omnia uestra sunt, siue Paulus siue Apollo siue Cephas siue mundus siue uita siue mors siue praesentia siue futura. adeo omnium deum creatorem facit, a quo et mundus et uita et mors, quae alterius dei esse non possunt. ab eo igitur inter omnia et Christus. Ex labore suo unumquemque docens uiuere oportere satis, exempla praemiserat militum pastorum rusticorum; sed diuina illis auctoritas deerat. legem igitur opponit creatoris ingratis, quam destruebat - sui enim dei nullam talem habebat -: boui, inquit, terenti os non obligabis, et adicit: num quid de bobus pertinet ad dominum? *** etiam [de] bobus propter homines benignum? propter nos enim scriptum est, inquit. ergo et legem allegoricam secundum nos probauit et de euangelio uiuentibus patrocinantem, ac propter hoc non alterius esse euangelizatores quam cuius lex, quae prospexit illis, cum dicit: propter nos enim scriptum est. sed noluit uti legis potestate, quia maluit gratis laborare. hoc ad gloriam suam retulit, quam negauit quemquam euacuaturum, non ad legis destructionem, qua alium probauit usurum. Ecce autem et in petram offendit caecus Marcion, de qua bibebant in solitudine patres nostri. si enim petra illa Christus fuit, - utique creatoris, cuius et populus - cui rei figuram extranei sacramenti interpretatur? an ut hoc ipsum doceret, figurata fuisse uetera in Christum ex illis recensendum? nam et reliquum exitum populi decursurus praemittit: haec autem exempla nobis sunt facta. dic mihi: a creatore alterius et quidem ignoti dei hominibus exempla sunt facta, an alius deus ab alio mutuatur exempla, et quidem aemulo? de illo me terret sibi, a quo fidem meam transfert, <an> meliorem me illi aduersarius faciet? iam si deliquero eadem, quae et populus, eademne passurus sum an non? atquin si non eadem, uane mihi timenda proponit quae non sum passurus. passurus autem a quo ero? si a creatore, qualia infligere ipsius est? et quale erit, ut peccatorem aemuli sui puniat magis quam e contrario foueat deus zelotes? si ab illo deo, - atquin punire non nouit. ita tota ista propositio apostoli nulla ratione consistit, si non ad * disciplinam creatoris est. denique et in clausula praefationi respondet: haec autem quemadmodum euenerunt illis scripta sunt ad nos commonendos, in quos fines aeuorum decucurrerunt. o creatorem et praescium iam et admonitorem alienorum Christianorum! Praetereo, si quando, paria eorum, quae retractata sunt; quaedam et breuiter expungo. magnum argumentum dei alterius permissio omnium opsoniorum aduersus legem! quasi non et ipsi confiteamur legis onera dimissa, sed ab eo, qui imposuit, qui nouationem repromisit. ita et cibos qui abstulit reddidit quod et a primordio praestitit. ceterum si quis alius deus fuisset, destructor dei nostri, nihil magis suos prohibuisset quam de copiis aduersarii uiuere.

8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다.” 어떤 그리스도인가? 남자의 창시자가 아닌 그리스도인가? 그 사도는 “머리”를 권위를 가리키는 말로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권위는 창시자 말고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닐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는 어떤 남자의 머리인가? 분명히 그 사도가 이어서 말하는 남자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머리를 가려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남자가 창조주의 형상이라면 - 실로 창조주는 장차 사람이 될 자기 말씀인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했다 - 내가 그 형상인 이 말고 다른 머리를 어떻게 가질 수 있겠는가? 내가 창조주의 형상인 이상, 내 안에는 다른 이의 머리가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여자는 왜 머리 위에 권세를 지녀야 하는가? 창조주의 제정에 따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남자를 위해 지어졌기 때문이라면, 그 사도는 이렇게 하여서도 창조주의 규율을 돌본 것이다. 그는 바로 그 창조주의 제정에서 규율의 이유를 풀이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천사들 때문에”라고 덧붙인다. 어떤 천사들인가? 곧 누구의 천사들인가? 창조주에게서 떨어져 나간 배교한 천사들이라면, 마땅한 말이다.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한 저 얼굴이 낮춘 차림새와 아름다움을 가림으로써 어떤 표를 지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신의 천사들 때문이라면, 그 사도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마르키온파 자신들조차 여자를 탐하지 않는데. 우리는 이미 여러 번, 그 사도에게서 이단들이 악들 가운데 하나의 악으로 놓여 있으며, 이단들을 악으로 여겨 피하는 사람들이 옳다고 인정받는 자들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였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미 복음서에서 빵과 잔의 성례로 주의 몸과 피의 실재를 마르키온의 환영 주장에 맞서 입증했고, 또 심판에 관한 모든 언급이 심판자 하나님인 창조주에게 속한다는 것은 거의 이 저작 전체에서 다루었다. 이제 신령한 것들에 관해서다. 나는 이것들도 창조주가 그리스도에게 약속한 것들이라고 말한다 **. 이는 내 생각에 지극히 정당한 저 규정, 곧 약속이 입증된 이가 아닌 다른 이의 것으로 그 실현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다. 이사야가 선포했다. “이새의 뿌리에서 가지 하나가 나오고, [뿌리에서] 꽃이 그 가지에서 올라올 것이며,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머물 것이다.” 이어서 그는 그 영의 종류들을 열거한다.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능력의 영, 지식과 경건의 영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이 그를 채울 것이다.” 그 예언자는 그리스도를 꽃이라는 예표로 보여 준다. 그리스도는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가지, 곧 이새의 아들 다윗 가문의 동정녀에게서 나올 것이며, 이 그리스도 안에 영의 온 실체가 자리 잡게 되어 있었다. 이는 마치 영이 나중에야 그에게 찾아오리라는 뜻이 아니다. 그는 육신을 입기 전에도 언제나 하나님의 영이었기 때문이다. - 그러니 그대는 이 대목을 근거로, 이 예언이 한낱 사람으로서 다윗의 혈통에서만 나와 나중에야 자기 하나님의 영을 얻게 될 그리스도에게 해당한다고 논증하지 말라. - 오히려 이는 그가 다윗의 줄기에서 취한 육신으로 꽃핀 그때부터 영적 은혜의 모든 활동이 그 안에 머물러 쉬며, 유대인들에 관한 한 그치고 끝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자체도 이를 증언한다. 그때부터 그들에게는 창조주의 영이 전혀 숨 쉬지 않고 있으며, 지혜롭고 총명한 건축자와 모사와 예언자가 유대에서 제거되었으니, 이는 다음 말씀이 성립하기 위함이다. “율법과 예언자들은 요한까지다.” 이제 하늘로 올려진 그리스도에게서도 은사들이 나오게 될 것이라고 어떻게 선포되었는지 들어 보라. “그가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곧 하늘로. “그는 사로잡힘을 사로잡아 끌고 갔다.” 곧 죽음 또는 인간의 종살이를. “그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선물들을 주었다.” 곧 하사품들이며, 우리는 이것을 은사라고 부른다. 그가 아무렇게나 “사람들에게”라고 하지 않고 “사람의 아들들에게”라고 한 것은 적절하다. 이로써 그는 우리가 사람의 아들들, 곧 참으로 사람들인 사도들의 아들들임을 보여 준다. 그 사도는 “내가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다”라고 하고, 또 “내가 다시 해산하는 수고로 낳는 나의 아들들아”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요엘을 통해 주어진 영의 저 약속도 이루어졌다. “마지막 때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신에 부어 줄 것이니, 그들의 아들들과 딸들이 예언할 것이요, 내 남종들과 여종들 위에도 내 영을 부어 줄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창조주가 마지막 날들을 위해 영의 은혜를 약속했고, 그리스도는 신령한 것들을 나누어 주는 이로서 마지막 날들에 나타났다면, 그 사도가 이렇게 말하는 대로다. “그러나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냈다.” 또 이렇게 말한다. “때가 이미 단축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에 관한 선포로부터도, 영의 이 은혜가 그것을 선포한 이의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끝으로 그 사도와 이사야가 든 종류들을 비교해 보라. 그 사도는 말한다. “어떤 이에게는 영을 통해 지혜의 말씀이 주어진다.” 이사야도 맨 먼저 지혜의 영을 두었다. “어떤 이에게는 지식의 말씀이”: 이것은 총명과 모략의 말씀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같은 영 안에서 믿음이”: 이것은 경건과 하나님 경외의 영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이”: 이것은 능력의 영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예언이,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이, 어떤 이에게는 각종 방언이, 어떤 이에게는 방언 통역함이”: 이것은 지식의 영일 것이다. 그 사도가 한 영의 분배를 행하는 데서도, 그 개별 종류를 풀이하는 데서도 예언자와 같은 숨을 쉬는 것을 보라.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 사도는 다양한 은사들의 단일성을 많고 서로 다른 지체로 이루어진 우리 몸의 결합에 견주었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간의 몸의 주와 성령의 주가 동일한 이임을 보여 주었다. 그 주는 인간의 몸 안에 <지체들의> 공로를 두지 않은 것처럼 영의 몸 안에서도 은사들의 공로가 있기를 원하지 않았고, 사랑을 모든 은사보다 앞세워야 한다는 것에 관해서도 그리스도 또한 인정한 으뜸 계명으로 그 사도를 가르쳤다. “너는 온 마음과 온 힘과 온 영혼으로 주를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또 그 사도가 창조주가 다른 방언들과 다른 입술들로 말하리라고 율법에 기록된 것을 상기시키고 이 상기로 방언의 은사를 확증한다면, 여기서도 그가 남의 은사를 창조주의 선포로 확증했다고 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그는 교회에서 여자들에게 침묵을 명하여 그들이 배우려는 목적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게 하면서 - 다만 여자들에게도 예언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예언하는 여자에게도 너울을 씌울 때 이미 보여 주었다 - 여자를 복종시키는 근거를 율법에서 가져온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는 그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알아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이제 신령한 것들을 떠나기 위해, 사실 자체가 입증해야 할 것이다. 우리 가운데 누가 이것들을 함부로 자기 신에게 돌리는지, 그리고 창조주가 아직 계시되지 않았고 유대인들에게만 정해진 자기 그리스도에게 이것들을 약속하여, 이것들이 그의 때에 그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 가운데 제 활동을 지니게 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것들이 우리 편에 맞서 내세워질 수 있는지를 말이다. 그러니 마르키온은 자기 신의 선물들을 내보이라. 인간의 생각에서가 아니라 신의 영에서 말한 어떤 예언자들, 곧 장래 일을 미리 알리고 마음의 숨은 것들을 드러낸 예언자들을. 어떤 시편, 어떤 환상, 어떤 기도를 내놓으라. 다만 황홀경, 곧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나온 영적인 것이어야 하고, 거기에 어떤 방언 통역이 따랐다면 말이다. 또 자기 무리 가운데서, 그의 저 더 거룩한 위대한 여인들 가운데 어떤 여자가 예언했다는 것도 내게 입증해 보이라. 그러면 나는 말하겠다. 이 모든 것이 내 쪽에서 더 쉽게 제시되고, 더구나 창조주의 규칙과 경륜과 규율에 일치한다면, 그리스도도 영도 사도도 의심할 여지 없이 내 하나님의 것이다. 내 공언을 요구하려는 이는 누구든 그것을 이미 손에 쥐고 있다.

Caput uiri Christus est. quis Christus? qui non est uiri auctor? 'caput' enim ad auctoritatem posuit, auctoritas autem non alterius erit quam auctoris. cuius denique uiri caput est? certe de quo subicit: uir enim non debet caput uelari, cum sit dei imago. igitur si creatoris est imago - ille enim Christum sermonem suum intuens, hominem futurum: faciamus, inquit, hominem ad imaginem et similitudinem nostram - quomodo possum alterum habere caput, non eum, cuius imago sum? cum enim imago sim creatoris, non est in me locus capitis alterius. sed et quare mulier potestatem super caput habere debebit? si quia ex uiro et propter uirum facta est secundum institutionem creatoris, sic quoque eius disciplinam apostolus curauit, de cuius institutione causas disciplinae interpretatur. adicit etiam: propter angelos. quos? id est cuius? si creatoris apostatas, merito, ut illa facies, quae eos scandalizauit, notam quandam referat de habitu humilitatis et obscuratione decoris; si uero propter angelos dei alterius, quid ueretur, si nec ipsi Marcionitae feminas adpetunt? Saepe iam ostendimus haereses apud apostolum inter mala ut malum poni et eos probabiles intellegendos, qui haereses ut malum fugiant. Proinde panis et calicis sacramento iam in euangelio probauimus corporis et sanguinis dominici ueritatem aduersus phantasma Marcionis, sed et omnem iudicii mentionem creatori competere, ut deo iudici, toto paene opere tractatum est. Nunc de spiritalibus. dico haec quoque, in Christum a creatore promissa ***, sub illa praescriptione, iustissima opinor, qua non alterius credenda sit exhibitio, quam cuius probata fuerit repromissio. pronuntiauit Esaias: prodibit uirga de radice Iesse, et flos [de radice] ascendet de uirga, et requiescet super eum spiritus dei. dehinc species eius enumerat: spiritus sapientiae et intellegentiae, spiritus consilii et ualentiae, spiritus agnitionis et religionis, spiritus eum replebit timoris dei. Christum enim in floris figura ostendit, oriturum ex uirga profecta de radice Iesse, id est uirgine generis Dauid, filii Iesse, in quo Christo consistere haberet tota substantia spiritus, non quasi postea obueutura illi, qui semper spiritus dei fuerit, ante carnem quoque, - ne ex hoc argumenteris prophetiam ad eum Christum pertinere, qui ut homo tantum ex solo censu Dauid postea consecuturus sit dei sui spiritum, - sed quoniam exinde, quo floruisset in carne sumpta ex stirpe Dauid, requiescere in illo haberet omnis operatio gratiae spiritalis et concessare et finem facere, quantum ad Iudaeos; sicut et res ipsa testatur, nihil exinde spirante penes illos spiritu creatoris, ablato a Iudaea sapiente et prudente architecto et consiliario et propheta, ut hoc sit: lex et prophetae usque ad Iohannem. accipe nunc, quomodo et a Christo in caelum recepto charismata obuentura pronuntiarit: ascendit in sublimitatem, id est in caelum; captiuam duxit captiuitatem, id est mortem uel humanam seruitutem; data dedit filiis hominum, id est donatiua, quae charismata dicimus. eleganter 'filiis hominum' ait, non passim 'hominibus', nos ostendens filios hominum, id est uere hominum, apostolorum. in euangelio enim, inquit, ego uos generaui, et: filii mei, quos parturio rursus, iam nunc et illa promissio spiritus absoluta, facta per Iohelem: in nouissimis temporibus effundam de meo spiritu in omnem carnem, et prophetabunt filii filiaeque eorum, et super seruos et ancillas meas de meo spiritu effundam. et utique si in nouissimos dies gratiam spiritus creator repromisit, Christus autem spiritalium dispensator in nouissimis diebus apparuit dicente apostolo: at ubi tempus expletum est, misit deus filium suum, et rursus: quia tempus iam in collecto est, apparet et de temporum ultimorum praedicatione hanc gratiam spiritus ad Christum praedicatoris pertinere. compara denique species apostoli et Esaiae. alii, inquit, datur per spiritum sermo sapientiae: statim et Esaias sapientiae spiritum posuit; alii sermo scientiae: hic erit sermo intellegentiae et consilii; alii fides in eodem spiritu: hic erit spiritus religionis et timoris dei; alii donum curationum, alii uirtutum: hic erit ualentiae spiritus; alii prophetia, alii distinctio spirituum, alii genera linguarum, alii interpretatio linguarum: hic erit agnitionis spiritus. uide apostolum et in distributione facienda unius spiritus et in specialitate interpretanda prophetae conspirantem. possum dicere: ipsum quod corporis nostri per multa et diuersa membra unitatem charismatum uariorum compagini adaequauit, eundem et corporis humani et spiritus sancti dominum ostendit, qui merita charismatum noluerit esse in corpore spiritus, quae nec <membrorum> in corpore humano collocauit, qui de dilectione quoque omnibus charismatibus praeponenda apostolum instruxerit principali praecepto quod probauit et Christus: diliges dominum de totis praecordiis et totis uiribus et tota anima et proximum tibi tamquam te. et si quod in lege scriptum esset commemorat in aliis linguis et in aliis labiis locuturum creatorem, cum hac commemoratione charisma linguarum confirmat, nec hic potest uideri alienum charisma creatoris praedicatione confirmasse. aeque praescribens silentium mulieribus in ecclesia, ne quid discendi dumtaxat gratia loquantur, - ceterum prophetandi ius et illas habere iam ostendit, cum mulieri etiam prophetanti uelamen imponit - ex lege accipit subiciendae feminae auctoritatem, quam, ut semel dixerim, nosse non debuit nisi in destructionem. Sed ut iam a spiritalibus recedamus, res ipsae probare debebunt, quis nostrum temere deo suo uindicet et an nostrae parti possit opponi haec, et si creator repromisit in suum Christum nondum reuelatum, ut Iudaeis tantum destinatum, suas habitura in suo tempore in suo Christo et in suo populo operationes. exhibeat itaque Marcion dei sui dona, aliquos prophetas, qui tamen non de humano sensu, sed de dei spiritu sint locuti, qui et futura praenuntiarint et cordis occulta traduxerint; edat aliquem psalmum, aliquam uisionem, aliquam orationem, dumtaxat spiritalem, in ecstasi, id est in amentia, si qua linguae interpretatio accessit; probet mihi etiam mulierem apud se prophetasse ex illis suis sanctioribus feminis magnis, dicam: si haec omnia facilius a me proferuntur et utique conspirantia regulis et dispositionibus et disciplinis creatoris, sine dubio dei mei erit et Christus et spiritus et apostolus. habet professionem meam qui uoluerit eam exigere.

9

그동안 마르키온파는 이런 것을 하나도 내놓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이것도 밝혀 주어야 한다. 오히려 누구의 그리스도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선포된 내 그리스도는 기다려야 할 이이듯, 그의 그리스도는 바로 그 때문에, 곧 처음부터 선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이가 아니다. 이처럼 우리가 앞으로 올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이단자가 어느 그리스도를 믿는 것보다 낫다. 어떤 이들이 그때 죽은 자들의 부활을 어떤 방식으로 부인했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분명 지금과 같은 방식이었다. 늘 부인되는 것은 육신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반면 영혼에 대해서는 현자들 가운데서도 여럿이 그것이 신적이라고 주장하며 그 보존을 약속하고, 일반 대중도 죽은 이들의 영혼이 남아 있다고 믿는 바로 그 확신으로 죽은 이들을 공경한다. 반면 몸은 곧바로 불에 타거나 짐승에게 먹히거나, 아무리 정성껏 묻혀도 결국 세월에 사라진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사도가 [육신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을 물리친다면, 그는 분명 그들에 맞서 그들이 부인하던 것, 곧 육신의 부활을 지키는 것이다. 그대는 간추린 답을 얻었다. 나머지는 이제 덤이다. 실제로 “죽은 자들의 부활”이라고 불린다는 바로 그 사실이 “죽은 자들”<과 “부활”>이라는 낱말들의 고유한 뜻을 변호하기를 요구한다. [이처럼] 죽은 것[이라는 낱말]은 영혼을 잃은 것, 곧 그 영혼의 능력으로 살던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영혼을 잃는 것은 몸이며, 몸은 영혼을 잃음으로써 죽은 것이 된다. 이처럼 “죽은 것”이라는 낱말은 몸에 해당한다. 더 나아가 부활이 죽은 것의 부활이고 죽은 것이 몸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면, 부활은 몸의 부활일 것이다. 이와 같이 “부활”이라는 낱말도 쓰러진 것 외에 다른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일어난다”는 말은 전혀 쓰러진 적이 없는 것, 이전부터 늘 누워 있던 것에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일어난다”는 말은 쓰러진 것에만 해당한다. 쓰러졌기 때문에 다시 일어남으로써 “다시 일어난다”고 불리기 때문이다. “re”라는 음절은 언제나 반복을 나타내는 데 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이 죽음을 통해 땅에 쓰러진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의 율법에서 나온 사실 자체도 이를 증언한다. 몸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갈 것이다.” 그러므로 흙에서 난 것이 흙으로 갈 것이고, 흙으로 갈 것이 쓰러지는 것이며, 쓰러지는 것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으니, 사람으로 말미암아 부활도 온다.” 여기서 나에게는 “사람”이라는 이름 안에 그리스도의 몸도 드러난다. 우리가 이미 여러 번 밝혔듯이 사람은 몸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모두 아담 안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림을 받는다면, 우리가 아담 안에서 몸으로 죽임을 당하는 이상, 그리스도 안에서도 그와 같이 [몸으로] 살림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살림이 아담 안에서의 죽임과 같은 실체 안에서 맞물리지 않는다면, 그 비교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그리스도에 관해 무언가를 더 끼워 넣었는데, 그것도 지금의 논쟁 때문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가, 육신의 부활을 믿는 신앙이 속한 바로 그 하나님의 그리스도임을 내가 보여 줄수록, 육신의 부활은 그만큼 더 입증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그가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아래 둘 때까지 그는 반드시 다스려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이미 이것으로도 보복하는 하나님을 선언하며, 따라서 그리스도에게 이것을 약속한 바로 그 하나님을 선언한다.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의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주가 시온에서 권능의 지팡이를 내보낼 것이며, 그는 너와 함께 네 원수들 가운데서 다스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유대인들도 우리에게서 빼앗으려 하는 이 성경 구절들이 내 견해에 속한다는 것을 반드시 변호해야 한다. 실제로 그들은 이 시편이 히스기야에 관해 노래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성전의 오른쪽에 앉았고 하나님이 그의 적들을 물리치고 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때문에 나머지 구절, 곧 “샛별보다 먼저 내가 모태에서 너를 낳았다”도 히스기야에게, 그리고 히스기야의 탄생에 들어맞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복음서들을 내놓는다. 이토록 방대한 저작에서 우리는 그 복음서들의 신빙성에 관해 이미 이들에게 분명 어느 정도 확증해 두었을 것이다. 이 복음서들은 주가 밤에 탄생했다고 밝히는데, 이것이 곧 “샛별보다 먼저”의 뜻이다. 복음서들은 이를 동방 박사들이 알아본 별로, 바로 그때 그리스도가 태어났다고 밤에 목자들에게 전한 천사의 증언으로, 그리고 해산한 장소로 밝힌다. 사람들은 밤을 지내려고 여관에 모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밤에 태어난 것은 아마 신비로운 뜻으로도 일어난 일일 것이다. 그는 무지의 어둠에 진리의 빛이 될 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된 아들이 아니라면 “내가 너를 낳았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온 백성에 관해서도 이렇게 말하기는 하지만, “내가 아들들을 낳았다.” 그러나 “모태에서”라는 말은 덧붙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 말을 덧붙였는가? “모태에서”라는 말을, 마치 사람 가운데 누가 모태에서 태어났는지 의심스럽기라도 한 듯 그토록 쓸데없이 덧붙인 것은, 그가 그리스도에게 해당하는 말로 더 세밀하게 이해되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모태에서 내가 너를 낳았다.” 곧 남자의 씨 없이 오직 모태에서만 낳았다는 것이며, 모태에서 난 <것은> 육신에, 그 자신에게서 난 것은 영에 돌린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이 말이 더해진다. “너는 영원한 제사장이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제사장이 아니었고, 설령 제사장이었다 해도 영원한 제사장은 아니었다. 그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라고 말한다. 히스기야가 멜기세덱과 무슨 상관인가?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은 이의 제사장이었고 그것도 할례받지 않은 자였으며, 할례받은 아브라함에게서 이미 십일조 예물을 받고서 그를 축복했다. 그러나 멜기세덱의 서열은 그리스도에게 들어맞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고유하고 합법적인 제사장으로서, 그때에는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할례받지 않은 제사직의 대제사장으로 세워졌고 그들에게서 더 많이 받아들여질 것이었지만, 마지막에 올 때에는 언젠가 자신을 알아볼 할례자들과 아브라함의 족속을 받아들임과 <축복>을 받을 만한 이들로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다른 시편도 있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을 왕에게 주시고”, 곧 장차 다스릴 그리스도에게,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곧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그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이들이 그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편도 솔로몬을 노래한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해당하는 구절들이, 나머지 구절들도 솔로몬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것을 가르쳐 줄 수 없겠는가? 그는 “그가 양털 위에 내리는 비처럼, 땅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내려올 것이다”라고 말하며, 하늘에서 육신으로 내려오는 그의 고요하고 감지되지 않는 내려옴을 묘사한다. 그러나 솔로몬은 설령 어딘가에서 내려왔다 해도 비처럼 내려오지는 않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단순한 구절들을 하나씩 내놓겠다. 그는 “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주어졌다. 반면 솔로몬은 하나뿐인 작은 유대만을 다스렸다. “모든 왕이 그에게 경배할 것이다.” 모든 왕이 그리스도가 아니면 누구에게 경배하겠는가? “그리고 모든 민족이 그를 섬길 것이다.”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가 아니면 누구를 섬기겠는가? “그의 이름이 영원히 있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니면 누구의 이름이 영원하겠는가? “해보다 먼저 그의 이름이 머물 것이다.” 해보다 먼저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 솔로몬 안에서는 어떤 민족도 복을 받지 않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민족이 복을 받는다. 이제 이 시편이 그를 하나님으로도 보여 준다면 어떠한가? “그리고 그들이 그를 복되다 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는 찬송받기 때문이다. 그는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한다. 그의 영광의 이름이 찬송받고, 온 땅이 그의 영광으로 가득할 것이다.” 반대로 솔로몬은, 감히 말하건대, 여자 때문에 우상 숭배에까지 끌려가 하나님 안에서 지녔던 영광마저 잃었다. 그러므로 이 시편 가운데에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다”라는 말도 놓여 있으니, 이들은 분명 그의 발아래 굴복한 자들이다. 이 말은 내가 이 시편을 끌어들여 내 견해에 맞는다고 변호한 목적에 속할 것이다. 그 목적은 나라의 영광과 원수들의 굴복을 창조주의 경륜에 따라 얻을 이를 창조주에게 속한 이 외에 다른 이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었다.

interim Marcionites nihil ex huiusmodi exhibebit, cui tum etiam pronuntiare, cuius magis Christus nondum sit reuelatus: sicut meus expectandus est, qui a primordio praedicatus est, illius idcirco non est, quia non a primordio. sic melius nos credimus in Christum futurum quam haereticus in ullum. Mortuorum resurrectionem quomodo quidam tunc negarint, prius dispiciendum est. utique eodem modo quo et nunc; siquidem semper resurrectio carnis negatur. ceterum animam et sapientium plures diuinam uindicantes saluam repromittunt, et uulgus ipsum ea praesumptione defunctos colit, qua animas eorum manere confidit; ceterum corpora aut ignibus statim aut feris aut, etiam diligentissime condita, temporibus tamen aboleri manifestum est. si ergo [carnis] resurrectionem negantes apostolus retundit, utique aduersus illos tuetur quod illi negabant, carnis scilicet resurrectionem. habes compendio responsum. cetera iam ex abundanti. nam et ipsum, quod mortuorum resurrectio dicitur, exigit defendi proprietates uocabulorum 'mortuorum' <et 'resurrectionis'.> [ita] mortuum [uocabulum] non est nisi quod amisit animam, de cuius facultate uiuebat; corpus est quod amittit animam et amittendo fit mortuum: ita mortui uocabulum corpori competit. porro si resurrectio mortui est, mortuum autem non aliud est quam corpus, corporis erit resurrectio. sic et resurrectionis uocabulum non aliam rem uindicat quam quae cecidit. surgere enim potest dici et quod omnino non cecidit, quod semper retro iacuit. resurgere autem non est nisi eius, quod cecidit; iterum enim surgendo, quia cecidit, resurgere dicitur. 're' enim syllaba iterationi semper adhibetur. cadere ergo dicimus corpus in terram per mortem, sicut et res ipsa testatur ex dei lege. corpori enim dictum est: terra es et in terram ibis. ita quod de terra est ibit in terram, hoc cadit quod in terram ibit, hoc resurgit quod cadit. Quia per hominem mors, et per hominem resurrectio. hic mihi et Christi corpus ostenditur in nomine hominis, qui constat ex corpore, ut saepe iam docuimus. quodsi sic in Christo uiuificamur omnes, sicut mortificamur in Adam, quando in Adam corpore mortificemur, sic necesse est et in Christo [corpore] uiuificemur. ceterum similitudo non constat, si non in eadem substantia mortificationi in Adam uiuificatio concurrat in Christo. sed interposuit aliquid adhuc de Christo et propter praesentem disceptationem non omittendum. tanto magis enim probabitur carnis resurrectio, quanto Christum eius dei ostendero, apud quem creditur carnis resurrectio. cum dicit: oportet enim regnare eum, donec ponat inimicos eius sub pedes eius, iam quidem et ex hoc ultorem deum edicit atque exinde ipsum, qui hoc Christo repromiserit: sede ad dexteram meam, donec ponam inimicos tuos scabellum pedum tuorum. uirgam uirtutis emittet dominus ex Sion et dominabitur in medio inimicorum tuorum tecum. sed necesse est ad meam sententiam pertinere defendam eas scripturas, quas et Iudaei nobis auocare conantur. dicunt denique hunc psalmum in Ezechiam cecinisse, quia is sederit ad dexteram templi et hostes eius auerterit deus et absumpserit; propterea igitur et cetera: ante luciferum ex utero generaui te in Ezechiam conuenire et in Ezechiae natiuitatem. nos edimus euangelia - de quorum fide aliquid utique iam in tanto opere istos confirmasse debemus - nocturna natiuitate declarantia dominum, ut hoc sit 'ante luciferum', et ex stella magis intellecta et ex testimonio angeli, qui nocte pastoribus adnuntiauit natum esse cum maxime Christum, et ex loco partus; in diuersorium enim ad noctem conuenitur. fortassean et mystice factum sit, ut nocte Christus nasceretur, lux ueritatis futurus ignorantiae tenebris. sed nec generaui te dixisset deus, nisi filio uero. nam etsi de toto populo ait: filios generaui, sed non adicit: ex utero. cur autem adiecit: ex utero - tam uane, quasi aliqui hominum ex utero natus dubitaretur, - nisi quia curiosius uoluit intellegi in Christum: ex utero generaui te, id est ex solo utero, sine uiri semine, carni deputans <quod> ex utero, spiritui quod ex ipso? his accedit: tu es sacerdos in aeuum. nec sacerdos autem Ezechias nec in aeuum, etsi fuisset. secundum ordinem, inquit, Melchisedec. quid Ezechias ad Melchisedec, altissimi sacerdotem et quidem non circumcisum, qui Abraham circumcisum iam accepta decimarum oblatione benedixit? at in Christum conueniet ordo Melchisedec, quoniam quidem Christus, proprius et legitimus dei antistes, praeputiati sacerdotii pontifex tum in nationibus constitutus, a quibus magis suscipi habebat, agnituram se quandoque circumcisionem et Abrahae gentem, cum ultimo uenerit, acceptatione et bene<dictione> dignabitur. est et alius psalmus ita incipiens: deus, iudicium tuum regi da, id est Christo regnaturo, et iustitiam tuam filio regis, id est populo Christi. filii enim eius sunt qui in ipso renascuntur. sed et hic psalmus Solomoni canere dicitur. quae tamen soli competunt Christo docere non poterunt etiam cetera non ad Solomonem, sed ad Christum pertinere? descendet, inquit, tamquam imber super uellus et uelut stillae destillantes in terram, placidum descensum eius et insensibilem describens de caelo in carnem. Solomon autem, etsi descendit alicunde, non tamen sicut imber, quia non de caelo. sed simpliciora quaeque proponam. dominabitur, inquit, a mari ad mare et a flumine usque ad terminos terrae: hoc soli datum est Christo; ceterum Solomon uni et modicae Iudaeae imperauit. adorabunt illum omnes reges: quem omnes, nisi Christum? et seruient ei omnes nationes: cui omnes, nisi Christo? sit nomen eius in aeuum: cuius nomen aeternum, nisi Christi? ante solem manebit nomen eius: ante solem enim sermo dei, id est Christus. et benedicentur in illo uniuersae gentes: in Solomone nulla natio benedicitur, in Christo uero omnis: quid nunc, si et deum eum psalmus iste demonstrat? et beatum eum dicent; quoniam benedictus dominus deus Israhelis, qui facit mirabilia solus. benedictum nomen gloriae eius et replebitur uniuersa terra gloria eius. contra Solomon, audeo dicere, etiam quam habuit in deo gloriam amisit per mulierem in idolatriam usque protractus. itaque cum in medio psalmo illud quoque positum sit: inimici eius puluerem lingent, subiecti utique pedibus ipsius, ad illud pertinebit, propter quod hunc psalmum et intuli et ad meam sententiam defendi, ut confirmauerim et regni gloriam et inimicorum subiectionem secundum dispositionem creatoris consecuturum non alium credendum quam creatoris.

10

이제 부활 문제로 돌아가자. 부활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도 따로 한 권을 들여 모든 이단자에 맞서 충분히 다루었다. 그러나 그 소책자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여기서도 빠뜨리지 않겠다. 그는 말한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은 무엇을 하겠느냐?” 그 관습이야 어떻든 상관없다. 죽은 자들을 위해 비는 일이라면 아마 2월 초하루가 그 관습에 들어맞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도를 곧바로 그 관습의 새 창시자나 그것을 승인한 사람으로 지목하지 말라. 그는 헛되이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받던 이들조차 부활을 믿고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들어, 그만큼 더 육신의 부활을 굳게 세우려 한 것이다. 우리는 그가 다른 곳에서 세례는 하나뿐이라고 규정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을 위해 물에 잠기는 것은 ‘몸들’을 위해 물에 잠기는 것이다. - 우리는 ‘죽은 것’이 몸이라는 것을 보였다 - ** “몸들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 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은 무엇을 하겠느냐?” 우리가 이 발판을 딛는 것은 아주 옳아서, 그 사도도 두 번째 논의를 똑같이 몸에 관하여 끌어들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말할 것이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오느냐?” 부정되던 부활을 변호했으니, 이어서 아직 보이지 않던 몸의 성질을 다루는 것이 순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성질 문제로는 다른 이들과 맞붙는 것이 알맞다. 마르키온은 육신의 부활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오직 영혼에게만 구원을 약속하므로, 성질이 아니라 실체를 문제로 삼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그 사도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이들 때문에 몸의 성질에 관하여 논하는 대목들로도 아주 분명하게 반박당한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오느냐?” 그가 몸의 성질에 관하여 논했다면, 이미 몸이 부활하리라고 선포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밀알이나 그와 같은 어떤 것의 예를 들어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그것들에게 몸을 준다고 하고, 씨앗마다 저마다 고유한 몸이 있다고 말하여 사람의 육신이 다르고 짐승과 새의 육신이 다르며, 하늘에 속한 몸들과 땅에 속한 몸들이 있고,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이 다르다고 한다면, 그는 육신과 몸에 속한 예들로 권하는 그 부활이 육신과 몸의 부활임을 내비치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는 그 예들이 비롯된 바로 그 하나님에게서 그 부활이 오리라고 보증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말한다. “부활도 이와 같다.” 어떻게 같은가? 낟알과 마찬가지로 몸이 뿌려지고 몸이 다시 살아난다. 결국 그는 몸이 흙으로 풀어지는 것을 ‘뿌림’이라고 불렀다. “썩음 가운데 뿌려지고 ** 영광으로, 능력으로”라고 하기 때문이다. 풀어질 때 저 순서를 밟는 것과 부활할 때 이 순서를 밟는 것은 같은 것, 곧 몸이다. [낟알과 마찬가지로.] 그렇지 않고 그대가 풀어짐에 내준 몸을 부활에서 빼앗는다면, 결말의 차이는 어디에 있겠는가? 따라서 <몸이> 영혼<에 속한 것>으로 뿌려지고 영에 속한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그리고 영혼이나 영이 저마다 어떤 고유한 몸을 가지고 있어서 ‘영혼에 속한 몸’은 영혼을, ‘영에 속한 몸’은 영을 뜻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해도, 그는 그렇다고 영혼이 부활 때 영이 되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혼과 함께 태어나고 영혼을 통해 살아가기 때문에 영혼에 속한 것이라고 불릴 수 있는 몸이, 영을 통해 영원 속으로 일어날 때 영에 속한 것이 되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썩음 가운데 뿌려지는 것이 영혼이 아니라 흙으로 풀어지는 육신이라면, 영혼에 속한 몸은 이제 영혼이 아니라 육신일 것이다. 영혼에 속한 몸이었던 이 육신이 영혼에 속한 것에서 영에 속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가 아래에서도 말하는 그대로다. “먼저는 영에 속한 것이 아니요 **.” 이를 위해 그는 그리스도 자신에 관해서도 앞서 이렇게 기초를 놓았다.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영혼이 되었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 더없이 어리석은 그 이단자는 이 구절이 그렇게 되어 있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마지막 아담’ 대신 ‘마지막 주’라고 써 넣었다. 마지막 [주]도 ‘아담’이라고 되어 있으면, 우리가 마지막 아담에게서 그리스도가 첫 아담이 속한 바로 그 이에게 속한다고 변호할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위조는 비쳐 보인다. 마지막 아담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면 어째서 ‘첫’ 아담이겠는가? 서로 같은 종류이고 이름이나 실체나 만든 이가 같은 것들이 아니면, 서로 사이에 순서를 갖지 않는다.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서도 하나는 처음이고 다른 하나는 마지막일 수 있기는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한 만든 이에게서 나온 것들일 때다. 그러나 만든 이마저 다르다면, 그 자신은 <비록> 마지막이라고 불릴 수 있더라도 그가 들여온 것은 첫 것이다. 그것이 마지막 것이 되는 것은 첫 것과 같은 종류일 때다. 그런데 그것은 첫 것과 같은 종류가 아니다. 같은 만든 이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그는 ‘사람’이라는 이름에서도 논박당할 것이다. 그 사도는 말한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나서 흙에 속한 자이고, 둘째는 하늘에서 온 주다.” 첫째도 사람이었는데, 둘째가 사람이 아니라면 어째서 둘째인가? 아니면 첫째도 주란 말인가? 둘째도 주라면 말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가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를 인자로 내세운다면, 그리스도가 사람이며 사람이라는 점에서 아담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어지는 구절들도 그를 옥죈다. 그 사도가 “땅에서 난 자가 어떠하면” - 곧 사람이다 - “흙에 속한 자들도 그러하다” - 물론 사람들이다 - 라고 말할 때, 그렇다면 이렇게도 된다. “하늘에서 난 사람이 어떠하면, 하늘에서 난 사람들도 그러하다.” 그는 흙에 속한 사람들에게 하늘에 속한 사람들 말고 다른 것을 맞세울 수 없었다. 같은 호칭을 함께 쓰는 가운데 처지와 소망을 더 세심하게 구별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처지와 소망에 따라 흙에 속한 자들과 하늘에 속한 자들을 말하지만, 그들은 똑같이 사람이다. 그들은 결말에 따라 아담 안에 있는 자로 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제 하늘의 소망을 권하며 그는 말한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지녔던 것처럼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도 지니자.” 그는 이 말을 부활의 저 실체에 관련시키지 않고 지금 이때의 규율에 관련시킨다. 그는 ‘지니리라’가 아니라 ‘지니자’라고 말한다. 약속이 아니라 명령으로 말한 것이다. 그는 우리가 그 자신이 걸어간 것처럼 걸어가고, 흙에 속한 사람, 곧 옛 사람의 형상에서 떠나기를 바란다. 그 형상은 육신의 행실이다. 결국 그는 무엇을 덧붙이는가?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육신과 피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지 못할 것이다.” 곧 육신과 피의 행실들이다. 그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쓸 때에도 이 행실들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았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실체를 그 실체의 행실 대신 쓰곤 한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말할 때가 그렇다. 우리가 이 육신 안에 있는 동안이 아니라면 언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겠는가? 내 생각에 행할 다른 때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육신의 행실을 피한다면, 그때 우리는 육신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육신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은 육신의 실체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죄과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육신’이라는 이름 아래 벗어 버리라고 명령받는 것이 육신의 실체가 아니라 그 행실이라면, 그러므로 ‘육신’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당하는 것도 육신의 실체가 아니라 육신의 행실이다. 악한 일이 벌어지는 자리가 아니라 벌어지는 그 일이 단죄받기 때문이다. 독을 주는 것은 범죄이지만, 그 독을 담아 준 잔은 죄가 없다. 마찬가지로 몸은 육신의 행실을 담는 그릇이고, 그 안에 어떤 악행의 독을 타는 것은 영혼이다. 그런데 육신의 행실을 일으킨 장본인인 영혼은 몸 안에서 저지른 일들을 속죄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자격을 갖추는데, 시중드는 자일 뿐인 몸은 단죄 속에 머문다면 이것이 무슨 노릇인가? 독살자는 풀려나는데 잔은 벌을 받아야 하는가? 그렇지만 우리는 결코 육신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의 부활을 주장한다. 부활은 나라의 문과 같아서, 그것을 통해 나라에 들어간다. 그러나 부활과 나라는 서로 다르다. 먼저 부활이 있고, 그다음에 나라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이 다시 살아나되, 변화되어 나라를 얻는다고 말한다.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 곧 몸이 흩어져 멸망에 이르러 썩었던 자들이다 - “우리는 나눌 수 없는 한순간에, 눈이 깜박이는 사이에 변화될 것이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 썩을 것이” - 그 사도는 분명 자기 육신을 붙잡고 이 말을 했다 - “썩지 않음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음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 곧 그 실체가 하나님의 나라에 알맞게 되기 위해서다. 우리는 천사들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이것이 육신의 변화일 것이다. 그러나 다시 일으켜진 육신의 변화다. 아니면 변화가 전혀 없다면, 그것이 어떻게 썩지 않음과 죽지 않음을 입겠는가? 그러므로 변화를 통해 다른 것이 된 그것이 그때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것이다. 그것은 이제 육신과 피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에게 줄 몸이다. 그래서 그 사도는 “육신과 피는 하나님의 나라를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옳게 말한다. 그는 그것을 부활에 덧붙여지는 변화에 돌린다. 그런데 창조주의 글에 기록된 그 말씀이 그때 이루어진다면, “죽음아, 어디 있느냐, [승리는? 어디 있느냐,] 너의 다툼은? 죽음아, 어디 있느냐, 너의 쏘는 것은?” - 그런데 이 말씀은 예언자 <호세아>를 통해 나온 창조주의 말씀이다 - 그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말씀의 주인이 그 일, 곧 그 나라의 주인이기도 할 것이다. 그 사도는 우리에게 승리, 곧 죽음에 대한 승리를 거두게 해 준 일에 대해 다른 신에게 감사하지 않는다. 죽음을 조롱하고 개가를 올리는 그 말씀을 <그에게서> 받은 바로 그 하나님에게 감사한다.

Reuertamur nunc ad resurrectionem, cui et alias quidem proprio uolumine satisfecimus omnibus haereticis resistentes; sed nec hic desumus, propter eos, qui illud opusculum ignorant. quid, ait, facient qui pro mortuis baptizantur, si mortui non resurgunt? uiderit institutio ista: kalendae, si forte, Februariae respondebunt illi pro mortuis petere. noli ergo apostolum nouum statim auctorem aut confirmatorem eius denotare, ut tanto magis sisteret carnis resurrectionem, quanto illi, qui uane pro mortuis baptizarentur, fide resurrectionis hoc facerent. habemus illum alicubi unius baptismi definitorem. igitur et pro 'mortuis' tingi pro 'corporibus' est tingi, - 'mortuum' enim corpus ostendimus - *** quid facient qui pro corporibus baptizantur, si corpora non resurgunt? atque adeo recte hunc gradum figimus, ut et secundam apostolus disceptationem aeque de corpore induxerit: sed dicent quidam: quomodo mortui resurgent? quo autem corpore uenient? defensa etenim resurrectione, quae negabatur, consequens erat de qualitate corporis retractare, quae non uidebatur. sed de ista cum aliis congredi conuenit. Marcion enim in totum carnis resurrectionem non admittens et soli animae salutem repromittens, non qualitatis, sed substantiae facit quaestionem. porro et ex his manifestissime obducitur, quae apostolus ad qualitatem corporis tractat propter illos, qui dicunt: quomodo resurgent mortui? quo autem corpore uenient? iam enim praedicauit resurrecturum esse corpus, si de corporis qualitate tractauit. denique si proponit exempla grani tritici uel alicuius eiusmodi, quibus det corpus deus prout uolet, si unicuique seminum proprium ait corpus esse, ut aliam quidem carnem hominum, aliam uero pecudum et uolucrum, et corpora caelestia atque terrena, et aliam gloriam solis et lunae aliam et stellarum aliam, - nonne carnalem et corporalem portendit resurrectionem, quam per carnalia et corporalia exempla commendat? nonne etiam ab eo deo eam spondet, a quo sunt et exempla? sic et resurrectio, inquit. quomodo? sicut et granum corpus seritur corpus resurgit. seminationem denique uocauit dissolutionem corporis in terram, quia seritur in corruptela *** in honestatem, in uirtutem. cuius ille ordo in dissolutione, eius et hic in resurrectione, corporis scilicet. [sicut et granum.] ceterum si auferas corpus resurrectioni quod dedisti dissolutioni, ubi consistet diuersitas exitus? proinde et si seritur <corpus> anima<le,> resurgit spiritale, etsi habet aliquod proprium corpus anima uel spiritus, ut possit uideri corpus animale animam significare et corpus spiritale spiritum, non ideo animam dicit in resurrectione spiritum futuram, sed corpus, quod cum anima nascendo et per animam uiuendo animale dici capit, futurum spiritale, dum per spiritum surgit in aeternitatem. denique si non anima, sed caro seminatur in corruptela, dum soluitur in terram, iam non anima erit corpus animale, sed caro, quae fuit corpus animale, si quidem de animali efficitur spiritale, sicut et infra dicit: non primum quod spiritale ***. ad hoc enim et de ipso Christo praestruit: factus primus homo Adam in animam uiuam, nouissimus Adam in spiritum uiuificantem, licet stultissimus haereticus noluerit ita esse; 'dominum' enim posuit nouissimum pro nouissimo 'Adam', ueritus scilicet ne, si et [dominum] nouissimum haberet 'Adam', et eiusdem Christum defenderemus in Adam nouissimo, cuius et primum. sed falsum relucet. cur enim primus Adam, nisi quia et nouissimus Adam? non habent ordinem inter se nisi paria quaeque et eiusdem uel nominis uel substantiae uel auctoris. nam etsi potest in diuersis quoque esse aliud primum aliud nouissimum, sed unius auctoris. ceterum si et auctor alius, et<si> ipse quidem potest nouissimus dici, quod tamen intulerit primum est, nouissimum autem, si primo par sit. par autem primo non est, quia non eiusdem auctoris est. eodem modo et in nomine hominis reuincetur. primus, inquit, homo de humo terrenus, secundus dominus de caelo. quare secundus, si non homo, quod et primus? aut numquid et primus dominus. si et secundus? sed sufficit: si in euangelio filium hominis adhibet Christum, et hominem et in homine Adam eum negare non poterit. sequentia quoque eum comprimunt. cum enim dicit apostolus: qualis qui de terra, homo scilicet, tales et terreni, homines utique, ergo et: qualis qui de caelo homo, tales et qui de caelo homines. non enim poterat hominibus terrenis non homines caelestes opposuisse, ut statum ac spem studiosius distingueret in appellationis societate. statu enim ac spe dicit terrenos atque caelestes, homines tamen ex pari, qui secundum exitum aut in Adam aut in Christo deputantur. et ideo iam ad exhortationem spei caelestis: sicut portauimus, inquit, imaginem terreni, portemus et imaginem caelestis, non ad substantiam illam referens resurrectionis, sed ad praesentis temporis disciplinam. 'portemus' enim, inquit, non 'portabimus', praeceptiue, non promissiue, uolens nos sicut ipse incessit ita incedere, et a terreni, id est ueteris, hominis imagine abscedere, quae est carnalis operatio. denique quid subiungit? hoc enim dico, fratres, quia caro et sanguis regnum dei non possidebunt, opera scilicet carnis et sanguinis, quibus et ad Galatas scribens abstulit dei regnum, solitus et alias substantiam pro operibus substantiae ponere, ut cum dicit eos, qui in carne sunt, deo placere non posse. quando enim placere poterimus deo, nisi dum in carne hac sumus? aliud tempus operationis nullum, opinor, est. sed si, in carne quamquam constituti, carnis opera fugiamus, tum non erimus in carne, dum non in substantia carnis non sumus, sed in culpa. quodsi in nomine carnis opera, non substantiam carnis iubemur exponere, operibus ergo carnis, non substantiae carnis in nomine carnis denegatur dei regnum. non enim id damnatur, in quo male fit, sed id, quod fit. uenenum dare scelus est, calix tamen, in quo datur, reus non est. ita et corpus carnalium operum uas est, anima est autem, quae in illo uenenum alicuius mali facti temperat. quale est autem ut, si anima, auctrix operum carnis, merebitur dei regnum per expiationem eorum, quae in corpore admisit, corpus, ministrum solummodo, in damnatione permaneat? uenefico absoluto calix erit puniendus? et tamen non utique carni defendimus dei regnum, sed resurrectionem substantiae suae, quasi ianuam regni, per quam aditur. ceterum aliud resurrectio aliud regnum. primo enim resurrectio, dehinc regnum. resurgere itaque dicimus carnem, sed mutatam consequi regnum. resurgent enim mortui incorrupti - illi scilicet, qui fuerant corrupti dilapsis corporibus in interitum - et nos mutabimur in atomo, in oculi momentaneo motu; oportet enim corruptiuum hoc - tenens utique carnem suam dicebat apostolus - induere incorruptelam et mortale hoc inmortalitatem - ut scilicet habilis substantia efficiatur regno dei; erimus enim sicut angeli -: haec erit demutatio carnis, sed resuscitatae. aut si nulla erit, quomodo induet incorruptelam et inmortalitatem? aliud igitur facta per demutationem tunc consequetur dei regnum, iam non caro nec sanguis, sed quod illi corpus deus dederit. et ideo recte apostolus: caro et sanguis regnum dei non consequentur, demutationi illud adscribens, quae accedit resurrectioni. si autem tunc fiet uerbum, quod scriptum est apud creatorem: ubi est, mors, [uictoria, ubi] contentio tua? ubi est, mors, aculeus tuus? - uerbum autem hoc creatoris est per prophetam <Osee> -, eius erit et res, id est regnum, cuius et uerbum fit in regno. nec alii deo gratias dicit, quod nobis uictoriam, utique de morte, referre praestiterit, quam illi, <a> quo uerbum insultatorium de morte et triumphatorium accep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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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오류라는 잘못 때문에 ‘신’이 공통 명칭이 되어 세상에서 여러 신이 일컬어지고 믿어진다 하더라도, “찬송받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창조주 말고 다른 이로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창조주는 만물을 축복하기도 했고 - 그대에게는 창세기가 있다 - 만물에게서 찬송받기도 한다 - 그대에게는 다니엘서가 있다 -.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낳지 못한 신이 ‘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다 하더라도, [다른 누구의 이름보다 창조주의 이름으로] “자비의 아버지”는 바로 그 창조주일 것이다.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자비가 풍성하다고 일컬어졌다. 그대는 요나서에서 그 칭호 자체와 함께 자비의 실례를 본다. 그는 간청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그 자비를 베풀었다. 그는 또 히스기야의 눈물에 쉽게 마음을 돌렸고, 이세벨의 남편 아합이 간구하자 나봇의 피를 쉽게 용서했으며, 죄를 인정하는 다윗을 즉시 용서했다. 그는 분명히 죄인의 죽음보다 뉘우침을 원했고, 이는 확실히 자비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마르키온의 신이 이와 같은 일을 행했거나 공포한 적이 있다면, 나는 그를 “자비의 아버지”로 인정하겠다. 그러나 마르키온이 그 신이 계시된 때부터 이 칭호를 그에게 붙인다면, 마치 그 신이 인류를 해방하기로 작정한 그때부터 “자비의 아버지”라도 된 듯이 붙인다면, 우리는 그가 계시되었다고 하는 바로 그때부터도 그를 부인한다. 그가 존재한다는 것이 먼저 확정되었다면, 그때는 그 칭호를 그에게 붙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붙여지는 것은 부수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수적 속성보다, 그 속성이 딸린 사물 자체를 보여 주는 일이 앞선다. 그러므로 마르키온은 무엇을 붙이는 바로 그때에야 보여 주는 이에게 무엇을 붙일 수 없다. 더구나 먼저 드러나지 않은 이에게 붙이는 것이 이미 다른 이의 것일 때는 더욱 그렇다. <사실> 그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이미 드러난 이의 것일수록 그만큼 더 그의 존재는 부인될 것이다. 이와 같이 “새 언약”도 그것을 약속한 이 말고 다른 이의 것이 아닐 것이다. 또 그 언약이 문자의 것이 아니라 그 문자의 영의 것이라면 - 이것이 새로움일 것이다 - 바로 돌판에 문자를 새긴 <그이가> 영에 관해서도 이렇게 공포했다.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신에 부어 줄 것이다.” 또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면, 그 둘은 다 이렇게 말하는 이의 것이다. “내가 죽이고 내가 살릴 것이며, 내가 치고 낫게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창조주의 두 가지 힘을 입증했다. 곧 심판자의 힘과 선한 이의 힘, 율법을 통해 문자로 죽이는 힘과 복음을 통해 영으로 살리는 힘이다. 서로 다르더라도 이미 한 이에게 속한 것으로 헤아려진 것들은 두 신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 사도는 모세의 수건도 언급한다. 모세는 그 수건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바라볼 수 없는 자기 얼굴을 가렸다. 그 사도가 이를 언급한 것이, 영광 가운데 머무는 새 언약의 광채가 없어지게 되어 있던 옛 언약의 광채보다 더 크다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것은 복음을 율법보다 앞세우는 내 믿음에도 들어맞는다. 오히려 내 믿음에 더 들어맞지 않는지 보라. 무엇이 위에 놓이는 곳은, 그것이 그 위에 놓이는 대상도 함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그러나 세상의 생각이 둔해졌다”라고 말할 때 - 분명히 창조주의 생각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백성의 생각을 말한다. 그는 이스라엘에 관해 “오늘까지 바로 그 수건이 그들의 마음에 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 그는 그때 모세에게 있던 얼굴의 수건이 백성에게 있는 마음의 수건의 예표였음을 보여 준다. 지금도 그들 가운데서는 모세가 마음으로 꿰뚫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얼굴로도 꿰뚫어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그러므로 모세가 선포한 창조주의 그리스도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모세에게서 “아직” 가려져 있으면서 바울과 상관이 있는 것은 무엇인가? - 이제 더 드러내어 말하자면 - 모세의 선포들, 곧 그들이 모세를 그 안에서 깨달았어야 할 그리스도에 관한 선포들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유대인들의 마음도 아직 가려져 있다고 지적되는가? 유대인들이 자기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지 못했다 한들 그것이 다른 그리스도의 사도와 무슨 상관인가? 그들 마음의 수건이, 그들이 모세의 그리스도를 꿰뚫어 보지 못한 그 눈멂과 관련되었기 때문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말, 곧 “그러나 그가 하나님에게로 돌아서면 그 수건이 벗겨질 것이다”라는 말은 본래 유대인에게 하는 말이다. 모세의 수건도 유대인에게 해당하며, 그 유대인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넘어오면 모세가 그리스도에 관해 선포했음을 깨달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신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창조주의 수건이 벗겨지겠는가? 창조주는 그 신의 신비, 곧 알려지지 않은 이의 알려지지 않은 일들을 가릴 수 없었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이제 드러낸 얼굴로 - 분명히 유대인들에게서는 가려져 있는 마음의 얼굴로 -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같은 형상으로, 곧 모세도 주의 영광으로 변화되었던 그 형상으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된다고 말한다. 이처럼 그는 주를 만난 데서 비롯된 모세의 몸의 빛남과 백성의 연약함 때문에 쓴 몸의 수건을 제시하고, 그 위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적 계시와 영적 광채를 겹쳐 놓으면서 - 그는 “영들의 주에게서 말미암은 것처럼”이라고 말한다 - 모세의 질서 전체가 유대인들 가운데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우리 가운데서는 알아본 그리스도의 예표였다고 증언한다. 우리는 어떤 문장들이, 발음의 소리나 끊어 읽는 방식에 이중성이 끼어들 때, 그 때문에 모호해질 수 있음을 안다. 마르키온은 이것을 붙잡아 “그들 가운데 이 세상의 신이”라고 읽었다. 창조주를 이 세상의 신으로 보여 줌으로써 다른 세상의 다른 신을 넌지시 내세우려는 것이다. 우리는 반대로 이렇게 끊어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그다음에 “이 세상의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눈멀게 했다.” “그들 가운데”란 믿지 않는 유대인들 가운데라는 뜻이다. 그들 가운데 몇몇에게는 복음이 아직 모세의 수건 아래 가려져 있다. 하나님은 입술로는 자기를 사랑하나 마음으로는 자기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그들에게 이렇게 위협했었다. “너희가 귀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눈으로 보아도 보지 못할 것이다.” 또 “너희가 믿지 않으면 깨닫지도 못할 것이다.” 또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없애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헛되게 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히 알려지지 않은 신의 복음을 감추는 일에 관해 이렇게 위협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 세상의 신이라 하더라도, 그가 눈멀게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이다. 그들이 성경에서 깨달아야 할 그의 그리스도를 스스로 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끊어 읽기의 모호함에 놓인 문제를 적대자에게 이롭지 않도록 여기까지 다룬 것으로 만족하며, 승리에 더 이상 ** 않도록, 이 논쟁 전체를 아예 지나쳐 버릴 수도 있었다. 더 단순한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신을 마귀로 해석해도 된다는 답이 손 가까이 있을 것이다. 예언자가 전하는 대로 마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질 것이다. 내가 구름 속에 내 보좌를 둘 것이다.” 이 세상의 미신 전체도 그렇게 그에게 예속되었으며, 그는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무엇보다 배교자 마르키온의 마음을 눈멀게 한다. 결국 마르키온은 자기 앞에 맞닥뜨린 문장의 끝부분을 보지 못했다. “어둠에서 빛이 비치라고 말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서 자기 <영광>을 아는 지식을 비추려고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었기 때문이다.” 누가 “빛이 있으라”라고 말했는가? 또 세상을 비추는 일<에 관해> 누가 그리스도에게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았다”라고, 곧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방의 빛으로 삼았다고 말하는가? 시편에서 영들이 장래를 내다보고 그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주여, 주의 얼굴의 빛이 [그는 말한다] 우리 위에 새겨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은 주 그리스도다. 그래서 그 사도도 앞에서 “그는 형상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빛이 있으라”라고 말하는 창조주의 얼굴이라면, 그리고 그리스도 [와] 사도들과 복음과 수건과 모세와 그 흐름 전체가, 끝 문장의 증언에 따라, 이 세상의 신인 창조주의 것이라면, 그것들은 분명히 한 번도 이렇게 말한 적이 없는 이의 것이 아니다. “빛이 있으라.” (여기서 나는 다른 편지에 관한 것도 지나간다. 우리는 그 편지를 『에베소인들에게』라는 제목으로 가지고 있으나, 이단자들은 『라오디게아인들에게』라는 제목으로 가지고 있다. 그 사도는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 없이 이스라엘에게서 떨어져 나와 시민권도 언약들도 약속의 소망도 없이 지내던 그때에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이 지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 세상이 분명히 창조주에게서 온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그가 이방인들이 하나님 없이 지냈다고 말했고, 그들에게 신은 창조주가 아니라 마귀라면, 이 세상의 신은 이방인들이 신으로 받아들인 그 자로 이해해야 하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 창조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보배가 우리 질그릇, <곧 몸> 안에 있는데, 그 보배가 그 그릇들의 주인과 같은 이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제 그토록 큰 보배가 질그릇 안에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질그릇이 창조주의 것이라면, 영광도 창조주의 것이다. 그의 그릇들은 하나님의 능력의 탁월함을 풍긴다. 능력 자체도 그의 것이다. 그 능력은 바로 그 탁월함이 입증되게 하려고 질그릇에 맡겨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더 이상 다른 신의 영광이 아닐 것이고, 따라서 능력도 아닐 것이다 - 오히려 수치와 약함일 것이다 -. 질그릇이, 그것도 남의 질그릇이 그 신의 탁월함을 담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그 사도가 말하듯 우리가 그 안에서 그토록 많은 고난을 겪고 주의 죽음도 짊어지고 다니는 질그릇이라면, 하나님이 이 실체도 다시 일으키지 않으려 한다면 그는 몹시 배은망덕하고 불의하다. 이 실체 안에서 그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토록 많은 것을 견디고, 이 실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며, 이 실체 안에서 능력의 탁월함이 거룩하게 바쳐진다. 그러나 실로 그는 이렇게 제시한다. “그리스도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다.” 곧 그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그는 그리스도의 어떤 생명을 말하는가? 우리가 지금 그 안에서 사는 생명인가?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이어지는 말에서 보이는 것과 잠깐인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과 영원한 것, 곧 현재의 것이 아니라 장래의 것을 바라보라고 권하는가?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의 장래 생명을 말하면서 그것이 몸에 나타날 것이라고 한다면, 그는 분명히 육신의 부활을 선포한 것이다. 그는 우리의 겉사람이 낡아진다고 말하지만, 죽은 뒤의 영원한 멸망으로 낡아지는 것처럼 말하지 않고, 앞서 말한 수고와 괴로움으로 낡아진다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그리고 우리는 낙심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는 우리의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진다고도 말하면서 여기서 두 가지를 다 보여 준다. 곧 시련에 시달려 몸이 낡아지는 것과 약속을 바라보며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Si 'deus' commune uocabulum factum est uitio erroris humani, quatenus plures dei dicuntur atque creduntur in saeculo, benedictus tamen deus domini nostri Iesu Christi non alius quam creator intellegetur, qui et uniuersa benedixit - habes Genesim - et ab uniuersis benedicitur - habes Danihelem -; proinde si 'pater' potest dici sterilis deus, [nullius magis nomine quam creatoris] misericordiarum tamen pater idem erit, qui misericors et miserator et misericordiae plurimus dictus est. habes apud Ionam cum ipso misericordiae exemplum, quam Niniuitis exorantibus praestitit, facilis et Ezechiae fletibus flecti, et Achab, marito Iezabel, deprecanti sanguinem ignoscere Nabuthae, et Dauid agnoscenti delictum statim indulgens, malens scilicet paenitentiam peccatoris quam mortem, utique ex misericordiae adfectu. si quid tale Marcionis deus edidit uel edixit, agnoscam 'patrem misericordiarum'. si uero ex eo tempore hunc titulum ei adscribit, quo reuelatus, quasi exinde sit 'pater misericordiarum', quo liberare instituit genus humanum, atquin nos et ex eo tempore negamus illum, ex quo dicitur reuelatus. si enim prius constaret eum esse, tunc et adscribi ei posset. accidens enim est quod adscribitur, accidentia autem antecedit ipsius rei ostensio, cui accidunt. non potest igitur aliquid ei adscribere, quem tunc ostendit, cum aliquid ei adscribit; maxime cum iam alterius est quod adscribitur ei, qui prius non sit ostensus. tanto <enim> magis negabitur esse, quanto per quod adfirmatur esse, eius est, qui iam ostensus est. Sic et 'testamentum nouum' non alterius erit quam qui illud repromisit, et si non litterae at eius spiritus - hoc erit nouitas -, <is> denique, qui litteram tabulis lapideis inciderat, idem et de spiritu edixerat: effundam de meo spiritu in omnem carnem; et si littera occidit, spiritus uero uiuificat, eius utrumque est, qui ait: ego occidam et ego uiuificabo, percutiam et sanabo. olim duplicem uim creatoris uindicauimus. et iudicis et boni, littera occidentis per legem et spiritu uiuificantis per euangelium. non possunt duos deos facere quae, etsi diuersa, apud unum recenseri praeuenerunt. Commemorat et de uelamine Moysei, quo faciem tegebat incontemplabilem filiis Israhel. si ideo, ut claritatem maiorem defenderet noui testamenti, quod manet in gloria, quam ueteris, quod euacuari habebat, hoc et meae conuenit fidei praeponenti euangelium legi. et uide, ne magis meae: illic enim erit superponi quid, ubi fuerit et illud, cui superponitur. at cum dicit: sed obtunsi sunt sensus mundi, - non utique creatoris, sed populi, qui in mundo est; de Israhele enim dicit: ad hodiernum usque uelamen id ipsum in corde eorum - figuram tum ostendit fuisse uelamen faciei in Moyse uelaminis cordis in populo, quia nec nunc apud illos perspiciatur Moyses corde, sicut nec facie tunc. quid est ergo 'adhuc' uelatum in Moyse, quod pertineat ad Paulum, si Christus creatoris a Moyse praedicatus nondum uenit? quomodo, iam apertius, et uelata adhuc denotantur corda Iudaeorum, nondum exhibitis praedicationibus Moysi, id est de Christo, in quo eum intellegere deberent? quid ad apostolum Christi alterius, si dei sui sacramenta Iudaei non intellegebant, nisi quia uelamen cordis illorum ad caecitatem, qua non perspexerant Christum Moysei, pertinebat? denique quod sequitur: cum uero conuerterit ad deum, auferetur uelamen, hoc Iudaeo proprie dicit, ad quem et est uelamen Moysei, qui, cum transierit in fidem Christi, intelleget Moysen de Christo praedicasse. ceterum quomodo auferetur uelamentum creatoris in Christo dei alterius, cuius sacramenta uelasse non potuit creator, ignoti uidelicet ignota? dicit ergo nos iam aperta facie - utique cordis, quod uelatum est in Iudaeis - contemplantes Christum eadem imagine transfigurari a gloria, qua scilicet et Moyses transfigurabatur a gloria domini, in gloriam. ita corporalem Moysei inluminationem de congressu domini et corporale uelamen de infirmitate populi proponens et spiritalem reuelationem et spiritalem claritatem in Christo superducens, - tamquam a domino, inquit, spirituum - totum ordinem Moysei figuram ignorati apud Iudaeos, agniti uero apud nos Christi fuisse testatur. Scimus quosdam sensus ambiguitatem pati posse de sono pronuntiationis aut de modo distinctionis, cum duplicitas earum intercedit. hanc Marcion captauit sic legendo: in quibus deus aeui huius, ut creatorem ostendens deum huius aeui, alium suggerat deum alterius aeui. nos contra sic distinguendum dicimus: in quibus deus, dehinc: aeui huius excaecauit mentes infidelium. in quibus: Iudaeis infidelibus, in quibus opertum est aliquibus euangelium adhuc sub uelamine Moysei. illis enim deus, labiis diligentibus eum, corde autem longe absistentibus ab eo, minatus fuerat: aure audietis et non audietis, oculis uidebitis et non uidebitis, et: nisi credideritis nec intellegetis, et: auferam sapientiam sapientium et prudentiam prudentium inritam faciam. haec autem non utique de euangelio dei ignoti abscondendo minabatur. ita etsi huius aeui deus, sed infidelium huius aeui excaecat cor, quod Christum eius non ultro recognouerint de scripturis intellegendum. et positum in ambiguitate distinctionis hactenus tractasse, ne aduersario prodesset, contentus, uictoriae ne ultro **, possum et in totum contentionem hanc praeterisse. simpliciori responsu prae manu erit esse huius aeui deum diabolum interpretari, qui dixerit propheta referente: ero similis altissimi, ponam in nubibus thronum meum, sicut et tota huius aeui superstitio illi mancipata est, qui excaecet infidelium corda et inprimis apostatae Marcionis. denique non uidit occurrentem sibi clausulam sensus: quoniam deus, qui dixit ex tenebris lucem lucescere, reluxit in cordibus nostris ad inluminationem agnitionis <gloriae> suae in persona Christi. quis dixit: fiat lux? et <de> inluminatione mundi quis Christo ait: posui te in lumen nationum, sedentium scilicet in tenebris et in umbra mortis? cui respondent spiritus in psalmo ex prouidentia futuri: significatum est [inquit] super nos lumen personae tuae, domine. persona autem dei Christus dominus, unde et apostolus supra, qui est imago. inquit, dei. igitur si Christus persona creatoris dicentis: fiat lux, et Christus [et] apostoli et euangelium et uelamen et Moyses et tota series secundum testimonium clausulae creatoris est, dei huius aeui, certe non eius, qui numquam dixit: fiat lux. (praetereo hic et de alia epistola, quam nos ad Ephesios praescriptam habemus, haeretici uero ad Laodicenos. ait enim meminisse nationes, quod illo in tempore, cum essent sine Christo, alieni ab Israhele, sine conuersatione et testamentis et spe promissionis, etiam sine deo essent in mundo, utique etsi de creatore. ergo si nationes sine deo dixit esse, deus autem illis diabolus est, non creator, apparet deum aeui huius eum intellegendum, quem nationes pro deo receperunt, non creatorem, quem ignorant.) quale est autem, ut non eiusdem habeatur thesaurus in fictilibus uasis, <id est in corporibus> nostris, cuius et uasa sunt? iam si 'gloria' dei est, in fictilibus uasis tantum thesauri haberi, uasa autem fictilia creatoris sunt, ergo et gloria creatoris est, cuius uasa eminentiam uirtutis dei sapiunt, et uirtus ipsa, quia propterea in uasa fictilia commissa sit, ut eminentia eius probaretur. ceterum alterius dei iam non erit gloria ideoque nec uirtus, - sed magis dedecus et infirmitas - cuius eminentiam fictilia et quidem aliena ceperunt. Quodsi haec sunt fictilia uasa, in quibus tanta nos pati dicit, in quibus etiam mortificationem circumferimus domini, satis ingratus deus et iniustus, si non et hanc substantiam resuscitaturus est, in qua pro fide eius tanta tolerantur, in qua et mors Christi circumfertur, in qua et eminentia uirtutis consecratur. sed enim proponit: ut et uita Christi manifestetur in corpore nostro, scilicet sicut et mors eius circumfertur in corpore. de qua ergo Christi uita dicit? qua nunc uiuimus in illo? et quomodo in sequentibus non ad uisibilia nec ad temporalia, sed ad inuisibilia et ad aeterna, id est non ad praesentia, sed ad futura exhortatur? quodsi de futura uita dicit Christi, in corpore eam dicens apparituram, manifeste carnis resurrectionem praedicauit, exteriorem quidem hominem nostrum corrumpi dicens, sed non quasi aeterno interitu post mortem, uerum laboribus et incommodis, de quibus praemisit, adiciens: et non deficiemus. nam et interiorem hominem nostrum renouari de die in diem dicens hic utrumque demonstrat: et corporis corruptionem ex uexatione temptationum et animi renouationem ex contemplatione promissionum.

12

** 땅에 있는 우리 거처의, 그가 우리에게 하늘에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손으로 지은 것은 창조주의 것이어서 죽은 뒤 해체되어 완전히 소멸하기 때문이라는 뜻이 아니다. 실제로 그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해체 자체에서 오는 슬픔을 위로하려고 이 말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뒤따르는 말에서도 분명하다. 그는 우리가 땅에 속한 몸이라는 이 장막에서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것을 덧입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덧붙인다. “벗김을 당하더라도 우리가 벌거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을 것이므로” - 곧 우리가 벗김을 당한 것, 곧 몸을 다시 받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한다. “참으로 이 몸의 장막 안에 있는 우리는 탄식한다. 벗기를 원하지 않고 덧입기를 원하면서 짓눌려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첫째 편지에서 간략하게 말한 것을 여기서 자세히 표현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 이미 죽은 이들이다 - “우리는 변화될 것이다” - 여기서 육신 안에 있다가 하나님에게 붙들릴 이들이다. 곧 저들은 몸을, 그것도 온전한 몸을 다시 받아 그로써 썩지 않는 자가 되므로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고, 이들은 이미 시간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이유와 적그리스도에게 당하는 고난의 공로 때문에 죽음을 줄여 건너뛰는 길을 얻되 변화된 채로 얻을 것이다. 이들은 몸을 벗었다기보다 하늘로부터 오는 것을 덧입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몸 위에 저 하늘의 것을 입는다면, 죽은 자들도 분명 몸을 다시 받을 것이고, 그들 역시 그 몸 위에 하늘로부터 오는 썩지 않음을 입을 것이다. 그는 그들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않음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음을 입어야 한다.” 저들은 몸을 다시 받았을 때 입고, 이들은 몸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덧입는다. 그러므로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까닭 없는 일이 <아니다>. “몸을 벗기를 원하지 않고 덧입기를 원한다.” 곧 죽음을 겪기를 원하지 않고 생명에게 앞질러지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이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고, 변화를 덧입음으로써 죽음에서 건져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이 더 낫다는 것을 보여 주었기에, 혹시 죽음이 먼저 닥치더라도 우리가 슬퍼하지 않도록,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영의 보증을 받아 덧입음이라는 같은 소망에 담보로 잡혀 있는 셈이라고 말하고, 우리가 육신 안에 있는 동안에는 주에게서 떠나 있으며 그러므로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을 좋게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야 하며, 그리하여 각 사람이 몸으로 행한 것을 선이든 악이든 돌려받는다고 말한다. 사실 공로에 대한 보상이 그때 있다면, 어떻게 어떤 이들이 벌써 주와 함께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겠는가? 또 그는 심판대와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의 결산을 언급함으로써 두 가지 판결을 다 내리는 재판관을 보여 주었고, 모든 사람이 몸을 지니고 출두한다는 것을 확증했다. 몸으로 행한 것이 몸으로 심판받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을 통해 행했는데 바로 그것을 통해 벌을 받거나 상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불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엇이든 새로운 피조물이 있다면 옛것은 지나갔다.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또 그가 우리에게 육신과 피의 더러움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명한다면, 실체가 아니라 **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것. 또 그가 교회를 거룩한 처녀로, 분명 신부를 신랑에게 드리듯 그리스도에게 드리려고 한다면, 이 형상은 그 일 자체의 실재에 적대하는 자와 결합될 수 없다. 또 그가 거짓 사도들을 속이는 일꾼들, 곧 위선으로 자기를 가장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그들을 선포가 아니라 행실을 변질시킨 죄인으로 고발하는 것이다. 그만큼 그들과의 다툼은 신성이 아니라 생활 규율에 관한 것이었다.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면, 이 말은 창조주를 겨냥한 것일 수 없다. 창조주는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이므로, 천사가 아니라 광명의 신으로 자기를 가장한다고 말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도가 우리도 마르키온도 천사로 알고 있는 그 사탄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낙원에 관해서는 그 주제가 받는 모든 질문을 다룬 별도의 저술 『낙원에 관하여』가 있다. 여기서 나는 아마 이 점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땅에 속한 어떤 경륜도 갖지 않은 신이 자기 고유의 낙원을 가질 수 있었는지 말이다. 그가 세상과 마찬가지로 창조주의 낙원도 빌려 쓴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지만 사람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일은 엘리야에게서 창조주가 보인 본보기다. 그러나 나는 이 점을 더욱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치고 사납게 구는 일과 무관한 지극히 선한 신이 자기 사도를 주먹으로 치게 하려고 사탄의 사자를, 그것도 자기 것도 아닌 창조주의 사자를 붙여 두었고, 사도가 세 번 간청했는데도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키온의 신도 창조주를 따라 바로잡는다. 곧 높아진 자들에게 질투하고 권세 있는 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창조주를 따라서 말이다. 아니면 욥의 몸에 대해서도 사탄에게 권능을 주어 능력이 약함 속에서 입증되게 한 이가 바로 그란 말인가? 갈라디아 사람들을 꾸짖은 이가 왜 아직도 율법의 형식을 지켜, 모든 말이 세 증인으로 확정되리라고 미리 정하는가? 지극히 온유한 신을 선포하는 이가 왜 죄인들을 아끼지 않겠다고 위협하며, 더 나아가 함께 있을 때 더 엄하게 처리할 권능 자체가 주에게서 자기에게 주어졌다고 단언하는가? 이단자여, 이제 그대의 신이 두려움을 산다는 것을 부인해 보라. 그의 사도도 두려움을 샀는데 말이다.

*** terreni domicilii nostri non sic ait habere nos domum aeternam, non manu factam in caelo, quia quae manu facta sit, creatoris, intereat in totum, dissoluta post mortem. haec enim ad mortis metum et ad ipsius dissolutionis contristationem consolandam retractans etiam per sequentia manifestus, cum subicit ingemere nos de isto tabernaculo corporis terreni, quod de caelo est superinduere cupientes: siquidem et despoliati non inueniemur nudi - id est: recipiemus quod despoliati sumus, id est corpus, et rursus: etenim qui sumus in isto tabernaculo corporis ingemimus, quod grauemur nolentes exui, sed superindui. hic enim expressit quod in prima epistola strinxit: et mortui resurgent incorrupti, qui iam obierunt, et nos mutabimur, qui in carne fuerint reprehensi a deo hic. et illi enim resurgent incorrupti, recepto scilicet corpore et quidem integro, ut ex hoc sint incorrupti, et hi propter temporis ultimum iam momentum et propter merita uexationum antichristi compendium mortis, sed mutati, consequentur, superinduti magis quod de caelo est quam exuti corpus. ita si hi super corpus induent caeleste illud, utique et mortui recipient corpus, super quod et ipsi induant incorruptelam de caelo, quia et de illis ait: necesse est corruptiuum istud induere incorruptelam et mortale istud inmortalitatem. illi induunt, cum receperint corpus, isti superinduunt, quia non amiserint corpus, et ideo <non> temere dixit: nolentes exui corpore, sed superindui, id est nolentes mortem experiri, sed uita praeueniri, uti deuoretur mortale hoc a uita, dum eripitur morti per superindumentum demutationis. ideo quia ostendit hoc melius esse, ne contristemur mortis, si forte, praeuentu, et arrabonem nos spiritus dicit a deo habere, quasi pigneratos in eandem spem superindumenti, et abesse a domino, quamdiu in carne sumus, ac propterea debere boni ducere abesse potius a corpore et esse cum domino, ut et mortem libenter excipiamus. atque adeo omnes ait nos oportere manifestari ante tribunal Christi, ut recipiat unusquisque quae per corpus admisit siue bonum siue malum. si enim tunc retributio meritorum, quomodo iam aliqui cum domino poterunt deputari? et tribunal autem nominando et dispunctionem boni ac mali operis utriusque sententiae iudicem ostendit et corporalem omnium repraesentationem confirmauit. non enim poterit quod corpore admissum est non corpore iudicari. iniquus enim deus. si non per id punitur quis aut iuuatur, per quod operatus est. Si qua ergo conditio noua in Christo, uetera transierunt, ecce noua facta sunt omnia: impleta est Esaiae prophetia. si etiam iubet, ut mundemus nos ab inquinamento carnis et sanguinis, non substantiam *** capere regnum dei. si et uirginem sanctam destinat ecclesiam adsignare Christo, utique ut sponsam sponso, non potest imago coniungi inimico ueritatis rei ipsius. si et pseudoapostolos dicit operarios dolosos transfiguratores sui, per hypocrisin scilicet, conuersationis, non praedicationis adulteratae reos taxat. adeo de disciplina, non de diuinitate dissidebatur. si satanas transfiguratur in angelum lucis, non potest hoc dirigi in creatorem. deus enim, non angelus, creator in deum lucis. non in angelum, transfigurare se dictus esset. si non eum satanam significaret, quem et nos et Marcion angelum nouimus. 'De paradiso' suus stilus est ad omnem quam patitur quaestionem. hic illud forte mirabor, si proprium potuit habere paradisum deus nullius terrenae dispositionis; nisi si etiam paradiso creatoris precario usus est, sicut et mundo. et tamen hominem tollere ad caelum creatoris exemplum est in Helia. magis uero mirabor deum optimum, percutiendi et saeuiendi alienum, nec proprium saltem, sed creatoris angelum satanae colaphizando apostolo suo adplicuisse et ter ab eo obsecratum non concessisse. emendat igitur et deus Marcionis secundum creatorem, elatos aemulantem et deponentem scilicet de solio dynastas. aut numquid ipse est, qui et in corpus Iob dedit satanae potestatem, ut uirtus in infirmitate comprobaretur? Quid et formam legis adhuc tenet Galatarum castigator, in tribus testibus praefiniens staturum omne uerbum? quid et non parsurum se peccatoribus comminatur lenissimi dei praedicator, immo et ipsam durius agendi in praesentia potestatem a domino datam sibi adfirmat? nega nunc, haeretice, timeri deum tuum, cuius apostolus timebat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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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저작이 마무리되어 갈수록, 거듭 나오는 것들은 이제 짧게 되짚어야 하고, 이미 여러 번 나온 어떤 것들은 건너뛰기도 해야 한다. 율법의 물러남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신을 입증하는 어떤 논거도 되지 못한다는 것, 곧 그 물러남은 창조주에게서 그리스도를 두고 선포되고 약속된 것이라는 것을 나는 그토록 여러 번 입증했으므로, <이> 편지 자체도 율법을 매우 많이 배제하는 것으로 보이는 만큼, 율법을 두고 아직도 맞붙는 일은 내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도가 심판자 하나님을 내세운다는 것, 그리고 심판자 안에서 보복자를, 보복자 안에서 창조주를 내세운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여러 번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그가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복음은 믿는 모든 사람, 곧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안에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복음과 구원을 선한 신이 아니라 - 이단자의 구분을 따라 이렇게 말하자면 - 정의로운 하나님에게 돌린다. 이 하나님은 율법의 믿음에서 복음의 믿음으로, 물론 자기 율법과 자기 복음으로 옮겨 가게 한다. 그는 또한 진리를 불의 <안에> 가두어 두는 사람들의 불경건과 불의 위에 <하나님의> 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님의 분노인가? 물론 창조주의 분노이다. 그러므로 진리도 분노가 속한 그 하나님의 것이 될 것이다. 그 분노는 진리를 위한 보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는 또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를 따른다는 것을 안다”라고 덧붙여, 진리를 위한 심판이 나오는 근원인 분노 자체를 입증했고, 또 진리가, 심판을 입증함으로써 그 분노를 입증한 바로 그 하나님의 것임을 확증했다. 창조주가 노하여, 불의 안에 갇힌 다른 신의 진리를 위해 보복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그런데 마르키온이 특히 이 편지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떼어 내어 얼마나 많은 구덩이를 팠는지는 우리 성경의 온전함에서 드러날 것이다. 나로서는 그가 마찬가지로 지워야 할 것으로 보지 못한 것들을 그의 부주의와 눈멂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숨은 것들을, 율법 안에서 범죄한 사람들의 것이든 율법 없이 범죄한 사람들의 것이든 심판할 것이라면 - 이들도 율법을 <비록> 모르지만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하기 때문이다 - 분명히 율법도,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율법과 같은 본성 자체도 속해 있는 그 하나님이 심판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 그는 “복음을 따라 그리스도를 통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복음과 그리스도도 율법과 본성이 속한 그 하나님의 것이다. 율법과 본성은 복음과 그리스도를 통해 그 하나님에게서, 그 심판으로 옹호될 것이다. 그 심판에 관해 그는 위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진리를 따른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옹호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나타나는 분노가 오직 분노의 하나님에게서만 나오듯이, 앞의 문장과 이어져 있으며 창조주의 심판이 선포되는 이 문장도, 심판하지도 분노하지도 않는 다른 신에게 돌려질 수 없고 그 하나님에게 돌려져야 한다. 이것들, 곧 내가 말하는 심판과 분노가 그의 것인 이상, 이것들을 수행하는 수단인 저것들, 곧 복음과 그리스도도 반드시 그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도둑질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도둑질하는 율법 위반자들을 율법의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공격하는 것이지, 이런 식으로 창조주 자신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일들도 창조주에게 되돌려 씌우듯이, 창조주가 도둑질을 금하면서도 이집트인들을 상대로 금과 은을 속여 가져가라고 명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 사도는, 떠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았던 하나님을 드러내 놓고 모욕하는 것은 두려워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을 몹시 몰아세워,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라는 예언자의 책망까지 들이댔다. 그러므로 그가, 악한 자들이 모독받게 했다고 꾸짖는 바로 그 하나님을 정작 자신이 모독한다면 얼마나 뒤틀린 일인가! 그는 또 마음의 포피에 행하는 할례를 앞세운다. 그런데 육신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 문자가 아니라 영으로 하는 할례는 율법의 하나님에게서 행해졌다. 만일 이것이 예레미야의 할례 - “너희는 마음의 포피를 베어라” - 이고, 모세의 할례 - “너희는 너희의 완고한 마음을 베어라” - 이기도 하다면, 마음을 베는 영은 육신을 베어 내는 문자가 속한 그 하나님의 것이고, 숨은 유대인도 드러난 유대인이 속한 그 하나님의 것이다. 그 사도는 유대인들의 하나님의 종이 아닌 사람을 유대인이라고 부르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율법, 이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 이것은 어떤 구분인가? 그대의 신이 창조주의 경륜을 섬겨서, 창조주와 그의 율법에 시간을 내주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때의 것도 지금의 것이 속한 그 하나님의 것인가? 율법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속한 그 하나님의 것인가? 이것은 경륜들의 구분이지 신들의 구분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에게, 율법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닌 그들에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라고 권한다. 어느 하나님과인가? 우리가 한 번도 원수였던 적이 없는 쪽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의 율법과 본성을 거슬러 반역했던 쪽인가? 사실 화평이 전쟁이 있었던 상대를 향해 성립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를 향해서도 의롭게 될 것이다. 또 우리를 의롭게 할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도, 한때 그의 원수였던 자들이 그의 화평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합당한 그 하나님의 것이 될 것이다. 그는 “그런데 율법이 슬며시 들어온 것은 범죄가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왜인가? 그는 “은혜가 더욱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하나님의 은혜인가? 율법도 속한 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야? 창조주가 율법을 끼워 넣은 것이, 다른 신, 그것도 알려지지 않은 신이라고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경쟁하는 신의 은혜를 위해 일을 대신 꾸려 주려는 것이었다면 모를까. 곧 그 자신 아래에서 죄가 사망에 이르도록 왕 노릇 했듯이, 은혜도 그의 적대자 <아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로 생명에 이르도록 왕 노릇 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면 말이다. 이 때문에 창조주의 율법은 모든 것을 범죄 아래 가두었고, 온 세상을 죄책으로 끌어넣었고, 모든 입을 막았다. 누구도 율법을 통해 자랑하지 못하게 하여, 은혜가 창조주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마르키온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남겨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나는 뒤따를 문제를 내다보며 그리스도의 실체에 관해 미리 기초를 놓을 수 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는 몸이 있다. “몸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어도, 곧바로 육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실체이든, 그가 몸을 말하면서 그 몸의 주인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덧붙이는 이상, 그 몸은 죽음의 법이 선고된 육신의 몸 외에 다른 몸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런데 보라, 그는 율법에 증언을 해 주고, 율법을 범죄의 원인이라는 혐의에서 풀어 준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율법이 죄인가? 그럴 수 없다!” - 마르키온이여, 율법에 대한 고발을 [그럴 수 없다며] 혐오하는 사도 앞에서 부끄러워하라 - “그러나 나는 율법을 통하지 않고는 범죄를 알지 못한다.” 오, 여기서 나오는 율법에 대한 최고의 찬사여! 율법을 통해 범죄는 숨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속인 것은 율법이 아니라 계명을 기회로 삼은 죄이다. 그 사도가 그의 율법에도 감히 돌리지 못하는 것을 그대는 어찌하여 율법의 하나님에게 돌리는가? 더구나 그는 “율법은 거룩하고, 그 계명은 의롭고 선하다”라고 덧붙인다. 그가 창조주의 율법을 이렇게 공경한다면, 그가 어떻게 창조주 자신을 무너뜨린다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계명이 선하기도 하고 의롭기도 한 그 하나님이 둘 다라고 믿어야 하는데, 누가 하나는 정의롭고 다른 하나는 선한 두 신을 구별하는가? 그가 율법이 영적이라고도 확언한다면, 율법은 분명 예언적이기도 하고 분명 예표적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서도 그리스도가 율법 안에서 예표로 선포되었고, 그래서 모든 유대인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는 것을 확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Quanto opusculum profligatur, breuiter iam retractanda sunt quae rursus occurrunt, quaedam uero et tramittenda, quae saepius occurrerunt. piget de lege adhuc congredi, qui totiens probauerim concessionem eius nullum argumentum praestare diuersi dei in Christo, praedicatam scilicet et repromissam in Christum apud creatorem, quatenus et ipsa <ista> epistola legem plurimum uidetur excludere. sed et iudicem deum ab apostolo circumferri saepe iam ostendimus et in iudice ultorem et creatorem in ultore. itaque et hic, cum dicit: non enim me pudet euangelii; uirtus enim dei est in salutem omni credenti, Iudaeo et Graeco, quia iustitia dei in eo reuelatur ex fide in fidem, sine dubio et euangelium et salutem iusto deo deputat, non bono, - ut ita dixerim secundum haeretici distinctionem - transferenti ex fide legis in fidem euangelii, suae utique legis et sui euangelii, quoniam et iram <dei> dicit reuelari de caelo super impietatem et iniustitiam hominum, qui ueritatem <in> iniustitia detineant. cuius dei ira? utique creatoris. ergo et ueritas eius erit, cuius et ira, quae reuelari habet in ultionem ueritatis. etiam adiciens: scimus autem iudicium dei secundum ueritatem esse et iram ipsam probauit, ex qua uenit iudicium pro ueritate, et ueritatem rursus eiusdem dei confirmauit, cuius iram probauit probando iudicium. aliud est, si ueritatem dei alterius in iniustitia detentam creator iratus ulciscitur. quantas autem foueas in ista uel maxime epistola Marcion fecerit auferendo quae uoluit, de nostri instrumenti integritate parebit. mihi sufficit, quae proinde eradenda non uidit quasi neglegentias et caecitates eius accipere. si enim iudicabit deus occulta hominum, tam eorum qui in lege deliquerunt quam eorum qui sine lege, - quia et hi <etsi> legem ignorant, at natura faciunt quae sunt legis - utique is deus iudicabit, cuius sunt et lex et ipsa natura, quae legis est instar ignorantibus legem. iudicabit autem quomodo? secundum euangelium, inquit, per Christum. ergo et euangelium et Christus illius sunt, cuius et lex et natura, quae per euangelium et Christum uindicabuntur a deo illo iudicio, de quo et supra: secundum ueritatem. ergo qua <ad> defendenda <ea> reueletur de caelo ira non nisi a deo irae, ita et hic sensus, pristino cohaerens, in quo iudicium creatoris edicitur, non potest in alium deum referri, qui nec iudicat nec irascitur, sed in illum, cuius dum haec sunt, iudicium dico et iram, etiam illa ipsius sint necesse est, per quae haec habent transigi, euangelium et Christus. et ideo uehitur in transgressores legis docentes non furari et furantes, ut homo dei legis, non ut creatorem ipsum his modis tangens, qui et furari uetans fraudem mandauerit in Aegyptios auri et argenti, quemadmodum et cetera in illum retorquent. scilicet apostolus uerebatur conuicium deo palam facere, a quo non uerebatur diuertisse. adeo autem Iudaeos incesserat, ut ingesserit propheticam increpationem: propter uos nomen dei blasphematur. quam ergo peruersum, ut ipse blasphemaret eum, cuius blasphemandi causa malos exprobrat! Praefert et circumcisionem cordis praeputi. atenim apud deum legis est facta circumcisio cordis, non carnis, spiritu, non littera. quodsi haec est circumcisio Hieremiae - et circumcidemini praeputia cordis - sicut et Moysei - et circumcidemini duricordiam uestram -, eius erit spiritus circumcidens cor, cuius et littera metens carnem, eius et Iudaeus, qui in occulto, cuius et Iudaeus in aperto, quia nec Iudaeum nominare uellet apostolus non Iudaeorum dei seruum. Tunc lex, nunc iustitia dei per fidem Christi. quae est ista distinctio? seruiuit deus tuus dispositioni creatoris, dans ei tempus et legi eius? an eius tunc, cuius et nunc? eius lex cuius et fides Christi? distinctio dispositionum est, non deorum. Monet iustificatos ex fide Christi. non ex lege, pacem ad deum habere. ad quem? cuius numquam fuimus hostes an cuius legi et naturae rebellauimus? nam si in eum competit pax, cum quo fuit bellum. ei et iustificabimur; et eius erit Christus, ex cuius fide iustificabimur, ad cuius pacem competit redigi hostes eius aliquando. Lex autem, inquit, subintroiuit, ut abundaret delictum. quare? ut superabundaret, inquit, gratia. cuius dei gratia, si non cuius et lex? nisi si creator ideo legem intercalauit, ut negotium procuraret gratiae dei alterius et quidem aemuli, ne dixerim ignoti, ut, quemadmodum apud ipsum regnauerat peccatum in mortem, ita et gratia regnaret in iustitia in uitam per Iesum Christum <apud> aduersarium ipsius. propter hoc omnia concluserat lex creatoris sub delictum et totum mundum deduxerat in reatum et omne os obstruxerat, ne qui gloriaretur per illam, ut gratia seruaretur in gloriam Christi non creatoris, sed Marcionis! Possum et hic de substantia Christi praestruere ex prospectu quaestionis subsecuturae. mortuos enim nos inquit legi <per corpus Christi.> ergo corpus Christi est. 'potest corpus contendi, non statim caro.' sed et quaecumque substantia sit, cum eius nominat corpus, quem subicit ex mortuis resurrexisse, non potest aliud corpus intellegi quam carnis, in quam lex mortis est dicta. Ecce autem et testimonium perhibet legi et causa delicti eam excusat: quid ergo dicemus? quia lex peccatum? absit! - erubesce, Marcion, [absit] abominanti apostolo criminationem legis - sed ego delictum non scio nisi per legem. o summum ex hoc praeconium legis, per quam <non> licuit delictum latere! non ergo lex seduxit, sed peccatum per praecepti occasionem. quid deo imputas legis quod legi eius apostolus imputare non audet? atquin et adcumulat: lex sancta et praeceptum eius iustum et bonum. si taliter ueneratur legem creatoris, quomodo ipsum destruat nescio. quis discernit duos deos, iustum alium bonum alium, cum is utrumque debeat credi, cuius praeceptum et bonum et iustum est? si autem et spiritalem confirmat legem, utique et propheticam, utique et figuratam. debeo enim et hinc constituere Christum in lege figurate praedicatum, quo et a Iudaeis omnibus potuerit agnos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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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그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냈다고 해서, 그에게서 보이던 육신이 환영이라고 불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도는 앞에서 죄를 육신에 돌렸고, 육신을 자기 지체 속에 거하면서 마음의 법에 맞서는 죄의 법이 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진 것은 이 때문이다. 곧 그는 죄의 육신을 그와 같은 실체로, 다시 말해 죄 있는 육신과 같으면서도 그 자체는 죄 있는 것이 아닌 육신으로 속량하려는 것이었다. 같은 실체 안에서 구원을 이루는 것, 이것 또한 하나님의 능력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이 육신을 고쳤다면 그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고, 죄 있는 육신과 아주 같은 육신이, 육신이면서도 죄의 육신은 아닌 채로 고쳤다면 그것이 대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모양’은 죄라는 이름에 걸리는 말이지, 실체가 거짓이라는 데 걸리는 말이 아닐 것이다. 그가 실체의 모양을 뜻하여 그 실재를 부정하려 했다면, ‘죄 있는’이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육신의’만 썼을 뿐 ‘죄 있는’까지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그때 이렇게 엮어 “죄 있는 육신의”라고 했으므로, 실체 곧 육신을 확증했고, 모양은 실체의 결함 곧 죄에 관련시켰다. 이제 ‘모양’이 실체에 대해 한 말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고 해서 실체의 실재가 부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것<이라면> 왜 비슷하다고 하는가?” 참되기는 하지만 씨에서 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상태로 보면 비슷하고 참되며, 기원으로 보면 비슷하지 않고 오히려 다르다. 게다가 서로 반대되는 것들 사이에서는 모양이 성립하지 않는다. 영은 육신의 모양이라고 불리지 않을 것이고 - 육신도 영의 모양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 있지 않은 것이 보였다면 오히려 환영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그런데 보이는 것이 실제로 있을 때 그것을 모양이라고 한다. 그것이 다른 것과 대등하다면 그것은 실제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영은 그것일 뿐이므로 모양이 아니다. 또 여기서도 그는, 우리가 육신 안에 있는데도 어떻게 우리가 육신 안에 있지 않기를 바라는지, 곧 우리가 육신의 일 안에 있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을 몸소 풀이하면서, 자신이 다음 말을 이런 뜻으로 썼다는 것을 보여 준다. “육신과 피는 하나님의 나라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는 실체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정죄한다. 그 일들은 아직 육신 안에 있는 우리라도 저지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실체의 죄책이 아니라 생활의 죄책에 속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일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 그러므로 죽음은 영혼의 것이 아니라 몸의 것이다 -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이라면, ** 죄 때문에 죽음이 닥친 쪽, 곧 몸에게. 무엇이든 그것을 잃은 자가 아닌 다른 자에게 되돌려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인 이상 몸들의 부활일 것이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린 이가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릴 것이다.” 이로써 그는 육신의 부활을 확증했다. 육신이 없으면 어떤 것도 몸이라고 불릴 수 없고 어떤 것도 죽을 것이라고 이해될 수 없다. 또 그는 그리스도의 실체가 몸을 지닌 것임을 입증했다. 참으로 우리의 죽을 몸도 그가 다시 살아난 것과 똑같이 살아날 것이며, 그가 몸으로 살아났다는 것 말고는 달리 똑같을 수가 없다. 여기서도 나는 잘려 나간 성경의 아주 넓은 낭떠러지를 뛰어넘는다. 그러나 그 사도가 이스라엘을 위해 증언하는 대목은 붙잡는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 분명히 자기들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품고 있지만 지식을 따른 것은 아니라는 증언이다. 그는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에 이르게 하는 율법의 마침이다.” 여기서 이단자는, 유대인들이 더 높은 신을 알지 못했고 그 신에 맞서 자기들의 의, 곧 자기들의 율법의 의를 세웠으며 율법의 마침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듯이 논증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도가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무지도 그들에게 꾸짖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그들이 자기들의 하나님을 향해 품은 열심을 증언하는가? 그가 꾸짖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에 이끌리기는 했으나 지식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 곧 율법에 완성을 세워 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정한 경륜을 알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그렇게 해서 그에게 맞서 자기 의를 지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주 자신도 그들이 자기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증언한다. “이스라엘은 나를 알지 못했고 백성은 나를 깨닫지 못했다.” 또 그들이 오히려 자기 의를 세운다는 것도 증언한다. “사람의 계명을 교훈으로 가르친다.” 또한 그들이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모였다는 것, 물론 무지 때문에 그랬다는 것도 증언한다. 그러므로 창조주에게 들어맞는 것은 어느 것도 다른 신에게 적용해 풀이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도가 유대인들이 알려지지 않은 신에 대해 무지하다고 꾸짖은 것은 부당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하나님의 의를 자기들이 알지 못하던 신에게 맞서 세웠다면, 그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겠는가? 그런데도 그 사도는 외친다. “오, 하나님의 부요와 지혜의 깊음이여, 그의 길은 찾을 수 없도다!” 이 외침은 어디서 터져 나왔는가? 분명히 그가 앞에서 펼쳐 읽어 온 성경을 떠올린 데서, 그리고 율법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두고 위에서 풀이했던 신비들을 바라본 데서 나왔다. 마르키온이 이것들을 일부러 지워 버렸다면, 그의 사도는 무엇 때문에 외치는가? 그는 신의 부요를 하나도 바라볼 수 없다. 그 신은 아무것도 짓지 않고 아무것도 선포하지 않았으며 결국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 곧 남의 영역으로 내려온 자만큼이나 가난하고 궁핍하다. 그러나 사도도, 옛적에 감추어졌다가 이제 열린 부요도 창조주의 것이다. 창조주는 이렇게 약속해 두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에게 숨겨진 보화를 주고, 보이지 않는 보화를 그들에게 열어 줄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서 “오, 하나님의 부요와 지혜의 깊음이여!”라는 외침이 나왔다. 그 하나님의 보화가 이제 열려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사야의 말이고, 이어지는 말도 같은 예언자의 책에서 나왔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는가?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는가? 누가 그에게 먼저 주어서 갚음을 받겠는가?” 성경에서 그토록 많은 것을 빼앗은 그대는 왜 이것들은 남겨 두었는가? 마치 이것들도 창조주의 것이 아니라는 듯이. 자, 이제 새 신의 계명들을 살펴보자. 그는 말한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붙어 있으라.” - 창조주에게는 물론 다른 말이 있기 때문이다. “너희 가운데서 악을 없애라”, 또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 “형제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라.” - 이것은 다음 말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 물론 하나님 안에서 품는 소망이다. - “주를 바라는 것이 관리들을 바라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 “환난을 견디라.” - “주가 환난 날에 네게 응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에 나온다] -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 만물을 축복으로 지은 이 말고 누가 이것을 가르치겠는가? - “높은 것을 생각하지 말고 낮은 자들과 어울리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 그런 자들은 이사야를 통해 “화 있을진저”라는 말을 듣기 때문이다 -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 “네 형제의 악을 기억하지 말라” - “너희 스스로 보복하지 말라. ‘보복은 내 것이니 내가 보복하겠다’라고 주가 말한다.” “모든 <사람>과 평화를 누리라.” 그러므로 율법의 동해 보복도 상해에 대한 보복을 허락한 것이 아니라, 보복을 두려워하게 하여 상해를 시작하는 일을 억눌렀다. 그러므로 그 사도가 창조주의 규율 전체를 그의 으뜸 계명으로 요약한 것은 마땅하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율법을 채우는 이것이 율법 자체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제 나는 율법의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마르키온의 신일까 봐 두렵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계명으로 완성되는데 그리스도의 것은 창조주의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이제 무엇을 두고 다투겠는가? 그리스도가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라고 말했든 말하지 않았든, 폰토스 사람이 이 말씀을 부정하려고 애쓴 것은 헛수고였다. 복음이 율법을 완성하지 않았다면, 보라, 율법이 복음을 완성했다. 그런데 그 사도가 끝맺는 대목에서도 그리스도의 심판대로 위협하는 것은 잘된 일이다. 그 심판대는 분명히 심판자이자 보복자의 것이고, 분명히 창조주의 것이다. 그 사도는 두려워해야 할 이로 내세우는 바로 그 이를 분명히 은혜를 구해야 할 이로 세운다. 설령 그가 다른 신을 선포했다 하더라도 그렇다.

Hunc si pater misit in similitudinem carnis peccati, non ideo phantasma dicetur caro, quae in illo uidebatur. peccatum enim carni supra adscripsit et illam fecit legem peccati habitantem in membris suis et aduersantem legi sensus. ob hoc igitur missum filium in similitudinem carnis peccati, ut peccati carnem simili substantia redimeret, id est carne, quae peccatrici carni similis esset, cum peccatrix ipsa non esset. nam et haec erit dei uirtus in substantia pari perficere salutem. non enim magnum, si spiritus dei carnem remediaret, sed si caro, consimilis peccatrici, dum caro est, sed non peccati. ita similitudo ad titulum peccati pertinebit, non ad substantiae mendacium. nam nec addidisset 'peccati', si substantiae similitudinem uellet intellegi, ut negaret ueritatem; tantum enim 'carnis' posuisset, non et 'peccati'. cum uero tunc sic struxit: 'carnis peccati', et substantiam confirmauit, id est carnem, et similitudinem ad uitium substantiae retulit, id est ad peccatum. puta nunc similitudinem substantiae dictam: non ideo negabitur substantiae ueritas. 'cur ergo similis, <si> uera'? quia uera quidem, sed non ex semine: de statu similis et uera, de censu non uero dissimilis. ceterum similitudo in contrariis nulla est. spiritus non diceretur carnis similitudo, - quia nec caro similitudinem spiritus caperet - sed phantasma diceretur, si id quod non erat uidebatur. similitudo autem dicitur, cum est quod uidetur. est enim, dum alterius par est. phantasma autem, qua hoc tantum est, non est similitudo. Et hic autem ipse edisserens, quomodo nolit nos esse in carne, cum simus in carne, ut scilicet non simus in operibus carnis, ostendit hac ratione scripsisse: caro et sanguis regnum dei non consequentur, non substantiam damnans, sed opera eius; quae, <quia> possunt non admitti a nobis in carne adhuc positis, non ad reatum substantiae, sed ad conuersationis pertinebunt. Item si corpus quidem mortuum propter delictum, - adeo non animae, sed corporis mors est - spiritus autem uita propter iustitiam, *** cui mors obuenit propter delictum, id est corpori. non enim alii quid restituitur, nisi qui illud amisit, et ita erit resurrectio, mortuorum dum est, corporum. nam et subiungit: qui suscitauit Christum a mortuis, uiuificabit et mortalia corpora uestra. adeo et carnis resurrectionem confirmauit, absque qua nec corpus aliquid dici capit nec mortale aliquid intellegi, et Christi substantiam corporalem probauit; siquidem proinde uiuificabuntur et mortalia corpora nostra, quemadmodum et ille resuscitatus est, non alias proinde, nisi quia in corpore. Salio et hic amplissimum abruptum intercisae scripturae, sed adprehendo testimonium perhibentem apostolum Israheli, quod zelum dei habeant, sui utique, non tamen per scientiam. deum enim, inquit, ignorantes et suam iustitiam sistere quaerentes non subiecerunt se iustitiae dei; finis etenim legis Christus in iustitiam omni credenti. hic erit argumentatio haeretici, quasi deum superiorem ignorauerint Iudaei, qui aduersus eum iustitiam suam, id est legis suae, constituerint, non recipientes Christum, finem legis. cur ergo zelo eorum erga deum proprium testimonium perhibet, si non et inscitiam erga eundem deum eis exprobrat, quod zelo quidem dei agerentur, sed non per scientiam, ignorantes scilicet eum, dum dispositiones eius in Christo ignorant consummationem legi staturo atque ita suam iustitiam tuentur aduersus illum. atque adeo ipse creator et ignorantiam erga se eorum contestatur: Israhel me non agnouit et populus me non intellexit, et quod iustitiam suam magis sisterent: docentes doctrinas praecepta hominum, nec non et congregati essent aduersus dominum et aduersus Christum ipsius, ex inscitia scilicet. nihil igitur potest in alium deum exponi, quod competit in creatorem, quia et alias inmerito apostolus Iudaeos de ignorantia suggillasset erga deum ignotum. quid enim deliquerant, si iustitiam dei sui aduersus eum sistebant, quem ignorabant? atquin exclamat: 'o profundum diuitiarum et sapientiae dei et inuestigabiles uiae eius'! unde ista eruptio? ex recordatione scilicet scripturarum, quas retro reuoluerat, ex contemplatione sacramentorum, quae supra disseruerat in fidem Christi ex lege uenientem. haec si Marcion de industria erasit, quid apostolus eius exclamat, nullas intuens diuitias dei, tam pauperis et egeni quam qui nihil condidit, nihil praedicauit, nihil denique habuit, ut qui in aliena descendit? sed enim et apostolus et diuitiae creatoris olim absconditae nunc reseratae. sic enim repromiserat: et dabo illis thesauros occultos, inuisibiles aperiam eis. inde ergo exclamatum est: o profundum diuitiarum et sapientiae dei! cuius iam thesauri patebant. id Esaiae et sequentia de eiusdem prophetae instrumento: quis enim cognouit sensum domini, aut quis consiliarius <eius> fuit? quis porrexit ei et retribuetur illi? qui tanta de scripturis ademisti, quid ista seruasti, quasi non et haec creatoris? Plane noui dei praecepta uideamus: odio, inquit, habentes malum et bono adhaerentes - aliud est enim apud creatorem: auferte malum de uobis et: declina a malo et fac bonum -; amore fraternitatis inuicem adfectuosi - non enim id ipsum est: diliges proximum tamquam te -; spe gaudentes, utique dei - bonum est enim sperare in domino, quam sperare in magistratus -; pressuram sustinentes - exaudiet enim te dominus in die pressurae [habes psalmum] -; benedicite et nolite maledicere - quis hoc docebit quam qui omnia benedictionibus condidit? -; non altum sapientes, sed humilibus adsectantes, ne sitis apud uos sapientes - 'uae' enim audiunt per Esaiam -; malum pro malo nemini retribueritis - et malitiae fratris tui ne memineris -; nec uosmet ipsos ulciscentes; 'mihi enim uindictam et ego uindicabo', dicit dominus; pacem cum omnibus <hominibus> habetote. ergo et legalis talio non retributionem iniuriae permittebat, sed inceptionem metu retributionis comprimebat. merito itaque totam creatoris disciplinam principali praecepto eius conclusit: diliges proximum tamquam te. hoc legis supplementum si ex ipsa lege est, quis sit deus legis, iam ignoro; metuo, ne deus Marcionis. si uero euangelium Christi hoc praecepto adimpletur, Christi autem non est creatoris, quo iam contendimus? dixerit Christus aut non: <non> ego ueni legem dissoluere sed implere, frustra de ista sententia neganda Ponticus laborauit: si euangelium legem non adimpleuit, ecce lex euangelium adimpleuit. bene autem, quod et in clausula tribunal Christi comminatur, utique iudicis et ultoris, utique creatoris, illum certe constituens promerendum, quem intentat timendum, etiamsi alium praedicar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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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짧은 편지들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일을 마다하지 않겠다. 적은 말 속에도 맛이 있다. 유대인들은 자기 예언자들을 죽였다.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다른 신, 그것도 지극히 선한 신의 사도와 무슨 상관인가? 그 신은 자기 사람들의 잘못조차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며, 그 자신도 바로 그 예언자들을 무너뜨림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을 죽이는 신이 아닌가? 이스라엘이 그 신도 배척한 자들을 죽였다면, 그 신이 먼저 그들에게 적대적인 판결을 내렸다면, 이스라엘이 그 신 앞에서 무슨 악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저질렀다”라고 한다면, 그 불의를 꾸짖을 이는 그 피해가 미친 당사자이다. 적어도 피해를 입은 이의 적대자만 아니라면 다른 누구라도 그럴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주도 죽이고 자기 예언자들도 죽인 자들이라고 말하여 주의 죽음까지 그들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그들의 죄를 무겁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기”라는 말은 이단자가 덧붙인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실 자기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도륙한 자들이 다른 신을 선포하는 그리스도를 죽였다면, 그것이 무엇이 그리 지독한 일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것은 그들이 주와 그의 종들을 모두 죽였다는 점에서 죄를 가중하는 논법<이다>. 결국 그들이 한 신의 그리스도와 다른 신의 예언자들을 죽였다면, 그는 불경을 동등하게 놓은 것이지 가중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불경은 동등하게 놓일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 불경이 두 죄목 모두에서 같은 하나님에게 저질러진 것이 아니라면 가중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예언자들은 같은 하나님에게 속한다. 그런데 그가 우리의 어떤 거룩함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부르는지는 그가 금하는 반대되는 것들에서 알 수 있다 - 그는 음란을 멀리하라고 말하지, 혼인을 멀리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각 사람이 자기 그릇을 존귀하게 다룰 줄 알라고도 말한다.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이방인들처럼 정욕으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정욕은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혼인에 돌려지지 않고, 정도를 벗어나고 자연을 거스르며 괴이한 방탕에 돌려진다 -. 그 거룩함은 온갖 추함과 더러움에 반대된다. 그것은 혼인이 아니라 정욕을 배제하고, 우리의 그릇을 혼인의 존귀함 안에서 다룬다. 그런데 나는 이 대목을 다루되, 다른 거룩함, 곧 더 온전한 거룩함을 더 높이 두는 입장은 그대로 지키고자 한다. 나는 절제와 동정을 혼인보다 앞세우지만, 혼인을 금하지는 않는다. 내가 물리치는 것은 하나님의 혼인을 무너뜨리는 자들이지, 정결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남아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 먼저 일어날 자들과 함께 구름 속에 들려 공중으로 올라가 주를 맞이할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일들이 이미 그때 내다보였기에, 하늘의 실체들, 곧 위에 있는 예루살렘 자체가 놀라며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선언한다는 것을 안다. “구름처럼, 새끼들과 함께 나에게 오는 비둘기들처럼 이리로 날아오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이 올라가는 길을 준비할 것이라면, 그는 호세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 그리스도일 것이다. “하늘에 자기의 올라가는 길을 세우는 이.” 분명 자기 자신과 자기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 일들을 들은 이가 아니라면, 이제 누구에게서 그것을 바라겠는가? 그는 어떤 영을 소멸하지 말라고 하고, 어떤 예언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지 말라고 하는가? 마르키온에 따르면 그것은 분명 창조주의 영도 아니고 창조주의 예언들도 아니다. 그가 무너뜨리는 것들은 그 자신이 이미 소멸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으니, 자기가 한 일을 금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르키온은 오늘 자기 교회에서 이 말에 근거하여 자기 신의 영, 곧 소멸해서는 안 될 영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될 예언들을 내보여야 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가 자기 생각에 그런 것을 내보였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영적이고 예언적인 은혜와 능력의 표준에 비추어 시험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곧 그것이 장래 일을 미리 알리고, 마음에 숨은 것들을 드러내며, 신비들을 풀어 설명하기를 요구할 것이다. 그가 그런 것을 하나도 내놓지도 입증하지도 못하면, 우리는 창조주를 따라 선포하는 창조주의 영과 예언들을 내놓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도가 무엇에 대해 말했는지 분명해질 것이다. 곧 그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게 될 것들에 대해서이다. 그 하나님이 존재하는 동안 그의 영도 일하고 약속도 이루어진다. 자, 이제 육신의 구원을 부정하고, 이런 문맥에서 몸이 언급될 때마다 그것을 육신의 실체가 아닌 무언지 모를 다른 것으로 해석하는 그대들이여, 사도는 어떻게 우리 안의 모든 실체를 분명한 이름으로 구별하고 그 모두를 구원을 바라는 하나의 기원 안에 두었는가? 그는 우리의 영과 몸과 영혼이 우리의 주이자 구주인 그리스도가 올 때 흠 없이 보존되기를 바랐다. 사실 그는 영혼도 몸도 언급했는데, 이 둘은 두 가지인 만큼 서로 다른 것이다. 사실 영혼도 [또한] 영과 마찬가지로 그 나름의 성질을 지닌 어떤 몸이기는 하다. 그러나 몸과 영혼이 구별되어 언급될 때에는, <그런데> 영혼은 자기 고유의 이름을 지니고 있어 몸이라는 공통의 이름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그 이름은 육신에게 남겨진다. 육신은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으니 공통의 이름을 쓸 수밖에 없다. 사실 나는 사람 안에서 영과 영혼 다음으로, 육신 말고는 몸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다른 실체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육신이 따로 이름 불리지 않을 때마다 나는 몸이라는 이름에서 육신을 이해한다. 여기서는 훨씬 더 그러하다. 여기서는 몸이라 불리는 것이 그 자체의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Breuioribus quoque epistulis non pigebit intendere. est sapor et in paucis. occiderant Iudaei prophetas suos. possum dicere: quid ad apostolum dei alterius et quidem optimi, qui nec suorum delicta damnare dicatur quique et ipse prophetas eosdem destruendo quodammodo perimat? quid mali admisit apud illum Israhel, si occidit quos et ille reprobauit, si prior inimicam in eos sententiam statuit? 'deliquit autem apud deum ipsorum': is exprobrabit iniquitatem, ad quem pertinet laesus; certe quiuis alius quam aduersarius laesi. sed nec onerasset illos imputando etiam domini necem qui et dominum interfecerunt dicendo et prophetas suos, licet 'suos' adiectio sit haeretici. quid enim tam acerbum, si alterius dei praedicatorem Christum interemerunt qui sui dei prophetas contrucidauerunt? status autem <est> exaggerationis, quod et dominum et famulos eius peremissent. denique si alterius dei Christum alterius prophetas peremerunt, aequauit impietatem, non exaggerauit. aequanda autem non fuit: ergo exaggerari non potuit, nisi in eundem deum commissa ex utroque titulo. ergo eiusdem dei Christus et prophetae. Quam autem sanctitatem nostram 'uoluntatem dei' dicat, ex contrariis, quae prohibet, agnoscere est - abstinere enim, inquit, a stupro, non a matrimonio; scire unumquemque uas suum in honore tractare. quomodo? dum non in libidine, qua gentes. libido autem nec apud gentes matrimonio adscribitur, sed extraordinariis et non naturalibus et portentosis luxuriae -: est turpitudini quaque et inmunditiae contraria, quae non matrimonium excludat, sed libidinem, quae uas nostrum in honore matrimonii tractet. hunc autem locum salua alterius, id est plenioris sanctitatis praelatione tractauerim, continentiam et uirginitatem nuptiis anteponens, sed non prohibitis. destructores enim dei nuptiarum, non sectatores castitatis retundo. Ait eos, qui remaneant in aduentum Christi cum eis, qui mortui in Christo primi resurgent, quod in nubibus auferentur in aërem obuiam domino. agnosco his iam tunc prospectis mirari substantias caelestes ipsam Hierusalem, quae sursum est, et per Esaiam pronuntiare: quinam huc uelut nubes uolant, tamquam columbae cum pullis ad me? hunc ascensum si Christus nobis praeparabit, ille erit Christus, de quo Osee: qui ascensum suum aedificat in caelos, utique sibi et suis. exinde a quo sperabo nunc, nisi a quo haec audiui? Quem spiritum prohibet extingui et quas prophetias uetat nihil haberi? utique non creatoris spiritum nec creatoris prophetias secundum Marcionem. quae enim destruit, ipse iam extinxit et nihil fecit, nec potest prohibere quae ipse fecit. ergo incumbit Marcioni exhibere hodie apud ecclesiam suam exinde spiritum dei sui, qui non sit extinguendus, et prophetias, quae non sint nihil habendae. et si exhibuit quod putat, sciat nos quodcumque illud ad formam spiritalis et propheticae gratiae atque uirtutis prouocaturos, ut et futura praenuntiet et occulta cordis reuelet et sacramenta edisserat. cum nihil tale protulerit ac probarit, nos proferemus et spiritum et prophetias creatoris secundum ipsum praedicantes. atque ita constabit apostolus de quibus dixerit, de eis scilicet, quae futura erant in ecclesia eius dei, qui dum est, spiritus quoque eius operatur et promissio celebratur. Age nunc, qui salutem carnis abnuitis et, si quando corpus in huiusmodi praenominatur, aliud nescio quid interpretamini illud quam substantiam carnis, quomodo apostolus omnes in nobis substantias certis nominibus distinxit et omnes in uno uoto constituit salutis, optans, ut spiritus noster et corpus et anima sine querela in aduentu domini et salutificatoris nostri Christi conseruentur? nam et animam posuit et corpus, tam duas res quam diuersas. licet enim et anima [et] corpus sit aliquod suae qualitatis, sicut et spiritus, cum tamen et corpus et anima distincte nominantur, habet <autem> anima suum uocabulum proprium, non egens communi uocabulo corporis, id relinquitur carni, quae non nominata proprio, communi utatur necesse est. etenim aliam substantiam in homine non uideo post spiritum et animam, cui uocabulum corporis accommodetur praeter carnem, hanc totiens in corporis nomine intellegens, quotiens non nominatur; multo magis hic, cum quae dicitur corpus suo nomine appellatur.

16

우리는 어떤 것들을 거듭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그것들과 맞물린 것들을 확증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여기서도 사도가 두 가지 공과를 모두 갚는 이로 주를 내세운다고 말한다. 그 주는 창조주이거나, 마르키온이 원하지 않겠지만 창조주와 대등한 자이다. 그에게서는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에게 괴로움으로 갚고, 괴로움을 당하는 우리에게 안식으로 갚는 것이 정당하다. 주 예수가 자기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타오르는 불 가운데 하늘로부터 와서 나타날 때에 그렇게 된다. 그러나 이단자는 “불꽃”과 “불”을 지움으로써 그 불을 꺼 버렸다. 물론 그 주를 우리 쪽 하나님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삭제가 헛되다는 것은 환히 빛난다. 사도는 주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보복하러 올 것이라고 쓰고, 그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능력의 영광으로부터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므로, 주가 벌하러 오는 이로서 타오르는 불을 끌어들이는 것은 당연히 뒤따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마르키온이 원하지 않더라도, 이 점에서도 그리스도는 불사르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이고, 저 점에서도 창조주의 그리스도[이다]. 그가 주를 알지 못하는 자들, 곧 이방인들에게까지 보복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사실 그는 따로 **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언급했다. 그들이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들이든 유대인들이든 말이다. 그런데 어쩌면 복음을 알지 못할 이방인들에게 형벌을 받아 내는 것은, 본성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고 복음 말고는 어디에서도 계시되지 않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것도 아닌 그런 신이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창조주에게는 본성적인 앎도 마땅히 돌려져야 한다. 사람은 그의 작품들에서 그를 깨닫고, 거기서부터 더 온전한 앎에 이르도록 그를 찾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까지 벌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그 하나님이 할 일이다. 그가 “주의 얼굴과 그의 능력의 영광으로부터”라고 말한 것 자체도, 이사야의 말을 같은 이유로 쓴 것이어서, 땅을 부수려고 일어나는 바로 그 주를 드러낸다. 그런데 주의 오심 전에 먼저 드러나야 하며, 신이라 불리는 모든 것과 모든 숭배 위로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내세울 죄의 사람, 멸망의 아들은 누구인가? 우리에 따르면 그는 분명 적그리스도이다. 옛 예언과 새 예언이 가르치는 대로이며, 사도 요한이 가르치는 대로이다. 요한은 이미 적그리스도들, 곧 적그리스도의 선구자인 영들이 세상에 나왔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온 것을 부인하고 예수를 해체하는 자들, 곧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하여 그렇게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마르키온에 따르면, 그는 창조주의 그리스도가 아닐까 싶다. <사실> 마르키온에게서는 그 그리스도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둘 중 누구이든, 나는 묻는다. 그는 왜 모든 능력과 거짓의 표적과 기적으로 오는가? “그들이 구원받도록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그것이 그들에게 미혹의 충동<이> 될 것이다. 이는 <그들이 거짓을 믿게 하여>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에 동의한 자들이 모두 심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창조주에 따른 적그리스도라면, 구원받도록 진리를 믿지 않은 자들을 미혹 속으로 몰아넣으려고 그를 보내는 하나님은 창조주일 것이다. 진리와 구원도, 미혹을 보내어 그것들을 위해 보복하는 같은 이, 곧 창조주에게 속할 것이다. 진리로 사로잡지 못한 자들을 미혹으로 속이는 그 질투 자체도 창조주에게 어울린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 따른 적그리스도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마르키온에 따라 그는 창조주의 그리스도이다. 그렇다면 그가 자기 진리를 위해 보복하려고 창조주의 그리스도를 보낸다는 것은 무슨 꼴이 되겠는가? 그런데 <만일> 그가 적그리스도에 대해 동의한다 해도, 나는 마찬가지로 말하겠다. 창조주의 천사인 사탄이 그 신에게 필요하고, 창조주를 위해 미혹의 역사를 수행해야 할 자로서 그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무슨 꼴인가? 요컨대, 업신여기는 자들과 변절하는 자들, 나아가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까지 분노와 질투와 미혹을 보내는 일이 속한 이에게 천사도 진리도 구원도 속한다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면 - 이제 마르키온도 자기 자리에서 물러나 자기 신 역시 질투하는 신임을 인정한다고 하자 -, 누가 더 마땅하게 분노하겠는가? 내 생각에는, 만물의 시초부터 작품들과 은택들과 재앙들과 선포들과 증인들로 자연을 자기를 알도록 미리 갖추어 두었으나 그럼에도 알려지지 않은 이이지, 단 한 번 복음서라는 유일한 문서로, 그것도 불확실하고 다른 신을 공공연히 선포하지도 않는 문서로 내세워진 자가 아니다. 이처럼 응징이 어울리는 이에게 응징의 근거도 어울릴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복음과 진리와 구원이다. 그런데 먹고자 하는 자에게 일하라고 명하는 것은, 타작하는 소의 입을 풀어 두라고 명한 이의 가르침이다.

Cogimur quaedam identidem iterare, ut cohaerentia eis confirmemus. dominum et hic retributorem utriusque meriti dicimus circumferri ab apostolo, aut creatorem aut, quod nolit Marcion, parem creatoris, apud quem iustum sit adflictatoribus nostris rependi adflictationem et nobis, qui adflictemur, requietem in reuelatione domini Iesu uenientis a caelo cum angelis uirtutis suae et in flamma ignis. sed flammam et ignem delendo haereticus extinxit, ne scilicet nostratem deum faceret. lucet tamen uanitas liturae. cum enim ad ultionem uenturum scribat apostolus dominum exigendam de eis, qui deum ignorent et qui non obaudiant euangelio, quos ait poenam luituros exitialem aeternam a facie domini et a gloria ualentiae eius, sequitur, ut flammam ignis inducat, scilicet ueniens ad puniendum. ita et in hoc, nolente Marcione, crematoris dei Christus est, et in illo creatoris [est], quod etiam de ignorantibus dominum ulciscitur, id est de ethnicis. seorsum enim posuit *** euangelio non obaudientes, siue Christianos peccatores siue Iudaeos. porro de ethnicis exigere poenas, qui euangelium forte non norint, non est dei eius, qui naturaliter sit ignotus nec usquam nisi in euangelio sit reuelatus, non omnibus scibilis. creatori autem etiam naturalis agnitio debetur, ex operibus intellegendo et exinde in pleniorem notitiam requirendo. illius est ergo etiam ignorantes deum plectere, quem non liceat ignorari. ipsum quod ait: a facie domini et a gloria ualentiae eius, uerbis usus Esaiae et ex ipsa causa, eundem sapit dominum, consurgentem ut comminuat terram. Quis autem est homo delicti, filius perditionis, quem reuelari prius oportet ante domini aduentum, extollens se super omne quod deus dicitur et omnem religionem, consessurus in templo dei et deum se iactaturus? secundum nos quidem antichristus, ut docent ueteres ac nouae prophetiae, ut Iohannes apostolus, qui iam antichristos dicit processisse in mundum, praecursores antichristi spiritus, negantes Christum in carne uenisse et soluentes Iesum, scilicet in deo creatore; secundum uero Marcionem nescio, ne Christus sit creatoris. nondum <enim> uenit apud illum. quisquis est autem ex duobus, quaero, cur ueniat in omni uirtute et signis et ostentis mendacii. propterea, inquit, quod dilectionem ueritatis non susceperint, ut salui essent; et propter hoc erit eis <in> instinctum fallaciae, ut <credant mendacio, ut> iudicentur omnes, qui non crediderunt ueritati, sed consenserunt iniquitati. igitur si antichristus est secundum creatorem, deus erit creator, qui eum mittit ad impingendos eos in errorem, qui non crediderunt ueritati, ut salui fierent; eiusdem erit ueritas et salus, qui eas summissu erroris ulciscitur, id est creatoris, cui et competit zelus ipse, errore decipere quos ueritate non cepit. si uero non est antiohristus secundum nos, ergo Christus est creatoris secundum Marcionem. et quale erit, ut ad ulciscendam ueritatem suam Christum creatoris summittat? sed et <si> de antichristo consentit, proinde dixerim: quale est, ut illi satanas, angelus creatoris, sit necessarius et occidatur ab eo, habens fallaciae operatione fungi creatori? in summa, si indubitatum est eius esse et angelum et ueritatem et salutem, cuius et ira et aemulatio et fallaciae inmissio aduersus contemptores et desultores, etiam aduersus ignorantes - ut iam et Marcion de gradu cedat, deum quoque suum zeloten concedens -, quis dignius irascetur? puto qui a primordio rerum naturam operibus beneficiis plagis praedicationibus testibus ad agnitionem sui praestruxit nec tamen agnitus est, non qui semel unico euangelii instrumento, et ipso incerto nec palam alium deum praedicante, productus est. ita cui competit uindicta, ei competet materia uindictae, euangelium dico et ueritas et salus. Iubere autem operari eum, qui uelit manducare, eius disciplina est, qui boui trituranti os liberum iussit.

17

물론 우리는 교회의 진리에 따라 이 편지가 라오디게아인들이 아니라 에베소인들에게 보내진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마르키온은 제목마저 한번 변조해 보려고 든다. 마치 이 일에서도 지극히 꼼꼼한 탐구자라도 되는 듯이. 그러나 제목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 사도는 몇몇 사람들에게 쓰면서 모든 사람에게 쓴 것이고, 어쨌든 분명히 선포되는 내용이 들어맞는 그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서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기 뜻의 신비 안에서 세운 선한 판단에 따라, 때들의 충만의 경륜을 위하여,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곧 만물을 그리스도 안으로, 그리스어에서 그 낱말이 울리는 대로 말하자면, 다시 머리 아래로 모으는 일, 곧 처음으로 되돌리거나 처음부터 다시 헤아리는 일이 누구에게 들어맞겠는가? 처음부터 만물이 그의 것이고 처음 자체도 그의 것이며, 그에게서 때들과 때들의 충만<과 그 충만>의 경륜이 나오고, 그 경륜 때문에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처음으로 다시 헤아려지는 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만든 것이 하나도 없는 다른 신에게 무슨 처음, 곧 어디서부터라는 것이 있는가? 처음 없이 무슨 때들이 있겠는가? 때들 없이 무슨 충만이 있겠는가? 충만 없이 무슨 경륜이 있겠는가? 결국 그가 일찍이 땅에서 무엇을 했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하늘에 있는 것들까지 다시 헤아리려고 충만해져야 할 때들의 어떤 긴 경륜이 있었다고 여겨지겠는가? 또한 하늘에 있는 일들도, 그것이 무엇이든, 땅에 있는 일들도 행했다고 모두가 인정하는 이가 아닌 다른 이가 행했다고 우리는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만물”이 처음부터 창조주가 아닌 다른 이의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면, 그것들이 자기를 만든 이에 의해 자기 그리스도 안으로가 아니라 다른 이에 의해 다른 그리스도 안으로 다시 헤아려진다고 누가 믿겠는가? 그것들이 창조주의 것이라면, 다른 신과는 서로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르다면 분명히 서로 반대된다. 그렇다면 반대되는 것들이 결국 자기들을 파괴하는 자 안으로 어떻게 다시 헤아려지겠는가? 또 그가 “그리스도에게 미리 소망을 둔 우리가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 이어지는 말은 어떤 그리스도를 알리는가? 사실 미리 소망을 둘 수 있었던 자들, 곧 그가 오기 전에 하나님에게 소망을 둘 수 있었던 자들이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미리 전해진 유대인들이 아니라면 누구이겠는가? 그러므로 미리 전해진 이가 미리 소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자기 자신에게, 곧 유대인들에게 돌리므로, 이방인들에게로 돌아서면서 구별을 짓기까지 한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들었을 때, 그 안에서 믿었고 그의 약속의 거룩한 영으로 인 쳐졌다.” 어떤 약속인가? 요엘을 통해 주어진 약속이다. “마지막 날들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신에 부어 주겠다.” 곧 이방인들에게도. 이렇게 영과 복음은 <둘 다>, 선포되는 동안 미리 소망의 대상이었던 그 그리스도 안에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영광의 아버지”도, 시편에서 그의 그리스도가 영광의 왕으로서 올라가며 이렇게 노래되는 바로 그다. “이 영광의 왕은 누구인가? 만군의 주, 그가 영광의 왕이다.” “지혜의 영”도 그에게서 구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이사야를 통해 일곱 영 가운데 이런 종류의 영적 은사도 열거되어 있다. “밝혀진 마음의 눈”을 줄 이도 그다. 그는 바깥 눈에도 빛을 풍성히 주었고, 백성의 눈멂을 싫어한다. “내 종들 말고 누가 눈먼 자인가? 하나님의 종들이 눈멀게 되었다.” “성도들 안에 있는 기업의 풍성함”도 그에게 있다. 그는 이방인들을 부르는 일로 그 기업을 약속했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네 기업으로 주겠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고 자기 오른편에 앉히며 만물을 복종시킴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자기 능력을 역사한” 이도, 이렇게 말한 바로 그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다른 곳에서도 영이 아버지에게 아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물을 그의 발아래 복종시키셨습니다.” 창조주에게서 알아볼 수 있는 이것들로부터 다른 신과 다른 그리스도가 추론된다면, 이제 창조주를 찾아보자. 분명히, 내 생각에, 우리는 그를 찾았다. 그가 그들이 죄과로 죽었다고, 곧 그들이 그 안에서 이 세상의 시대를 따라, 불신의 아들들 안에서 일하는 공중 권세의 통치자를 따라 행[하지 않]았던 죄과로 죽었다고 말할 때다. 그러나 마르키온은 여기서도 세상을 세상의 신으로 풀이할 수 없다. 피조물이 창조주와, 만들어진 것이 만든 이와, 세상이 하나님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또 시대들의 권세의 통치자인 이가 공중 권세의 통치자라고 불리지도 않을 것이다. 더 높은 것들을 다스리는 이는 결코 더 낮은 것들로 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낮은 것들도 그에게 속한다고 해도 그렇다. 또한 그는 불신을 일으키는 자로 보일 수도 없다. 오히려 그 자신이 유대인들에게서도 이방인들에게서도 불신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이 창조주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이것들이 더 잘 들어맞는 자도 있다면, 그 사도는 분명히 그것을 더 잘 알았다. 그 자는 누구인가? 의심할 것 없이, 이 공중을 차지하고서 창조주 자신 앞에 불신의 아들들로 담을 쌓은 자다. 예언자가 그 자가 이렇게 말한다고 전하는 대로다. “내가 구름 속에 내 보좌를 두겠다. 내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겠다.” 이 자가 마귀일 것이다. 그들이 그 사도의 말도 그렇게 읽히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다른 곳에서도 그를 이 세상의 신으로 인정할 것이다. 실로 이렇게 그는 거짓 신성으로 온 세상을 채웠다. 만일 그런 자가 없었다면, 그때에는 이것들이 창조주를 가리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도가 유대교 안에서 살았<다고 해도>, 그가 죄과에 대해 다음 말을 끼워 넣었다고 해서 “우리도 모두 그 안에서 살았다”, 그 때문에 창조주를 죄과의 주이자 이 공중의 통치자로 이해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유대교 안에서 마귀를 자기 안에서 일하는 자로 둔 불신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였고, 그때 교회와 창조주의 그리스도를 박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한 “우리는 분노의 아들들이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본성으로 그러했다는 것이다. 창조주가 유대인들을 아들들이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이단자가 창조주를 분노의 주라고 논증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실 그가 “우리는 본성으로 분노의 아들들이었다”라고 말할 때, 유대인들은 본성으로가 아니라 조상들을 택한 일로 창조주의 아들들이므로, 그는 분노의 아들들을 본성에 연결했지 창조주에게 연결하지 않았다. 끝으로 그가 “다른 이들처럼”이라고 덧붙이는데, 이들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므로, 그가 죄과와 육신의 욕망과 불신과 분노를 모든 사람의 공통 본성에 돌린다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마귀가 그 본성을 사로잡는데, 마귀 자신도 이미 죄과의 씨를 뿌려 그 본성을 <물들게> 했다. “우리는 그가 만든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졌다”라고 그는 말한다. 만드는 것과 짓는 것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둘 다 한 이에게 돌렸다. 그런데 사람은 창조주가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만든 바로 그 이가 그리스도 안에서 지었다. 실체에 관해서는 만들었고, 은혜에 관해서는 지었다. 이어지는 말도 살펴보라. “기억하라. 너희는 전에 육신으로 이방인이었고, 손으로 육신에 행한 이른바 할례로부터 무할례라고 불린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없이 있었고, 이스라엘의 공동체에서 멀어져 있었으며, 언약들에 대해 나그네였고, 그 약속의 소망을 가지지 못했으며,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있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어떤 하나님 없이, 어떤 그리스도 없이 있었는가? 분명히 이스라엘의 공동체와 언약들과 약속이 속해 있던 그 하나님 없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가까워졌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들은 이전에 무엇으로부터 멀리 있었는가? 그가 앞에서 말하는 것들로부터다. 곧 창조주의 그리스도로부터, 이스라엘의 공동체로부터, 언약들로부터, 약속의 소망으로부터, 하나님 자신으로부터다. 이것들이 그러하다면,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때 멀리 있던 바로 그것들에 가까워진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공동체와, 언약들과 약속과 그들의 하나님 자신에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워졌다면, 다른 신의 그리스도가 우리를 멀리서 창조주에게로 이끌어 왔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그 사도는 멀리서 부름 받을 이방인들의 부르심에 대해 이렇게 선포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에게서 멀리 있던 자들이 내 의에 가까이 왔다.” 우리가 이미 자주 보여 주었듯이, 창조주의 의와 평화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우리의 평화다. 그는 둘을 - 곧 유대인 쪽과 이방인 쪽, 가까운 쪽과 먼 쪽을 - 하나로 만들고, 자기 육신으로 적대의 중간 벽을 허물었다.” 그러나 마르키온은 “자기”를 빼 버렸다. “육신으로”를 “적대”라는 말에 붙이려는 것이었다. 마치 육신의 악덕으로 그리스도에게 맞서[지 않]는 적대인 것처럼. 내가 다른 어디에서 말한 적이 있다면, 여기서도 말한다. “마루키니 사람아”가 아니라 “폰토스 사람아”, 그대는 앞에서 그의 피는 고백해 놓고 여기서는 육신을 부정하는가? 그가 계명들의 율법을 선언들로 쓸모없게 했다면 - 물론 율법을 성취함으로써 그렇게 했다. 이제 “음욕을 품고 보지도 말라”고 할 때 “간음하지 말라”는 쓸모없어지기 때문이다. 또 쓸모없어지는 것이 있으니 “욕하지도 말라”고 할 때의 “살인하지 말라”다. 그대는 율법의 조력자를 율법의 적대자로 만들 수 없다. - “둘을 자기 안에서 짓기 위해” - 만들었던 이가 바로 짓는 이다. 앞에서도 이렇게 말한 대로다. “우리는 그가 만든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졌다.” - “한 새 사람으로, 평화를 이루면서” - 참으로 새롭다면 참으로 사람이기도 하니, 환영이 아니다. 그러나 새롭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처녀에게서 새롭게 태어났다는 뜻에서다. - “둘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려고” - 두 족속, 곧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노엽게 했던 하나님과 화해시키려고 - “한 몸 안에서”라고 그는 말한다. “십자가로 그 안에서 적대를 죽이고서.” 그렇다면 여기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몸은 육신이며, 그 몸은 십자가를 겪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가까이 있는 자들에게도 멀리 있는 자들에게도 평화를 전하므로, 우리는 함께 아버지에게 나아감을 얻어 이제 나그네도 외인도 아니고,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집안 사람이다. - 분명히 앞에서 우리가 그에게서 멀어져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보여 준 바로 그 하나님의 집안 사람이다. - 우리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 이단자는 “그리고 예언자들의”를 빼 버렸다. 주가 교회 안에 사도들처럼 예언자들도 세웠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우리의 건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옛 예언자들의 터 위에도 서 있게 될까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 사도 자신은 어디서나 예언자들로 우리를 쌓아 올리기를 그치지 않는데도 그렇다. 그가 그리스도를 맨 위 모퉁잇돌이라고 부른 것을 시편이 가리키는 다음 말에서가 아니라면 어디서 얻었겠는가? “건축자들이 버린 돌, 그것이 모퉁이의 맨 위가 되었다.”

Ecclesiae quidem ueritate epistolam istam ad Ephesios habemus emissam, non ad Laodicenos; sed Marcion et titulum aliquando interpolare gestit, quasi et in isto diligentissimus explorator. nihil autem de titulis interest, cum ad omnes apostolus scripserit dum ad quosdam, certe tamen eum deum praedicans in Christo, cui competunt quae praedicantur. cui ergo competet secundum boni existimationem, quam proposuerit in sacramento uoluntatis suae, in dispensationem adimpletionis temporum - ut ita dixerim, sicut uerbum illud in Graeco sonat - recapitulare - id est ad initium redigere uel ab initio recensere - omnia in Christum, quae in caelis et quae in terris, nisi cuius erunt omnia ab initio, etiam ipsum initium, a quo et tempora et temporum adimple<tio et adimple>tionis dispensatio, ob quam omnia ad initium recensentur in Christo? alterius autem dei quod initium, id est unde, cuius opus nullum? quae tempora sine initio? quae adimpletio sine temporibus? quae dispensatio sine adimpletione? denique quid in terris egit iam olim, ut longa aliqua temporum adimplendorum dispensatio reputetur ad recensenda omnia in Christo, etiam quae in caelis? nec in caelis autem res ab altero actas existimabimus, quaecumque sunt, quam ab eo, a quo et in terris actas omnibus constat. quodsi non capit alterius 'omnia' ista deputari ab initio quam creatoris, quis credet ab alio ea recenseri in Christum alium, et non a suo auctore et in suum Christum? si creatoris sunt, diuersa sint necesse est a diuerso deo; si diuersa, utique contraria. quomodo ergo contraria recenseantur in eum, a quo denique destruuntur? nam et sequentia quem renuntiant Christum, cum dicit: ut simus in laudem gloriae <eius> nos, qui praesperauimus in Christum? qui enim praesperasse potuerunt, id est ante sperasse in deum quam uenisset, nisi Iudaei, quibus Christus praenuntiabatur ab initio? qui ergo praenuntiabatur, ille et praesperabatur. atque adeo hoc ad se, id est ad Iudaeos, refert, ut distinctionem faciat conuersus ad nationes: in quo et uos, cum audissetis sermonem ueritatis, euangelium, in quo credidistis et signati estis spiritu promissionis eius sancto. cuius promissionis? factae per Iohelem: in nouissimis diebus effundam de meo spiritu in omnem carnem, id est et in nationes. ita <et> spiritus et euangelium in eo erit Christo, qui praesperabatur, dum praedicabatur. Sed et 'pater gloriae' ille est, cuius Christus rex gloriae canitur in psalmo ascendens: quis est iste rex gloriae? dominus uirtutum ipse est rex gloriae; ab illo 'spiritus sapientiae' optatur, apud quem haec quoque spiritalium species enumeratur inter septem spiritus per Esaiam; ille dabit 'inluminatos cordis oculos', qui etiam exteriores oculos luce ditauit, cui displicet caecitas populi: et quis caecus nisi pueri mei? et excaecati sunt famuli dei; apud illum sunt et 'diuitiae hereditatis in sanctis'. qui eam hereditatem ex uocatione nationum repromisit: postula de me, et dabo tibi gentes hereditatem tuam; ille 'inoperatus est in Christum ualentiam suam suscitando eum a mortuis et collocando eum ad dexteram suam subiciendo omnia', qui et dixit: sede ad dexteram meam, donec ponam inimicos tuos scabellum pedum tuorum; quia et alibi spiritus ad patrem de filio: omnia subiecisti sub pedibus eius. si ex his alius deus et alius Christus infertur, quae recognoscuntur in creatore, quaeramus iam creatorem. plane, puto, inuenimus, cum dicit illos delictis mortuos, [non] in quibus ingressi erant secundum aeuum mundi huius, secundum principem potestatis aëris, qui operatur in filiis incredulitatis. sed mundum non potest et hic pro deo mundi Marcion interpretari. non enim simile est creatum creatori, factum factori, mundus deo. sed nec princeps potestatis aëris dicetur qui est princeps potestatis saeculorum. numquam enim praeses superiorum de inferioribus notatur, licet et inferiora ipsi deputentur. sed nec incredulitatis operator uideri potest, quam ipse potius et a Iudaeis et a nationibus patitur. sufficit igitur, si haec non cadunt in creatorem. si autem et est, in quem magis competant, utique magis hoc apostolus sciit. quis iste? sine dubio ille, qui ipsi creatori filios incredulitatis obstruit, aëre isto potitus, sicut dicere eum propheta refert: ponam in nubibus thronum meum: ero similis altissimo. hic erit diabolus, quem et alibi, si tamen ita et apostolum legi uolunt, deum aeui huius agnoscemus. ita enim totum saeculum mendacio diuinitatis impleuit. qui plane si non fuisset, tunc haec in creatorem spectasse potuissent. sed et <si> in Iudaismo conuersatus fuerat apostolus, non quia interposuit de delictis: in quibus et nos omnes conuersati sumus, ideo delictorum dominum et principem aëris huius creatorem praestat intellegi, sed quia in Iudaismo unus fuerat de filiis incredulitatis diabolum habens operatorem, cum persequeretur ecclesiam et Christum creatoris, propter quod et: iracundiae filii fuimus, inquit. sed natura, ne, quia filios appellauit Iudaeos creator, argumentetur haereticus dominum irae creatorem. cum enim dicit: fuimus natura filii iracundiae, creatoris autem non natura sunt filii Iudaei, sed adlectione patrum, irae filios ad naturam retulit, non ad creatorem. ad summam subiungens: sicut et ceteri, qui utique filii dei non sunt, apparet communi naturae omnium hominum et delicta et concupiscentias carnis et incredulitatem et iracundiam reputans, diabolo tamen captante naturam, quam et ipse iam <in>fecit delicti semine inlato. Ipsius, inquit, sumus factura, conditi in Christo. aliud est enim facere, aliud condere. sed utrumque uni dedit. homo autem factura creatoris est: idem ergo condidit in Christo, qui et fecit. quantum enim ad substantiam, fecit, quantum ad gratiam, condidit. Inspice et cohaerentia: memores uos, aliquando nationes in carne, qui appellamini praeputiatio ab ea quae dicitur circumcisio in carne manu facta, quod essetis illo in tempore sine Christo, alienati a conuersatione Israhelis et peregrini testamentorum et promissionis eorum spem non habentes et sine deo in mundo. sine quo autem deo fuerunt nationes et sine quo Christo? utique eo, cuius erat conuersatio Israhelis et testamenta et promissio. at nunc, inquit, in Christo uos, qui eratis longe, facti estis prope in sanguine eius. a quibus erant retro longe? a quibus supra dicit: a Christo creatoris, a conuersatione Israhelis, a testamentis, a spe promissionis, a deo ipso. si haec ita sunt, ergo his prope fiunt nunc nationes in Christo, a quibus tunc longe fuerunt. si autem conuersationi Israhelis, quae est in religione dei creatoris, et testamentis et promissioni et ipsi deo eorum proximi sumus facti in Christo, ridiculum satis, si nos alterius dei Christus de longinquo admouit creatori. meminerat apostolus ita praedicatum de nationum uocatione ex longinquo uocandarum: qui longe erant a me adpropinquauerunt iustitiae meae. tam enim iustitia quam et pax creatoris in Christo adnuntiabatur, ut saepe iam ostendimus. itaque ipse est, inquit, pax nostra, qui fecit duo unum - Iudaicum scilicet et gentile, quod prope et quod longe - soluto medio pariete inimicitiae in carne sua. sed Marcion abstulit 'sua', ut inimicitiae daret 'carne', quasi carnali uitio [non] Christo aemulae. sicubi alibi dixi, et hic, non Marrucine, sed Pontice: cuius supra sanguinem confessus es, hic negas carnem? Si legem praeceptorum sententiis uacuam fecit, - adimplendo certe legem; uacat enim iam: non adulterabis, cum dicitur: 'nec uidebis ad concupiscendum', uacat: non occides, cum dicitur: 'nec maledices'; aduersarium legis de adiutore non potes facere - ut duos conderet in semetipso - qui fecerat idem condens, secundum quod et supra: ipsius enim factura sumus conditi in Christo - in unum nouum hominem, faciens pacem - si uere nouum, uere et hominem, non phantasma, nouum autem, ut noue natum ex uirgine dei spiritu - ut reconciliet ambos deo - et deo, quem utrumque genus offenderat, et Iudaicum et gentile - in uno corpore, inquit, cum interfecisset inimicitiam in eo per crucem: ita et hic caro corpus in Christo, quod crucem pati potuit. hoc itaque adnuntiante pacem eis qui prope et eis qui longe, accessum consecuti simul ad patrem iam non sumus peregrini et aduenae, sed conciues sanctorum, sed domestici dei, - utique eius, a quo supra ostendimus alienos fuisse nos et longe constitutos - superaedificati super fundamentum apostolorum. abstulit haereticus: et prophetarum, oblitus dominum posuisse in ecclesia sicut apostolos ita et prophetas, si non timuit, ne et super ueterum prophetarum fundamentum aedificatio nostra constaret in Christo, cum ipse apostolus ubique nos de prophetis exstruere non cesset. unde enim accepit summum angularem dicere Christum, nisi de psalmi significatione: lapis, quem reprobauerunt aedificantes, iste factus est in summo anguli?

18

이단자의 잘라내는 광기에는 놀라지 않는다. 그가 대개 여러 쪽을 통째로 빼 버리는데도 음절 따위를 뺀다면 <그것이 놀랍다>. 그 사도는 모든 이 가운데 가장 나중 된 자신에게 은혜가 주어졌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을 비추어,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 안에 영원부터 감추어져 있던 신비의 경륜이 무엇인지 밝히게 하는 은혜이다. 이단자는 “in”(안에)이라는 전치사를 낚아채어,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에게 영원부터 감추어졌던”으로 읽히게 만든다. 그러나 거짓이 환히 드러난다. 그 사도가 이렇게 이어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함이다.” 그는 누구의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말하는가? 창조주의 것이라면, 저 신이 자기 지혜를 창조주의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는 보이고자 하면서 창조주 자신에게는 보이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체 어찌 된 일인가? 권세들조차 자기 우두머리 없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겠는가? 또는 그가 여기서 하나님을 따로 부르지 않은 것이, 우두머리 자신도 그들 가운데 셈해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그는 신비가 만물을 창조한 이의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감추어졌다고도 선언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우두머리 자신도 그들 가운데 셈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가 그 신비가 그에게 감추어졌다고 말한다면, 그에게 <밝히 드러났>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 신비는 “하나님에게”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주인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었고, 그의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었다. 과연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또는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여기서 붙잡힌 이단자는 아마 말을 바꾸어, 자기 신이 만물의 창조주인 하나님이 알지 못했던 자기 신비의 경륜을 자기 권세들과 통치자들에게 알리고자 했다고 말할 것이다. 또 더 높은 신의 집안 식구들조차 알지 못했는데, 낯설고 먼 거리로 떨어져 갈라져 있는 창조주의 무지를 내세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창조주에게도 그 일이 장차 일어날 것이 알려져 있었다. 아니면 그의 하늘 아래와 그의 땅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던 일이 그에게 분명 알려져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이것으로<도> 우리가 앞에서 세운 논증이 확증된다. 만일 창조주가 언젠가 더 높은 신의 저 감추어진 신비를 알게 될 것이었고 본문이 이렇게 되어 있었다면,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에게 감추어졌던”, 그다음은 이렇게 이어졌어야 했다.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 그에게 알려지게 하려 함이다.” 그러고 나서 어느 신에게 속한 것이든 “또 권세들과 통치자들에게도”라고 이어졌어야 했다. 창조주는 그들과 함께 알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빼낸 것이 분명한데, 그 대목은 그렇게 해도 자기 진리를 온전히 지닌다. 이제 나도 그 사도의 우의들을 두고 그대와 논쟁을 벌이고 싶다. 그대는 예언자들에게는 그런 형식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그가 포로를 사로잡아 끌고 갔다.” 어떤 무기로? 어떤 전투로? 어느 민족을 짓밟고서? 어느 도시를 무너뜨리고서? 그가 승리자로서 어떤 여자들, 어떤 아이들, 또는 어떤 군소 왕들을 사슬에 묶었는가? 사실 다윗의 시에서 그리스도가 “허리에 칼을 찬” 이로 노래되거나, 이사야서에서 “사마리아의 노략물과 다메섹의 힘을 취하는” 이로 노래될 때에도, 그대는 정말로 그를 눈에 보이는 전사로도 두들겨 빚어낸다. 그러므로 이제 그의 무장과 싸움도 영적인 것으로 인정하라. 그대가 이제 영적인 포로가 있음을 배웠다면, 이 포로도 그의 것으로 인정하도록 말이다. 또는 그 사도가 이 포로에 관한 언급도 예언자들에게서 가져왔기 때문에라도 그렇게 하라. 그는 예언자들에게서 다음 명령들도 가져왔다. “거짓을 벗어 버리고 각각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또 “화를 내라, 그러나 죄를 짓지 말라” - 시편이 쓴 바로 그 말로 그 뜻을 풀어내려는 것이다 - “해가 너희 분노 위로 지지 않게 하라”,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 - 실로 “의로운 자와 함께하면 너도 의로울 것이고 비뚤어진 자와 함께하면 너도 비뚤어질 것이다”, 또 “너희 가운데서 악을 없애라”, 또 “그들 가운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주의 기구를 메는 자들아, 너희는 구별되라” -. 이처럼 “수치스러운 포도주에 취하는 것”에 관한 말도 거기서 나왔다. 그곳에서는 거룩한 자들을 취하게 하는 자들이 책망받는다. “너희는 나의 거룩한 자들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 그 포도주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도 성소에 나아갈 때에는 마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시편과 찬송으로 하나님에게 노래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오히려 소고와 비파를 곁들여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이 하나님에게 책망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던 이가 할 일이다. 이처럼 나는 계명들과 그 계명들의 씨앗이나 자라난 형태를 누구에게서 발견하든, 바로 그의 사도로 이 사도를 인정한다. 그런데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무엇으로 확증하는가? 그는 말한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마르키온, 내게 말해 보라. 그대의 신은 창조주의 작품을 근거로 자기 율법에 권위를 세우는가? 이것은 분명 오히려 작은 일이다. 그는 자기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교회에게도 바로 거기에서 그 위상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인 것처럼.” 그가 이렇게 말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육신을 사랑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과 같다.” 그대는 그대의 그리스도와 그대의 교회가 창조주의 작품에 견주어지는 것을 본다. 교회라는 이름 안에서 육신에게 얼마나 큰 영예가 주어지는가! 그는 말한다. “아무도 자기 육신을 미워하지 않고” - 분명 마르키온 한 사람만 빼고 - “도리어 그것을 먹여 기르고 보살핀다. 그리스도가 교회에 그렇게 하듯이.” 그러나 그대가 홀로 육신을 미워하여 그 부활을 빼앗는 <것처럼>, 그대는 교회도 미워해야 할 것이다. 교회도 그리스도에게 마찬가지로 사랑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로 그리스도는 교회처럼 육신도 사랑했다. 신부의 형상까지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간직하고 존중하고 화관을 씌울 것이다. 모양은 실재와 영예를 함께 나눈다. 그 사도 자신이 창조주의 선언을 끌어오고, 더 나아가 풀이하기까지 하는데, 이제 내가 남자와 그리스도, 여자<와> 교회, 육신과 영이 같은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것을 애써 증명해야 하겠는가? “이 여자 때문에 사람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날 것이고, 둘이 한 육신이 될 것이다.” “이 신비가 크다.” 이단자들에게서는 가장 하찮은 신비인 창조주의 이 말들이 그 사도에게서는 큰 신비라면, 지금으로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는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한다.” 그대가 여기서 얻는 것은 신비의 해석이지 신비의 분리가 아니다. 그는 그 <신비>의 예표가, 그 신비가 분명 속해 있던 이에 의해 미리 마련되었음을 보여 준다. 마르키온에게는 어떻게 보이는가? 창조주는 알려지지 않은 신을 위해 예표들을 미리 마련할 수 없었다. 그 신이 알려져 있었다면 적대자를 위해 마련하는 셈이었을 것이기 때문에도 그럴 수 없었다. 더 높은 신은 더 낮은 신에게서, 더구나 멸망시켜야 할 신에게서는 아무것도 빌려 와서는 안 되었다. “자녀들도 부모에게 순종하라.” 사실 - 마르키온이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다”라는 말을 빼 버리기는 했지만 - 율법은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또 “부모들아, 자녀들을 주의 훈육과 꾸짖음으로 양육하라.” 그대가 옛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말해진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것을 너희 자녀들의 귀에 전하고, 너희 자녀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자녀들의 귀에 전할 것이다.” 훈육이 하나라면, 이제 내게 두 신이 무슨 소용인가? 그리고 신이 둘이라면, 나는 먼저 가르친 신을 따르겠다. 그러나 우리의 씨름이 세상 주관자들을 상대로 한다면, 오, 이제 창조주 신들이 얼마나 많은가! 실로 내가 어찌 이 점도 주장하지 않겠는가? 그가 창조주를 가리켰다면, 앞에서 말한 권세들이 그에게 속한 것이었을 테니, 세상 주관자도 하나로만 불렀어야 했다는 점 말이다. 더구나 그는 앞에서는 우리가 마귀의 간계에 맞서 설 수 있도록 무장을 입으라고 명하고, 이제는 마귀에게 덧붙인 것들, 곧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이 마귀의 것임을 보여 준다. 우리도 그것들을 마귀에게 돌린다. 아니면 마귀가 창조주라면, 창조주 쪽에서는 누가 마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신이 둘인 것처럼 마귀도 둘이고, 권세들과 세상 주관자들도 복수로 있는 것인가? 그러나 마귀가 신이면서 마귀인 동일한 존재가 아닌데, 어떻게 창조주가 마귀이면서 하나님인 동일한 존재이겠는가? 실로 둘 다 마귀라면 둘 다 신이기도 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인 이는 마귀가 아니든지 해야 한다. 마귀가 신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나는 ‘마귀’라는 이름 자체가 어떤 중상 때문에 창조주에게 들어맞는지 묻는다. 아마 그는 더 높은 신의 어떤 의도를 중상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 자신이 대천사에게서 당한 일이고, 그것도 거짓말로 당한 일이다. 그는 그들이 신들이 되지 않게 하려고 그 작은 나무의 열매를 맛보는 것을 금한 것이 아니라, 범법으로 말미암아 죽지 않게 하려고 금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하늘에 있는”이라고 덧붙였다고 해서 “악의 영들”이 창조주를 가리키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 사도도 하늘에서 악의 영들, 곧 사람의 딸들에게 걸려 넘어진 천사들의 악의 영들이 활동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모호한 말과 무슨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 창조주를 꼬집는다는 것이 어떻게 될 일인가? 그는 [그로 인해] 선포의 자유 때문에 이미 사슬에 매인 처지에서, 입을 열어 신비를 드러내는 굳센 담대함을 분명 교회에 보여 주고 있었고, 그것을 자기를 위해 하나님에게 구하라고 명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De mania haeretici praecidendi non miror, <miror> si syllabas subtrahit, cum paginas totas plerumque subducit. datam inquit sibi apostolus gratiam nouissimo omnium inluminandi omnes, quae dispensatio sacramenti occulti ab aeuis in deo, qui omnia condidit. rapuit haereticus 'in' praepositionem et ita legi facit: 'occulti ab aeuis deo, qui omnia condidit'. sed emicat falsum. infert enim apostolus: ut nota fiat principatibus et potestatibus in supercaelestibus per ecclesiam multifaria sapientia dei. cuius dicit principatibus et potestatibus? si creatoris, quale est, ut principatibus et potestatibus eius ostendi uoluerit deus ille sapientiam suam, ipsi autem non. quando nec potestates sine suo principe potuissent quid cognoscere? aut si ideo deum non nominauit hic, quasi in illis et princeps ipse reputetur, ergo et occultatum sacramentum principatibus et potestatibus eius, qui omnia condidit, pronuntiasset, proinde in illis deputans ipsum. quod si illi dicit occultatum, illi debebat dixisse manifest<at>um. ergo non 'deo' erat occultatum, sed 'in deo', omnium conditore, occultum autem principatibus et potestatibus eius. quis enim cognouit sensum domini aut quis ei consiliarius fuit? hic captus haereticus fortasse mutabit, uti dicat deum suum suis potestatibus et principatibus notam facere uoluisse dispensationem sui sacramenti, quam ignorasset deus, conditor omnium. et quo competebat praetendere ignorantiam creatoris extranei et longa separatione discreti, cum domestici quoque superioris dei nescissent? tamen et creatori notum erat futurum. an non utique notum quod sub caelo et in terra eius habebat reuelari? ergo <et> ex hoc confirmatur quod supra struximus. si enim creator cogniturus erat quandoque occultum illud dei superioris sacramentum et ita scriptura habebat: 'occulti deo, qui omnia condidit,' sic inferre debuerat: 'ut nota fiat illi multifaria sapientia dei,' tunc: 'et potestatibus et principatibus' cuiuscumque dei, cum quibus sciturus esset creator. adeo subtractum constat quod et sic ueritati suae saluum est. Volo nunc et ego tibi de allegoriis apostoli controuersiam nectere, quas non uis in prophetis habuisse formas: captiuam, inquit, duxit captiuitatem. quibus armis? quibus proeliis? de cuius gentis uastatione? de cuius ciuitatis euersione? quas feminas, quos pueros quosue regulos catenis uictor inseruit? nam et cum apud Dauid Christus canitur 'succinctus gladio super femur' aut apud Esaiam 'spolia accipiens Samariae et uirtutem Damasci'. uere eum et uisibilem extundis proeliatorem. agnosce igitur iam et armaturam et militiam eius spiritalem, si iam didicisti esse captiuitatem spiritalem, ut et hanc illius agnoscas, uel quia et captiuitatis huius mentionem de prophetis apostolus sumpsit, a quibus et mandata: deponentes mendacium loquimini ueritatem ad proximum quisque, et: irascimini et nolite delinquere - ut ipsis uerbis, quibus psalmus, exponeret sensus eius -; sol non occidat super iracundiam uestram; nolite communicare operibus tenebrarum - cum iusto enim iustus eris et cum peruerso peruerteris, et: auferte malum de medio uestrum, et: exite de medio eorum et inmundum ne adtigeritis; separamini, qui fertis uasa domini -. sic et 'inebriari uino dedecore' inde est, ubi sanctorum inebriatores increpantur: et potum dabatis sanctis meis uinum, quod prohibitus erat potare et Aaron et filii eius, cum adirent ad sancta. et psalmis et hymnis deo canerent docere illius est, qui cum tympanis potius et psalteriis uinum bibentes incusari a deo norat. ita cuius inuenio praecepta et semina praeceptorum uel augmenta, eius apostolum agnosco. Ceterum mulieres uiris subiectas esse debere unde confirmat? quia uir, inquit, caput est mulieris. dic mihi, Marcion, de opere creatoris deus tuus legi suae adstruit auctoritatem? hoc iam plane minus est, cum et ipsi Christo suo et ecclesiae eius inde statum sumit: sicut et Christus caput est ecclesiae. similiter et cum dicit: carnem suam diligit qui uxorem suam diligit, sicut et Christus ecclesiam, uides comparari operi creatoris Christum tuum et ecclesiam tuam. quantum honoris carni datur in ecclesiae nomine! Nemo, inquit, carnem suam odio habet, - nisi plane solus Marcion - sed et nutrit et fouet eam, sicut Christus ecclesiam. at tu <ut> eam solus odisti, auferens illi resurrectionem, odisse debebis et ecclesiam, quia proinde diligitur a Christo. at enim Christus amauit et carnem sicut ecclesiam. nemo non diliget imaginem quoque sponsae, immo et seruabit illam et honorabit et coronabit. habet similitudo cum ueritate honoris consortium. laborabo ego nunc eundem deum probare masculi et Christi, mulieris <et> ecclesiae, carnis et spiritus, ipso apostolo sententiam creatoris adhibente, immo et disserente?: propter hanc relinquet homo patrem et matrem, et erunt duo in carne una. sacramentum hoc magnum est. sufficit interim, ista si creatoris magna sunt apud apostolum sacramenta, minima apud haereticos; sed ego autem dico, inquit, in Christum et ecclesiam. habes interpretationem, non separationem sacramenti. ostendit figuram <sacra>menti ab eo praeministratam, cuius erat utique sacramentum. quid uidetur Marcioni? creator quidem ignoto deo figuras praeministrare non potuit, etiam quia aduersario, si noto; deus superior ab inferiore et a destruendo potius mutuari nihil debuit. Obaudiant et parentibus filii: nam - etsi Marcion abstulit: hoc enim est primum in promissione praeceptum - lex loquitur: honora patrem et matrem; et parentes, enutrite filios in disciplina et correptione domini: audisti enim et ueteribus dictum: narrabitis haec in auribus filiorum uestrorum et filii uestri aeque in auribus filiorum suorum. quo iam mihi duos deos, si una est disciplina? et si duo sunt, illum sequar, qui prior docuit. Sed aduersus munditenentes luctatio si nobis, o quanti iam dii creatores! cur enim non et hoc uindicem, unum munditenentem nominari debuisse, si creatorem significabat, cuius essent quas praemisit potestates? porro, cum supra quidem induere nos iubeat armaturam, in qua stemus ad machinationes diaboli, iam ostendit diaboli esse quae diabolo subiungit, potestates et munditenentes tenebrarum istarum, quae et nos diabolo deputamus. aut si diabolus creator est, quis erit diabolus apud creatorem? an sicut duo dii ita et duo diaboli, et pluraliter potestates et munditenentes? sed quomodo creator et diabolus et deus idem, cum diabolus non idem et deus et diabolus? aut enim ambo et dei, si ambo diaboli, aut qui deus, hic non et diabolus, sicut nec diabolus deus. ipsum uocabulum diaboli quaero, ex qua delatura competat creatori. fortasse detulit aliquam dei superioris intentionem, quod ipse ab archangelo passus est, et quidem mentito. non ideo enim interdixerat illius arbusculae gustum, ne dei fierent, sed ne de transgressione morerentur. nec spiritalia autem nequitiae ideo creatorem significabunt, quia. adiecit: in caelis. sciebat enim et apostolus in caelis operata esse spiritalia nequitiae, angelorum scandalizaterum, in filias hominum. et quale erit, ut ambiguitatibus et per aenigmata nescio quae creatorem taxaret qui, in catenis iam constitutus [quo] ob libertatem praedicationis, constantiam manifestandi sacramenti in apertione oris, quam sibi expostulare a deo mandabat, ecclesiae utique praestabat?

19

나는 이단들을 반박하는 항변에서, 모든 이단에 대해 시간의 증언으로 간결한 결론을 내리곤 한다. 우리의 규범이 모든 이단의 뒤늦음보다 앞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제 그 사도도 이것을 입증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에 쌓아 둔 소망에 관하여, 너희는 그것을 복음의 진리의 말씀으로 들었다. 이 복음은 온 세상에도 이른 것처럼 너희에게 이르렀다.” 실로 이미 그때에 복음의 전승이 어디에나 퍼져 있었다면, 지금은 얼마나 더하겠는가? 더 나아가, 어떤 이단의 전승보다도, 하물며 안토니누스 시대 사람 마르키온의 전승보다는 더욱, 어디에나 퍼진 전승이 우리의 것이라면, 사도적 전승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마르키온의 전승은 온 세상을 채운다 해도, 그때조차 자신이 사도적 전승이라고 변호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더라도 사도적 전승은 먼저 세상을 채운 전승, 곧 저 하나님의 복음으로 세상을 채운 전승임이 분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은 그 복음의 선포들에 관하여 이렇게도 노래했다. “그들의 소리가 온 땅에 나갔고 그들의 말이 세상 끝까지 이르렀다.” 사도는 그리스도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아들이 예전부터 누구에게 보였든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곧 아버지의 형상으로서 보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이 구절에서도 보이는 신과 보이지 않는 신의 어떤 차이를 갈라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에 이렇게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를 보고 살 자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창조주의 말씀으로서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난 이가 아니라면, 곧 만물이 그를 통하여 지어졌고 그가 없이는 아무것도 지어지지 않은 그 말씀이 아니라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 그 안에서 창조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그 안에서 창조되지 않았다면 - 이것들은 마르키온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 그 사도는 결코 이토록 꾸밈없이 이렇게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이보다 먼저 있다.” 실로 모든 것보다 먼저가 아니라면, 어떻게 모든 이보다 먼저이겠는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난 이가 아니라면, 창조주의 말씀이 아니라면, 어떻게 모든 것보다 먼저이겠는가? <그런데> 모든 것 뒤에 나타난 이가 모든 이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이 어디에서 입증되겠는가? 있는지조차 몰랐던 이를 누가 먼저 있었다고 알겠는가? 또 그는 어떻게 모든 충만이 자기 안에 거하는 것을 좋게 여겼는가? 먼저, 이 충만이란 무엇인가? 마르키온이 잘라 낸 것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에 창조된 천사들과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저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이는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왕권들과 주권들과 통치자들과 권세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아니면 우리의 거짓 사도들과 유대적 복음 전도자들이 이것들을 제멋대로 끼워 넣은 것이라면, 마르키온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은 자기 신의 충만을 내놓아 보라. 게다가 창조주의 경쟁자요 파괴자인 신이 창조주의 충만이 자기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를 원했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일인가? 끝으로, 그는 자기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어 모든 것을 자기 안에서 누구와 다시 화목하게 하는가? 만물이 노엽게 했던 이, 만물이 범법으로 반역했던 이, 만물이 바로 전까지 속해 있던 이가 아니라면 누구이겠는가? 낯선 이와는 화목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화목하게 되는 것은 자기 주인과일 뿐 다른 이와는 될 수 없다. 이처럼 그는 한때 악한 행실로 멀어지고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우리도 창조주의 은혜 안으로 되돌려 놓는다. 우리는 창조주를 거슬러 피조물을 섬김으로써 그의 노여움을 샀었다. 그런데 그가 어디에서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더라도 - 이를테면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환난의 남은 것을 육신에 채운다고 말한다 - 그렇다고 해서 몸이라는 말을 육신의 실체에서 완전히 떼어 옮기는 것은 아니다. 실로 그는 앞에서도 우리가 그의 몸 안에서 죽음을 통하여 다시 화목하게 된다고 말한다. 물론 그가 죽을 수 있었던 그 몸 안에서다. 그는 교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육신을 통해서 죽었으며, 분명 교회를 위하여 죽었다. 몸을 몸과, 육적인 것을 영적인 것과 맞바꾼 것이다. 그런데 그가 교묘한 말과 철학을 세상의 초등 원리를 따르는 헛된 속임수로 여겨 경계하라고 권고할 때 - 하늘이나 땅을 따른다는 말이 아니라 세속의 학문을 따르고 전통, 곧 교묘하게 말하는 사람들과 철학자들의 전통을 따른다는 말이다 - 이 구절로 모든 이단이 정죄된다는 것을 보이는 일은 물론 길고 다른 저작에 속하는 일이다. 모든 이단은 교묘한 말의 힘과 철학의 규칙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키온은 자기 믿음의 주된 규정이 에피쿠로스 학파에서 왔음을 인정하라. 그는 둔감한 [것이 아닌] 신을 끌어들여 그 신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으려 하고, 스토아학파의 주랑에서 물질을 가져와 창조주 하나님과 나란히 두며, 육신의 부활을 부정한다.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는 어떤 철학도 마찬가지로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의 진리는 그러한 철학의 재간들과 너무나 거리가 멀어서,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킬까 두려워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무에서 내었다고 확신하며, 하나님이 같은 육신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약속하고, 동정녀의 태에서 난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철학자들이 비웃고 이단자들과 이방인들 자신도 비웃는데도 그렇다. 실로 하나님은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했다.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바로 이 자기 경륜을 내다보고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겠다고 미리 위협했던 그 하나님이다. 교묘한 말과 철학에 반대되는 진리의 이 단순함 덕분에, 우리는 어떤 그릇된 것도 생각할 수 없다. 끝으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준다면, 우리는 죄가 그를 거슬러 저질러진 적이 없는 이가, 예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이로서 죄를 용서해 준다고 믿을 수 없다. 자, 이제 그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 그리고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과 관련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고,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다”라고 말할 때, 마르키온,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율법에 관해서는, 그가 여기서도 율법이 어떻게 배제되었는지 가르친다는 점 말고는 이제 다시 논하지 않는다. 곧 율법은 그림자에서 몸으로, 다시 말해 예표들에서 진리로 옮겨지며, 그 진리가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그림자도 그 이의 것이며, 그에게 몸도 속한다. 곧 율법도 그 이의 것이며, <그에게> 그리스도도 속한다. 율법은 한 신에게, 그리스도는 다른 신에게 떼어 주어 보라. 그대가 어떤 그림자를, 그것을 그림자로 드리우는 그 몸에서 분리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스도가 그림자의 몸이라면, 그리스도는 분명 율법에 속한다. 그런데 그가 천사들의 환상을 근거로 음식을 삼가야 한다고 말하던 어떤 이들 - “만지지 말라, 맛보지 말라” - 곧 마음의 겸손 가운데 행하기를 원하면서도 머리를 붙들지 않는 자들을 책망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율법과 모세를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모세가 천사와 관련된 미신에서 어떤 음식들을 금하는 규정을 세우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율법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는 이 규율을 - 그는 “사람의 계명과 가르침을 따라”라고 말한다 - 머리를 붙들지 않는 자들에게 돌렸다. 그 머리는 곧 바로 그이며, 그 안에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으로] 총괄되어 처음으로 되돌려진다. 음식의 구별도 그러하다. 나머지 계명들에 관해서는, 그것들이 같은 것들이므로, 그것들이 얼마나 창조주에게서 흘러나왔는지 이미 다른 곳에서 가르친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창조주는 옛것들이 지나가리라고 선포하며 모든 것을 새롭게 하려 했을 때, 이렇게도 명령함으로써 “너희를 위하여 새 경작지를 새로 일구어라”, 이미 그때에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Soleo in praescriptione aduersus haeresis: omnes de testimonio temporum compendium figere, priorem uindicans regulam nostram omni haeretica posteritate. hoc nunc probabit et apostolus dicens: de spe reposita in caelis quam audistis in sermone ueritatis euangelii, quod peruenit ad uos sicut et in totum mundum. nam si iam tunc traditio euangelica ubique manauerat, quanto magis nunc? porro, si nostra est quae ubique manauit, magis quam omnis haeretica, nedum Antoniniani Marcionis, nostra erit apostolica. Marcionis autem cum totum impleuerit mundum, ne tunc quidem se defendere poterit de apostolica. eam enim et sic constabit esse, quae prior mundum repleuit, illius scilicet dei euangelio, qui et hoc cecinit de praedicationibus eius: in omnem terram exiit sonus eorum et in terminos orbis uerba eorum. Inuisibilis dei imaginem ait Christum. sed nos enim inuisibilem dicimus patrem Christi, scientes filium semper retro uisum, si quibus uisus est, in dei nomine, ut imaginem ipsius; ne quam et hinc differentiam scindat dei uisibilis et inuisibilis, cum olim dei nostri sit definitio: dominum nemo uidebit et uiuet. Si non est Christus primogenitus conditionis, ut sermo creatoris, per quem omnia facta sunt et sine quo nihil factum est, si non in illo condita sunt uniuersa in caelis et in terris, uisibilia et inuisibilia, siue throni siue dominationes siue principatus siue potestates, si non cuncta per illum et in illo sunt condita, - haec enim Marcioni displicere oportebant - non utique tam nude posuisset apostolus: et ipse est ante omnes. quomodo enim ante omnes, si non ante omnia? quomodo ante omnia, si non primogenitus conditionis, si non sermo creatoris? unde <autem> ante omnes probabitur fuisse qui post omnia apparuit? quis scit priorem fuisse quem esse nesciit? Quomodo item boni duxit omnem plenitudinem in semetipso habitare? primo enim, quae est ista plenitudo, nisi ex illis, quae Marcion detraxit, conditis in Christo in caelis et in terris, angelis et hominibus, nisi ex illis inuisibilibus et uisibilibus: nisi ex thronis et dominationibus et principatibus et potestatibus? aut si haec pseudoapostoli nostri et Iudaici euangelizatores de suo intulerint, edat plenitudinem dei sui Marcion, qui nihil condidit. ceterum quale est, ut plenitudinem creatoris aemulus et destructor eius in suo Christo habitare uoluerit? cui denique reconciliat omnia in semetipsum, pacem faciens per crucis suae sanguinem, nisi quem offenderant uniuersa, aduersus quem rebellauerant per transgressionem, cuius nouissime fuerant? conciliari enim extraneo possent. reconciliari uero non alii quam suo. Ita et nos quondam alienatos et inimicos sensu in malis operibus creatori redigit in gratiam, cuius admiseramus offensam colentes conditionem aduersus creatorem. sicubi autem et ecclesiam corpus Christi dicit esse - ut hic ait adimplere se reliqua pressurarum Christi in carne pro corpore eius, quod est ecclesia -, non propterea et in totum mentionem corporis transferens a substantia carnis. nam et supra reconciliari nos ait in corpore eius per mortem. utique in eo corpore, in quo mori potuit, per carnem mortuus et non per ecclesiam, plane propter ecclesiam corpus commutando pro corpore, carnale pro spiritali. At cum monet cauendum a subtililoquentia et philosophia, ut inani seductione, quae sit secundum elementa mundi, - non secundum caelum aut terram dicens, sed secundum litteras saeculares et secundum traditionem, scilicet hominum subtililoquorum et philosophorum - longum est quidem et alterius operis ostendere hac sententia omnes haereses damnari, quod omnes ex subtililoquentiae uiribus et philosophiae regulis constent, sed Marcion principalem suae fidei terminum de Epicuri schola agnoscat, deum inferens [nec] hebetem, ne timeri eum dicat, collocans et cum deo creatore materiam de porticu Stoicorum, negans carnis resurrectionem, de qua proinde nulla philosophia consentit. cuius ingeniis tam longe abest ueritas nostra, ut et iram dei excitare formidet et omnia illum ex nihilo protulisse confidat et carnem eandem restituturum repromittat, et Christum ex uulua uirginis natum non erubescat, ridentibus philosophis, et haereticis et ethnicis ipsis. stulta enim mundi elegit deus, ut confundat sapientes, ille sine dubio, qui ex respectu huius suae dispositionis perditurum se sapientiam sapientium praeminabatur. hac simplicitate ueritatis contraria subtililoquentiae et philosophiae nihil peruersi possumus sapere. Denique si nos deus cum Christo uiuificat donans delicta nobis, non possumus credere ab eo donari delicta, in quem admissa non fuerint, ut retro ignotum. Age iam, cum dicit: nemo uos iudicet in cibo et potu et in parte diei festi et neomeniae et sabbati, quae est umbra futurorum, corpus autem Christi, quid tibi uidetur, Marcion? de lege iam non retractamus, nisi quod et hic quemadmodum exclusa sit, edocet, dum scilicet de umbra transfertur in corpus, id est de figuris ad ueritatem, quod est Christus. ergo et umbra eius, cuius et corpus, id est et lex eius, <cuius> et Christus. segrega alii deo legem et alii deo Christum, si potes aliquam umbram ab eo corpore, cuius umbra est, separare. manifeste legis est Christus, si corpus est umbrae. Si autem et aliquos taxat, qui ex uisionibus angelicis dicebant cibis abstinendum - ne attigeris, ne gustaueris - uolentes in humilitate sensus incedere, non tenentes caput, non ideo legem et Moysen pulsat, quasi de angelica superstitione constituerit interdictionem quorundam edulium. Moysen enim a deo accepisse legem constat. denique hanc disciplinam - secundum praecepta, inquit, et doctrinam hominum - deputauit in eos, qui caput non tenerent, id est ipsum, in quo omnia recensentur [in Christum] ad initium reuocata, etiam differentia escarum. cetera praeceptorum, ut eadem, satis sit iam alibi docuisse quam a creatore manarint, qui, cum uetera praedicaret transitura noua facturus uniuersa, mandans etiam: nouate uobis nouamen nouum, iam tum docebat exponere ueterem hominem et nouum induere.

20

그 사도가 선포의 다양함을 열거하면서, 어떤 이들은 그의 매임으로 확신을 얻어 더욱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고, 어떤 이들은 시기와 다툼으로, 또 어떤 이들은 말솜씨에 대한 평판을 얻으려고, 많은 이들은 사랑으로, 몇몇은 질투로, 또 어떤 이들은 반목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한다고 할 때, 적어도 여기에는 마음가짐의 이토록 큰 다양함까지 낳았을 견해의 차이를 이유로 선포 자체를 책망할 자리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다양함 속에서 마음가짐의 동기들만 제시하고 신비들의 규범은 제시하지 않으며, 어떤 의도로 선포되든 그리스도는 하나이고 그의 하나님도 하나임을 확증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가 구실로 전해지든 진실로 전해지든 나와는 상관없다”고 말한다. 구실에서 나왔든 믿음의 진실에서 나왔든, 전해지던 그리스도는 하나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진실”을 언급할 때 그것을 선포의 믿음에 연결했지 규범 자체의 진실에 연결하지 않았다. 규범은 분명 하나였으나, 믿음은 선포하는 자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의 믿음은 참되었으니 곧 단순했고, 어떤 이들의 믿음은 지나치게 학식을 내세웠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선포된 그리스도는 언제나 전해지던 바로 그 그리스도였음이 분명하다. 만일 그 사도가 전혀 다른 그리스도를 도입하고 있었다면, 사안의 새로움이 차이를 낳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에도 복음의 선포를 그래도 창조주의 그리스도에 관한 것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어느 곳에서나 이단의 견해보다 우리 견해를 따르는 이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사도도 여기서 그 차이를 지적하고 꾸짖는 일에 침묵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차이가 책망조차 받지 않으므로, 새로움은 입증되지 않는다. 물론 마르키온파는 여기서도 그리스도의 실체에 관해, 곧 그리스도 안에 있던 것은 육신의 환영이었다는 점에서 그 사도가 자기들 편을 든다고 생각한다. 그가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체로 있으면서 하나님과 동등해지는 것을 강탈로 여기지 않고, 종의 형체를 취하여 자기를 비웠는데 그 실재를 취한 것은 아니었고, 사람의 모양 안에 있었으나 사람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모습으로 사람으로 발견되었으나 실체로, 곧 육신으로 발견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마치 모습과 모양과 형체가 실체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 사도가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된 일이다. 그렇다면 그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체 안에 두는 여기서도, 그리스도가 사람의 형체로 있으면서 참으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리스도는 마찬가지로 참으로 하나님도 아니겠는가? 형체와 모양과 모습이 환영의 것으로 돌려진다면, 양쪽 모두에서 실재가 배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형체와 형상 안에서 참으로 하나님이라면, 사람의 아들로서 사람의 형체와 형상 안에서도 참으로 사람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이 이미 판가름 났다. 그가 “발견되었다”라는 말을 쓴 데에도 까닭이 있으니, 곧 그가 더없이 확실하게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발견되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가 능력으로 하나님으로 발견된 것<처럼> 육신으로 사람으로도 발견되었다. 그 사도는 죽을 실체 안에 있지 않은 이를 두고 “죽음에 복종하게 되었다”고 선언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십자가의 죽음까지”라고 덧붙인 것은 더 큰 의미가 있다. 그 고투를 겪기보다 오히려 빠져나가고 수난에서 능력을 다한 것이 아니라 흉내를 낸 환영 <안에서> 그 고투가 상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다면, 그는 그 고투의 격렬함을 높여 가며 참혹함을 과장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예전에 유익으로 여겼던 것들은 무엇인가? 그가 앞에서 열거하는 것들, 곧 할례의 표에 있는 육신의 영광, 히브리인에게서 난 히브리 혈통이라는 신분, 베냐민 지파라는 칭호, 바리새파의 흰 옷이 주는 위엄이다. 이제 그는 이것들을 자기에게 손실로 여긴다. 그가 손실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우둔함이다. 그가 이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기까지 한다 해도, 그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비교해서이지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해서가 아니다. 그는 이제 율법에서 난 자기의 의가 아니라, 그를 통해, 곧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게서 난 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구분에 따르면 율법은 그리스도의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라고 그대는 말한다. 꽤 정교하다. 그러면 더 정교한 답을 들어 보라. 그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난 것”이라고 말할 때, 율법이 속한 이 말고 다른 이를 두고서는 “그를 통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한다. 나는 창조주가 아브라함에게 한 옛 약속을 알아본다. “내가 네 씨를 하늘의 별들처럼 되게 하리라.” 그래서 또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와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과 같은 형태로 변화시킬 것이라면, 고난 속에서 낮아지고 죽음의 법 자체에 따라 땅에 내던져진 우리의 이 몸이 그러므로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 몸이 전혀 없다면 어떻게 변화되겠는가? 또 만일 이 말이 주가 올 때 아직 육신 안에서 발견되어 변화를 겪게 될 이들에 대해 한 것이라면, “먼저 일어날 자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들에게는 변화될 바탕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 주를 맞이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들과 함께 들려 올라간 것이라면, 분명 그들과 함께 변화되기도 한 것이다.

Cum praedicationis enumerat uarietatem, quod alii ex fiducia uinculorum eius audentius sermonem enuntiarent, alii per inuidiam et contentionem, quidam uero et per sermonis existimationem, plerique ex dilectione, nonnulli ex aemulatione, iam aliqui et ex simultate Christum praedicarent, erat utique uel hic locus taxandae ipsius praedicationis de diuersitate sententiae, quae tantam efficeret etiam animorum uarietatem. sed causas solas animorum, non regulas sacramentorum in diuersitate proponens, unum tamen Christum et unum eius deum quocumque consilio praedicatum confirmat et ideo: nihil mea, inquit, siue causatione siue ueritate Christus adnuntietur, quia unus adnuntiabatur siue ex causatione siue ex ueritate fidei. ad fidem enim praedicationis retulit mentionem ueritatis, non ad regulae ipsius, quia una quidem erat regula, sed fides praedicantium. quorundam uera, id est simplex, quorundam nimis docta. quod cum ita sit, apparet eum Christum praedicatum, qui semper adnuntiabatur. nam si alius longe ab apostolo induceretur, fecisset diuersitatem nouitas rei. nec enim defuissent qui praedicationem euangelicam nihilominus in Christum creatoris interpretarentur, cum et hodie maior pars sit omnibus in locis sententiae nostrae quam haereticae. quo nec hic apostolus de diuersitatis denotatione et increpatione tacuisset. ita, cum diuersitas ne taxatur quidem, nouitas non probatur. Plane de substantia Christi putant et hic Marcionitae suffragari sibi apostolum, quod phantasma carnis fuerit in Christo, cum dicit quod in effigie dei constitutus. non rapinam existimauit pariari deo, sed exhausit semetipsum accepta effigie serui, non ueritate, et in similitudine hominis, non in homine, et figura inuentus homo, non substantia, id est non carne. quasi non et figura et similitudo et effigies substantiae quoque accedant. bene autem, quod et alibi Christum imaginem dei inuisibilis appellat. numquid ergo et hic, qua in effigie eum dei collocat, aeque non erit deus Christus uere, si nec homo uere fuit in effigie hominis constitutus? utrobique enim ueritas necesse habebit excludi, si effigies et similitudo et figura phantasmati uindicabuntur. quodsi in effigie et in imagine <dei,> qua filius patris, uere deus, praeiudicatum est etiam in effigie et imagine hominis, qua filius hominis, uere hominem inuentum. nam et 'inuentum' ratione posuit, id est certissime hominem. quod enim inuenitur, constat esse. sic<ut> et deus inuentus est per uirtutem, sic et homo per carnem, quia nec 'morti subditum' pronuntiasset non in substantia mortali constitutum. plus est autem, quod adiecit: et mortem crucis. non enim exaggeraret atrocitatem extollendo uirtutem colluctationis, quam imaginariam <in> phantasmate scisset, frustrato potius eam quam experto nec uirtute functo in passione sed lusu. Quae autem retro lucri duxerat? quae et supra numerat: gloriam carnis in nota circumcisionis, generis Hebraei ex Hebraeo censum, titulum tribus Beniamin, Pharisaeae candidae dignitatem. haec nunc detrimento sibi deputat: non deum, sed stuporem Iudaeorum. haec et si stercora existimat, prae comparatione agnitionis Christi, non prae reiectione dei creatoris, habens iustitiam non suam iam, quae ex lege, sed quae per ipsum, scilicet per Christum, ex deo. 'ergo,' inquis, 'hac distinctione lex non ex deo erat Christi.' subtiliter satis. accipe itaque subtilius. cum enim dicit: non quae ex lege, sed quae per ipsum, non dixisset 'per ipsum' de alio, quam cuius fuit lex. Noster, inquit, municipatus in caelis. agnosco ueterem ad Abraham promissionem creatoris: et faciam semen tuum tamquam stellas in caelo. ideo et stella a stella differt in gloria. quodsi Christus adueniens de caelis transfigurabit corpus humilitatis nostrae conformale corpori gloriae suae, resurget ergo corpus hoc nostrum, quod humiliatur in passionibus, et in ipsa lege mortis in terram deiectum. quomodo enim transfigurabitur, si nullum erit? aut si de eis dictum, qui in aduentu domini deprehensi in carne demutare habebunt, quid facient 'qui primi resurgent'? non habebunt de quo transfigurentur? atquin cum illis, dicit, simul rapiemur in nubibus obuiam domino. si cum illis sublati, utique cum illis et transfigur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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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만은 짧았던 덕분에 마르키온의 위조하는 손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한 사람에게 쓴 이 편지는 받아들였으면서, 교회의 질서에 관해 디모데에게 쓴 두 편지와 디도에게 쓴 한 편지는 거부했다는 것이 나는 놀랍다. 내 생각에 그는 편지의 수까지 변조하려 했던 것 같다. 독자여, 기억하라. 우리는 앞에서 이미 다룬 것들을 그 사도에게서도 입증했고, 이 책으로 미루어 두었던 것이 있으면 그것을 매듭지었다. 이는 여기서는 우리가 이전의 논점을 확증하려고 되풀이한 것을 쓸데없다고 여기거나, 저기서는 우리가 이것들을 제때에 밝혀내려고 미룬 것을 의심스럽게 여기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이 작은 저작 전체를 살펴본다면, 여기가 군더더기라고도, 저기가 자신 없었다고도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Soli huic epistolae breuitas sua profuit, ut falsarias manus Marcionis euaderet. miror tamen, cum ad unum hominem litteras factas receperit, quod ad Timotheum duas et unam ad Titum de ecclesiastico statu compositas recusauerit. adfectauit, opinor, etiam numerum epistolarum interpolare. Memento, inspector, quod ea, quae praetractata sunt retro, de apostolo quoque probauerimus, et si qua in hoc opus dilata erant expunxerimus, ne aut hic superuacuam existimes iterationem, qua confirmauimus rem pristinam, aut illic suspectam habeas dilationem, qua eruimus tempori ista. si totum opusculum inspexeris, nec hic redundantiam nec illic diffidentiam iudicabis.

번역 메모
  1. 1 본문으로

    1.1 status는 사물이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를 가리키므로 ‘존재 상태’로, retractatus는 이미 다룬 사물을 다시 따져 보는 일이므로 ‘다시 검토할 때’로 옮겼다. 기원을 알아야 존재를 확신하고, 존재를 확신해야 본질과 성질을 분별한다는 순서가 이 장 전체의 논증 틀이다.

    1.2 ‘복음서의 사도 명단’은 누가복음 6:13-16의 열두 사도 명단을 가리킨다. 마르키온의 복음서도 누가복음을 바탕으로 하므로 바울은 이 명단에 없다. dignissime를 Kroymann은 apparatus에서 summo iure(전적인 권리로)로 풀이하며, 이에 따라 ‘마땅한 권리에 따라’로 옮겼다.

    1.3 바울이 그리스도의 승천 뒤에 부름받은 일은 사도행전 9:1-9에 나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여기서 아직 바울의 기원을 모르는 ‘새 제자’의 입장으로 말하며, 이 반론은 1.10에서 밝히듯 의도적으로 취한 역할이다. sciit는 Kroymann의 교정이다(M과 R1은 scit, R3는 sciuit). quiescente는 M과 R3의 독법이며 R1은 quiescentem이다.

    1.4 마르키온은 폰토스(시노페) 출신의 선주였다. 이 문장은 해운 용어로 이루어져 있다. symbolum은 화물을 맡을 때 주고받는 증표, tituli character는 화물에 찍는 표지, imponere는 배에 싣는 일, exponere는 화물을 하역하여 내놓는 일을 가리킨다. auertere와 adulterare는 화물을 빼돌리고 변조하는 일로, 마르키온이 성경 본문을 잘라 내고 고친 일을 암시한다. numquam은 M의 독법이며 R과 이전 판본들은 nullum을 읽는다.

    1.5 인용은 갈라디아서 1:1이다. Kroymann은 이전 판본들과 달리 ne illius probetur에서 새 문장을 시작하고 사본의 protulerit를 protulit로 고쳤다. illius qui omnia apostolatus eius instrumenta protulit는 바울의 사도직을 뒷받침하는 문서(창세기와 사도행전)를 내놓은 창조주를 가리키며, 말하는 주어는 마르키온이다.

    1.7 scribere, subscribere, obsignare, actis referre는 공문서를 작성하고 서명하고 봉인하고 관청 기록에 올리는 로마의 법적 절차를 가리킨다. professio(공언)는 호구 조사 등에서 하는 법적 신고이기도 하므로 professor를 ‘공언자’로 옮겼다.

    1.8 누가복음 21:8. 개역개정은 “내가 그라”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본문은 마태복음 24:5처럼 ego sum Christus(내가 그리스도다)로 되어 있다.

    1.11 Kroymann은 Engelbrecht의 추정에 따라 sit Christus, sit et apostolus로 읽고(사본 MR: sit et Christus, sic apostolus), 사본의 ut 대신 nunc을 넣었다. alterius는 마르키온의 다른 신을 가리키므로 ‘다른 신의’로 옮겼다.

    1.12 창세기 49:27의 야곱의 축복을 가리킨다. Kroymann은 apparatus에서 figuras를 figuratas로 읽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direxisset는 M의 독법이며 R은 dixisset이다.

    1.13 창세기 49:27. 개역개정은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눈다는 뜻으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고대 라틴어 본문은 ad matutinum comedet adhuc et ad uesperam dabit escam(아침에는 아직 먹고 저녁에는 먹이를 줄 것이다)이다. 그는 ‘먹이를 준다’를 바울의 교사 활동으로 읽는다.

    1.14 바울이 베냐민 지파 출신이라는 점은 로마서 11:1과 빌립보서 3:5에 나온다. ‘이방인들의 교사’(doctor nationum)는 디모데전서 2:7의 표현과 같다. 원문의 ecclesiaium은 ecclesiarum의 인쇄 오류로 보고 ‘교회들의’로 옮겼다.

    1.15 사울 왕이 다윗을 쫓다가 다윗에게 목숨을 건짐받고 자기는 악으로 갚았는데 다윗은 선으로 갚았다고 고백한 일은 사무엘상 24:16-21과 26:21에 나온다. recipientis는 Saulis에 걸리므로, 악을 행하고도 선으로 갚음을 받은 쪽은 사울이다. 사울 왕도 베냐민 지파였고(사무엘상 9:1-2), 바울의 히브리 이름도 사울이다(사도행전 13:9). ‘동정녀의 혈통으로’(secundum uirginis censum)는 마리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테르툴리아누스의 견해를 전제한다.

    1.16 사도행전에 대한 언급이다. 마르키온은 사도행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2.24 참조). ordo는 바울이 박해자에서 사도가 되기까지의 경과를 가리키므로 ‘이력’으로 옮겼다.

    1.17 갈라디아서 1:1의 표현(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을 통한 것도 아닌)을 사도행전 9:1-9의 다메섹 사건과 연결한다.

    1.22 de meo는 apparatus에 따르면 de meo instrumento, 곧 테르툴리아누스가 받아들이는 문서인 사도행전을 가리킨다. quam meum apostolum quam et Christum은 테르툴리아누스가 흔히 쓰는 quam-quam(=tam-quam) 구문이므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똑같이 내 것이다’로 옮겼다. R3와 이전 판본들은 tam meum으로 읽는다.

    1.23 ‘같은 전선’과 ‘자리’(gradus)는 검투나 전투의 용어이며, praescriptio는 소송에서 본안 심리 전에 상대의 청구 자격을 막는 법적 항변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4권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펼친 것과 같은 논증을 바울에게 적용한다.

    1.24 a creatore는 R3의 독법이며 M과 R1은 ad creatorem을 읽는다. Kroymann은 a creatore를 택했다.

    1.26 [그러면]은 Rhenanus의 셋째 판(R3)이 삭제한 at이다. Kroymann은 이 단어를 본문에 두되 괄호로 묶었다.

    1.27 마르키온의 사도서(Apostolikon)는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로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라오디게아인들에게』(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의 열 편지로 이루어졌고,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들어 있지 않다(21장 참조). ‘수에서까지 훼손되었다’는 이 편지들의 수를 줄인 일을, ‘이단의 복음서가 지닌 형태’는 4권에서 다룬, 마르키온이 누가복음을 잘라 낸 복음서를 가리킨다.

  2. 2 본문으로

    2.1 Kroymann 판은 이 문장 앞에 Ad Galatas(갈라디아서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둔다. M 사본은 INCIPIT AD GALATAS로, R은 de epistola ad Galatas로 표시한다. 마르키온의 사도서는 갈라디아서를 첫 편지로 두었다.

    2.2 ‘새롭게 함’에 대한 예언은 이사야 43:18-19, 65:17을 가리키며, 고린도후서 5:17이 이를 반영한다. dispositio는 창조주가 정해 둔 구원의 질서를 가리키므로 ‘경륜’으로 옮겼다. amplectimur는 R3의 독법이며 M과 R1은 et amplectimur이다. amolitionem은 M의 독법이며 R은 abolitionem이다.

    2.3 사본 MR은 distinctionis로 읽으며, Kroymann은 이를 distinx<it decess>ionis로 보충하여 동사와 명사를 갖추었다(Engelbrecht는 distin<xit destru>ctionis를 제안했다). 보충된 부분을 <물러남의>로 표시했고, ‘구분하여’는 사본에 남은 distinx-에 해당한다. ‘율법과 예언자들은 요한까지다’는 누가복음 16:16이다. 개역개정은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로 옮긴다. Kroymann은 끝의 decessura 뒤에 <et noua oritura>(새것들이 일어나리라는 것도)를 보충할 가능성을 apparatus에서 제시한다.

    2.4 praesumptio와 praesumere는 미리 품은 판단을 가리키므로 ‘선입견’, ‘미리 여겼다’로 옮겼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율법 준수를 유지하려 한 일은 갈라디아서 3:1-5와 4:9-11, 5:2-4에 나온다.

    2.7 status quaestionis는 수사학에서 논쟁의 핵심 쟁점을 가리키는 용어이므로 ‘쟁점’으로 옮겼다.

    2.9 decessionem은 MR의 독법이며 Gelenius와 이후 판본들은 discessionem(떠남)을 읽는다.

    2.11 갈라디아서 1:6. 개역개정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인용에는 ‘그리스도의’가 없고 in gratiam(은혜로)만 있다. miror는 R3의 독법이며 MR1은 mirari를 읽는다. Kroymann은 euocare 대신 auocare를 읽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2.12 테르툴리아누스의 논지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마르키온의 신을 섬기다가 창조주에게로 돌아간 것이 아니므로 ‘다른 복음으로 옮겨 감’이 신을 바꾼 일일 수 없다는 것이다.

    2.13 갈라디아서 1:7(“다른 복음은 없나니”).

    2.14 이사야 40:9. 개역개정은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로 옮긴다. 라틴어 euangelizare가 euangelium(복음)과 같은 말이라는 점이 논증의 근거이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옮겼다. si enim은 MR의 독법이며 Oehler는 sed enim을 제안했다.

    2.15 이사야 52:7(로마서 10:15 참조). 개역개정은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tempestiui(때맞춘)로 되어 있다. ‘물론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다’는 인용이 아니라 테르툴리아누스의 해설이다.

    2.16 이사야 42:4의 칠십인역 본문을 따른 인용이며 마태복음 12:21(“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과 같다. 개역개정 이사야 42:4는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이다. Christi는 R3의 독법이며 MR1은 Christus를 읽는다.

    2.17 “내가 너를 이방인들의 빛으로 삼았다”는 이사야 49:6이다. Kroymann은 Engelbrecht를 따라 nationum 뒤에 마침표 대신 쉼표를 두어, est autem euangelium etiam dei noui ... defensum을 2.14에서 시작한 조건절의 일부로 읽는다. 이에 따라 ‘새로운 신의 복음도 있고 ... 변호한 것이라면’으로 옮겼다. potius demonstraret는 apparatus의 풀이대로 ‘더 나은 것으로 내보이다’로 옮겼다.

    2.18 갈라디아서 1:8. 마르키온파의 해석은 이 저주가 창조주와 그의 천사가 전할 복음을 겨냥한다는 것이다. hinc fugias는 M의 어순이며 R과 이전 판본들은 fugias hinc이다.

    2.19 Kroymann은 duo enim의 enim을 삭제할 가능성을 apparatus에서 제시한다.

    2.20 갈라디아서 1:8. tamen은 apparatus의 풀이(dagegen)에 따라 앞의 마르키온파 해석과 대비하는 ‘오히려’로 옮겼다. 바울이 천사보다 먼저 ‘우리’를 내세운다는 점이 논증의 근거다.

    2.22 [사도도 믿어서는 안 되니]는 Kroymann이 괄호로 묶은 et nec apostolo이다. R3와 이전 판본들은 nec apostolo를 본문으로 읽는다. <뜻에서가>는 Kroymann이 보충한 quo에 해당한다.

    2.23 이 단락은 갈라디아서 1:11-24의 회심 기사와 2:4의 거짓 형제들에 관한 언급을 사도행전 15:1, 5, 10, 28과 연결한다. ‘조상들 자신도 감당할 수 없었던 짐’은 사도행전 15:10의 표현이다. 원문의 scripturam Apostolicorum은 사도행전을 가리키며, Pamelius는 <actorum> Apostolicorum으로 보충했다. ex auctoritate spiritus의 spiritus는 ‘영’으로 옮겼다(사도행전 15:28 “성령과 우리는”).

    2.24 마르키온은 사도행전을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령의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누가복음 24:49와 사도행전 1:4-5의 약속이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에서 성취된 일을 가리킨다. ‘율법을 버리도록 가르치는 방식’(forma dedocendae legis)은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 결정과 갈라디아서 2:1-10에서 바울이 예루살렘 사도들과 합의한 일을 가리킨다. respuatis는 2인칭 복수이므로 ‘그대들’로 옮겼다. Kroymann은 quando nec 앞에 탈문이 있을 가능성을 apparatus에서 제시하며 <satis quidem imprudenter,>(참으로 어리석게도)를 보충안으로 든다.

  3. 3 본문으로

    3.1 갈라디아서 2:1-2. 바울이 “계시를 따라” 올라갔다는 대목 대신 테르툴리아누스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의 후원(patrocinium)을 얻으려고 올라갔다고 풀어 쓴다. citra formam illorum은 ‘그들의 형식에 못 미치게’로 옮겼다.

    3.2 quos는 Latinius의 추정이고 사본(MR)은 quod이다. si quando(‘언제든 그럴 수 있다면’)는 강조로 보아 ‘누구보다도’로 옮겼다. Junius는 uult is(‘그(바울)가 원한다’)로 고쳐 읽었고 Engelbrecht가 이를 지지했다.

    3.3 갈라디아서 2:3-4. superinducticios는 Pamelius의 교정이며 사본은 superducticios이다. 개역개정은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다. 마르키온은 유대주의자들이 복음을 변조했다고 주장했으나,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거짓 형제들이 성경을 변조한 것이 아니라 옛 규율을 고수했을 뿐이라고 반박한다.

    3.4 갈라디아서 2:4-5. †: 전승 본문은 nec ad horam cessimus subiectioni(‘한시도 굴복하여 양보하지 않았다’)이고 그대로 옮겼다. 3.5-3.10의 논증은 테르툴리아누스가 자기 사본에서 부정어 없이 ad horam cessimus(‘잠시 양보했다’)로 읽었고 nec를 마르키온의 첨가로 판단했음을 보여 준다. Kroymann은 그 대조가 탈락했다고 보아 seruituti, <ad horam cessimus subiectioni, non, ut mauult Marcion:> nec ad horam ...으로 복원하기를 제안한다. 그리스어 사본 대다수는 부정어 οἷς οὐδέ를 가지지만 클라로몬타누스 사본(D)의 첫 손과 이레나이우스의 라틴역 등 일부 서방 전승은 부정어 없이 읽는다.

    3.5 uitiatio scripturae는 마르키온의 본문 변경, 곧 nec의 첨가를 가리킨다. Kroymann은 이 문장으로 보아 테르툴리아누스가 앞에서 마르키온이 사도의 말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이미 말했으리라고 추론한다.

    3.6 갈라디아서 2:3. 개역개정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3.7 ‘반대되는 행동’(contrarium factum)은 디도에게 할례를 강요받지 않은 일과 반대되는 일, 곧 거짓 형제들 때문에 잠시 양보한 일을 가리킨다. [nec ostendisset]은 Kroymann이 삭제 대상으로 표시한 말이다.

    3.8 Ursinus는 cessissent<ne> subiectioni? opinor(‘양보했겠는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로 읽었으나 Kroymann은 사본대로 non opinor를 유지한다.

    3.10 갈라디아서 2:2, 2:9. <헛되이>는 Rhenanus의 셋째 판(R3)이 보충한 in을 옮긴 것이며(M과 R1에는 없다), <동의>는 사본의 censu를 Kroymann이 c<ons>ensu로 고친 것이다. libertatem은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ueritatem(‘진리’)이다.

    3.11 디모데의 할례는 사도행전 16:3, 서원하여 머리를 깎은 자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간 일은 사도행전 21:23-26. 바울의 고백은 고린도전서 9:20, 22. ‘그렇게 저 몰래 들어온 자들 때문에도 그리했다’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 사이에 끼워 넣은 말이다. eduntur는 Kroymann의 추정이며 M과 R1은 educuntur, R3와 이전 판본들은 edicuntur이다.

    3.12 첫 문장 si haec quoque intellegi ex hoc postulant는 독립된 조건절로 전해져 의미가 불분명하다. 앞 문장에 이어 ‘이 일들(디모데의 할례와 성전 출입)도 같은 원리로 이해해야 한다면’이라는 뜻으로 보아 직역했다.

    3.13 갈라디아서 2:9-10. 개역개정은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의 순서이고 테르툴리아누스는 베드로를 먼저 든다.

    3.14 제4권에서 마르키온의 복음서를 검토하며 누가복음 6:20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를 창조주의 율법과 예언자들에 비추어 다룬 대목(제4권 14장)을 가리킨다.

    3.16 갈라디아서 2:14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마르키온파가 베드로와 바울의 대립을 근거로 내세우는 반론을 인용한 것이다.

    3.17 갈라디아서 2:11-12, 2:14, 2:16. diuersitatem은 Kroymann의 추정이고 사본은 peruersitatem(‘왜곡’)이다. 사본의 credi.를 Kroymann이 credi<disset.>로 보충했고, 보충된 어미를 ‘믿<었더라면>’으로 옮겼다. eius dumtamen도 Kroymann의 추정이며 사본은 eiusdem tamen이다. Engelbrecht는 si, quomodo Marcionitae uolunt credi, de Petro pergat apostolus, negans ...(‘마르키온파가 믿게 하려는 대로 사도가 베드로에 관해 계속 말하게 하라’)로 읽기를 제안했다.

    3.19 갈라디아서 2: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요한의 외침은 누가복음 3:4; 이사야 40:3.

    3.20 누가복음 3:4-5; 이사야 40:3-4. 개역개정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 본문은 ‘골짜기’ 대신 riui(‘시내’)로 읽는다.

    3.21 시편 2:3, 2:1-2를 이 순서로 인용한다. 이어 갈라디아서 2:16과 3:11, 하박국 2:4. iustificaretur는 Kroymann의 추정이고 사본은 iustificetur이다.

    3.22 하박국 2:4. pronuntiauit은 M의 읽기이며 R과 이전 판들은 praenuntiauit(‘미리 선언했다’)이다.

    3.23 갈라디아서 3:10-12. operarius(‘일하는 자’)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을 가리킨다.

    3.25 신명기 11:26. 개역개정은 “복과 저주”의 순서이다. Kroymann은 quae etsi rerum est, non ideo auctorum을 삽입구로 표시하고, 두 구절의 순서를 바꾸어야 할 가능성도 언급한다.

    3.26 갈라디아서 3:13. Engelbrecht의 구문 해석을 따라 ‘사도가 가르쳐 주니 사도가 얼마나 우리 편에 서 있는지 분명하다’로 옮겼다.

    3.27 신명기 21:23; 갈라디아서 3:13. ligno는 M의 읽기이고 R과 이전 판들은 in ligno이다.

    3.28 aut는 Kroymann의 추정이고 사본은 et이다. ignorabat도 Kroymann의 추정이며 사본은 ignorat, Engelbrecht는 ignoraret를 제안했다. 마르키온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창조주가 알지 못하던 신에게서 왔으므로 창조주가 그를 미리 저주할 수 없었다는 논증이다. ‘남의 사람’은 창조주에게 속한 인간이 마르키온의 신에게는 남이라는 뜻이다.

    3.32 갈라디아서 3:14. 개역개정은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이고, 테르툴리아누스가 읽은 마르키온 본문은 ‘영적인 복’이다.

    3.33 forma gratiae fides는 ‘믿음이라는 은혜의 형식’으로 옮겼다. 은혜가 믿음이라는 방식으로 주어지는 질서가 창조주의 것이라는 뜻이다. fides는 Kroymann의 추정이고 사본 MR은 fidei이다.

    3.34 갈라디아서 3:26. 개역개정은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이고, 마르키온 본문은 ‘믿음의 아들들’로 읽는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이 그 앞의 아브라함 단락(갈라디아서 3:6-9)을 지웠다고 본다.

    3.35 갈라디아서 3:7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3.37 창세기 15:6(갈라디아서 3:6)과 창세기 17:5. <그에게>는 Kroymann이 보충한 ei를 옮긴 것이다. magis 뒤의 탈문(**)은 Kroymann이 표시한 것이며, 그는 quam demerendo placentes(공로를 쌓아 기쁘게 하기보다)를 보충안으로 제시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하박국 2:4; 갈라디아서 3:11.

    3.39 아브라함은 할례(창세기 17:10-14) 이전에 믿어 의롭다고 여겨졌다(창세기 15:6; 로마서 4:10-11 참조). ‘육신이 온전한 상태’는 할례받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3.40 <믿음으로>는 Kroymann이 보충한 ex fide를 옮긴 것이다.

  4. 4 본문으로

    4.1 갈라디아서 3:15 첫머리의 “내가 사람의 예를 따라 말한다”가 마르키온의 본문에서는 갈라디아서 4:3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바로 앞에 붙어 있다. Kroymann은 마르키온이 3:15 이하 4:2까지를 지웠다고 보며, 테르툴리아누스는 4.3-4.7에서 이 연결이 성립하지 않음을 보인다. reuincatur의 생략된 주어는 마르키온으로 보고 번역에 밝혔다. 이 문장은 옛 판본들(Pamelius 이후)에서 3장 끝에 붙어 있었으나 Kroymann은 4장 첫머리로 옮겼다.

    4.2 갈라디아서 4:3. elementa(그리스어 stoicheia)는 우주를 이루는 원소와 글자의 자모라는 두 뜻을 지닌다. 개역개정은 “초등학문”이라 옮겼으나, 테르툴리아누스가 4.4에서는 신으로 숭배되는 우주의 원소로, 4.21-4.23에서는 율법의 ‘첫 글자들’로 이 말을 읽기 때문에 일관되게 “원소”로 옮겼다.

    4.4 suspicit는 Engelbrecht의 읽기이고 사본 MR은 suscipit(받아들이다)로 읽는다.

    4.5 갈라디아서 3:15. 개역개정은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이다. tum과 dixit sed는 Kroymann의 추정 교정이며, 사본 MR은 cum ... dixisset로 읽는다. testamentum은 ‘유언’과 ‘언약’을 함께 뜻하는 말로, 4.34의 “두 언약”(갈라디아서 4:24)과 맞추어 “언약”으로 옮겼다.

    4.6 갈라디아서 3:16.

    4.8 ‘해면’(spongia)은 글자를 지우는 데 쓰던 도구로, 마르키온이 바울 서신의 구절을 삭제한 일을 가리킨다.

    4.9 갈라디아서 4:4. 해와 달과 별을 때의 표징으로 정한 일은 창세기 1:14를 가리킨다.

    4.10 이사야 2:2(개역개정: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 굳게 설 것이요”)와 요엘 2:28(라틴어 성경 및 Kroymann 표기로는 요엘 3:1). de meo spiritu는 ‘내 영에서’라는 부분 표현이다.

    4.14 갈라디아서 4:5 앞부분과 이사야 40:4, 그리고 고린도후서 5:17과 이사야 43:19; 65:17의 ‘옛것과 새것’ 주제를 가리킨다. Kroymann이 hoc est부터 4.15의 Hierusalem까지를 삽입구로 표시했기 때문에 번역에서도 줄표(-)로 둘렀다. uias leues는 Junius의 교정이며 사본은 uias lenes로 읽는다.

    4.15 이사야 2:3. 개역개정은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이고,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새 율법’이라고 한다. 이어서 갈라디아서 4:5 뒷부분(개역개정: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을 인용한다.

    4.16 이사야 49:6과 이사야 42:4. 42:4는 칠십인역을 따른 형태로, 개역개정의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와 다르며 마태복음 12:21의 인용과 가깝다.

    4.17 갈라디아서 4:6. 개역개정은 “그 아들의 영”이라고 하지만 테르툴리아누스(또는 마르키온)의 본문은 “자기 영”(spiritum suum)이다.

    4.18 요엘 2:28을 다시 인용하여, 갈라디아서 4:6의 영을 보낸 이가 요엘을 통해 영을 약속한 창조주임을 보인다.

    4.20 갈라디아서 4:9. 개역개정은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이다.

    4.21 그리스어 stoicheia처럼 라틴어 elementa도 알파벳의 낱자를 뜻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뜻을 근거로 4.23에서 갈라디아서 4:9-10의 elementa를 율법의 초보, 곧 ‘율법의 첫 글자들’로 읽는다.

    4.23 갈라디아서 4:8. 정경 본문은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인데, 마르키온의 본문은 부정어 없이 “본성상 신들인 것들”로 되어 있다. physicae는 그리스어 형용사를 라틴어로 적은 것이고 테르툴리아누스가 id est naturalis로 풀었으므로 “자연학적, 곧 자연에 관한”으로 옮겼다. 4.22 끝에서 시작하는 etsi 삽입구는 Kroymann의 구두점을 따라 줄표로 표시했다.

    4.24 갈라디아서 4:10. caenae purae(정결한 만찬)는 안식일 전날, 곧 예비일에 드는 식사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큰 날들’은 대속죄일 같은 큰 절기를 뜻한다.

    4.26 이사야 1:13-14. 개역개정에서 “내 마음이 싫어하나니”로 된 부분을 라틴어 본문(anima mea)대로 “내 영혼이”로 옮겼다. caerimonia uestra는 사본 MR의 읽기이고 Pamelius는 caerimonias uostras로 읽는다.

    4.27 아모스 5:21. odorabor(향기를 맡다)는 Pamelius의 교정이고 사본 MR은 adorabor(경배하다)로 읽는다. 개역개정은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이다.

    4.28 호세아 2:11.

    4.32 nulla magis auferenda는 Engelbrecht의 교정이고 사본은 nullam ... auferendam으로 읽는다. conuertit(바꾸었다)는 사본 MR의 읽기이고 Latinius는 conuerrit(쓸어 냈다)로 고쳤다.

    4.33 4.33-4.35는 갈라디아서 4:22-24, 26과 에베소서 1:21을 엮은 마르키온 본문의 인용이다. 정경 본문의 “어머니”인 예루살렘 대신 교회가 나오며, 테르툴리아누스는 4.32에서 이 대목을 마르키온이 ‘부분적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allegorica는 “비유”로 옮기고, 테르툴리아누스가 붙인 풀이 id est aliud portendentia를 “곧 다른 것을 미리 가리키는 것들”로 옮겼다.

    4.34 ‘두 보여 줌’(duae ostensiones)은 그리스어 diathēkai를 testamenta 대신 이렇게 옮긴 라틴어 번역을 테르툴리아누스가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4.35 super omnem principatum ... uim dominationem은 에베소서 1:21(“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 모든 이름 위에”)에서 온 표현이며, Kroymann의 본문에 접속사 없이 uim dominationem으로 남아 있는 것을 “권세와 주권”으로 옮겼다. in quam은 Ursinus의 교정이고(사본 quem), quae est mater nostra는 사본에서 조금 앞 in futuro 뒤에 있는 것을 Engelbrecht가 이 자리로 옮겼다. repromisimus는 세례 때의 서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우리가 서약하여 들어간”으로 옮겼다. 이 대목의 si(4.33)에 대한 귀결절은 4.36의 utique manifestauit이다.

    4.36 갈라디아서 4:31. dispositio는 하나님이 정한 질서라는 뜻에서 “경륜”으로, deliniatio(R3는 delineationem, M과 R1은 declinationem)는 “밑그림”으로 옮겼다.

    4.37 갈라디아서 5:1. manumittere는 주인이 자기 종을 법적으로 풀어 주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종에서 놓아주다”로 옮겼다. 종을 풀어 줄 수 있는 이는 그 종의 주인뿐이라는 것이 이 논증의 전제다. nos는 Pamelius의 교정이고 사본 MR은 uos로 읽는다.

    4.38 갈바는 68-69년의 로마 황제 Servius Sulpicius Galba다. nec는 Junius의 교정(사본 ne)이고, soluturus는 R3의 읽기이며 MR1은 solutos로 읽는다.

    4.39 갈라디아서 5:1 뒷부분(“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4.40 시편 2:3과 시편 2:2. archontes는 그리스어를 그대로 옮겨 적은 말로 “통치자들”로 옮겼다.

    4.41 갈라디아서 5:2-3의 할례 문제를 가리킨다. exemptis는 Kroymann의 교정이고 사본 MR은 exemptos로 읽는다.

    4.42 예레미야 4:4와 신명기 10:16. 신명기 10:16은 개역개정에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이다.

    4.43 갈라디아서 5:6.

    4.46 이사야 42:4(4.16 참고; 여기서는 sperabunt 대신 credent)와 갈라디아서 5:6(“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4.48 신명기 6:5.

    4.49 레위기 19:18과 갈라디아서 5:10.

    4.53 갈라디아서 5:14. 정경 본문은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이며,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하는 마르키온의 본문은 “너희 안에서”(in uobis)라고 한다.

    4.55 dispendium(손실)과 compendium(요약, 줄임)은 말놀이다. ‘적대자’는 마르키온이 창조주의 적대자로 내세우는 사도를 가리킨다.

    4.57 갈라디아서 6:2. 개역개정의 “그리스도의 법”을 lex의 다른 용례와 맞추어 “그리스도의 율법”으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율법이 레위기 19:18의 계명과 같은 것이라고 논증한다.

    4.58 proximum tibi와 4.57의 proximum sibi는 사본 MR의 읽기이고, Pamelius는 각각 tuum, suum으로 고쳤다.

    4.59 갈라디아서 6:7. 개역개정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이고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너희가 잘못 생각한다”(erratis)이다.

    4.60 갈라디아서 6:7 뒷부분.

    4.61 갈라디아서 6:9 앞부분과 6:10.

    4.63 갈라디아서 6:8(“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4.64 갈라디아서 6:9 뒷부분과 전도서 3:1. 테르툴리아누스는 전도서의 저자를 Ecclesiasticus라고 부르는데, 이는 집회서(Ecclesiasticus)가 아니라 전도서를 가리키므로 “전도자”로 옮겼다.

    4.65 갈라디아서 6:14.

    4.66 conuersatio는 세상에서의 생활 방식을 뜻한다. transfigimur(꿰뚫리다)는 십자가에 못 박힘의 표상을 이어받는 표현이다.

    4.67 첫 문장 persecutores uocat Christi는 Kroymann이 삽입으로 의심하여 [ ]로 묶은 것이며,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어 “그들을 ... 라고 부른다”로 옮겼다. 이어지는 부분은 갈라디아서 6:17이며, 개역개정의 “예수의 흔적”이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흔적”이다. putatiua caro는 그리스도의 육신을 겉보기뿐인 것으로 보는 마르키온의 가현설을 겨냥한 말이다.

  5. 5 본문으로

    5.1 “앞의 편지”는 마르키온의 순서에서 첫 편지인 갈라디아서이다. 여기서부터 고린도전서를 다룬다. titulus는 편지 첫머리의 발신인·수신인·인사 부분을 가리키므로 “머리말”로 옮겼다.

    5.2 salutem praescribere는 라틴어 편지의 관용적 첫인사 salutem(dicit)을 적는 것을 말하며, “안녕”으로 옮겼다. 바울은 그 자리에 “은혜와 평강”을 쓴다(고린도전서 1:3).

    5.3 줄표 안은 Kroymann이 삽입구로 표시한 부분이다. 유대인의 인사말 샬롬(평강)을 가리킨다. destructori는 R의 읽기이고 M은 destructore이다.

    5.4 로마서 10:15; 이사야 52:7. maturi(때에 맞는)는 그리스어 ὡραῖοι를 옮긴 말이며, 개역개정은 “아름답도다”로 옮긴다. euangelizatur는 Engelbrecht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euangelizator(복음 전하는 자)이다. praeferendam은 평강을 인사말 앞자리에 내세운다는 뜻으로 보았다.

    5.5 haec는 앞의 은혜와 평강을 가리킨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로부터”는 고린도전서 1:3의 인사말이다. sacramentum은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체계를 가리키며 “신비”로 옮겼다. “공통된 이름들”은 마르키온파와 정통 교회가 함께 쓰는 이름이라는 뜻이다. ex accidentibus는 이름에 덧붙어 그 대상에게 실제로 따르는 속성들을 말한다.

    5.6 deum은 Kroymann의 추정이고 사본 MR은 dominum(주)이다.

    5.8 <도>는 Kroymann이 보충한 et를 옮긴 것이다. “선포한 이”는 이사야를 통해 평강을 미리 선포한 창조주를 가리킨다(5.4 참조).

    5.10 “백성”은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을, “본성을 외면함”은 자연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인류의 죄를 가리킨다(로마서 1:18-27 참조). rebellauerat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debellauerat이다.

    5.13 고린도전서 1:18, 24. ait와 adicit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aut, aliquid이다.

    5.14 고린도전서 1:19; 이사야 29:14.

    5.15 deputatam은 Engelbrecht의 추정이고 사본 MR은 deputat이다.

    5.16 ecquomodo는 Oehler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et quomodo이다. 마르키온파는 창조주가 다른 신과 그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으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주장을 근거로 반문한다.

    5.17 deum(optimum)은 Kroymann의 추정이고 사본 MR은 dominum이다. 문장 끝의 물음표도 Kroymann이 둔 것이다.

    5.18 Kroymann은 si non을 그리스어 εἰ δὲ μή(그렇지 않다면)에 해당하는 말로 보고, 생략된 내용을 apud deum optimum alii salutem referunt alii perditionem(지극히 선한 신에게서 어떤 이들은 구원을, 어떤 이들은 멸망을 얻는다)으로 보충하여 “그렇지 않다면”을 “지극히 선한 신에게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면”으로 이해한다. 이전 판들은 si non creatoris ... multasse?로 이어 읽었다.

    5.19 고린도전서 1:20.

    5.20 고린도전서 1:21. boni duxit는 그리스어 εὐδόκησεν을 옮긴 말이다. deum은 Pamelius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dominum이다.

    5.21 이단자들은 고린도전서 1:21의 “세상이 하나님을 깨닫지 못했다”에서 “세상”을 세상의 주인 창조주로 읽어, 창조주가 마르키온의 신을 알지 못했다는 증거로 삼았다.

    5.22 circus, forum, basilica는 로마의 공공장소이다. 바실리카는 재판과 상거래가 열리던 공공 건물이다.

    5.23 <안>은 Kroymann이 보충한 in이고(MR1 quam, R3와 이전 판들 quem), <지혜 안에서>는 Engelbrecht가 보충한 in sapientia이다. 앞의 sapientia(“지혜를 통해”)는 고린도전서 1:21의 per sapientiam, 곧 인간의 지혜를 가리킨다. “지은 것들”(opera)은 창조된 세계를 가리킨다(로마서 1:20 참조). adcognitus는 M의 읽기이고 R은 agnitus이다.

    5.24 고린도전서 1:22.

    5.26 zeloten은 그리스어 ζηλωτής(질투하는 이)를 라틴 글자로 옮겨 쓴 말이다(출애굽기 20:5 “질투하는 하나님” 참조). retributione는 MR3의 읽기이고 R1은 tributione이다.

    5.27 “그 이유들”은 고린도전서 1:21에서 사도가 덧붙인 까닭을 가리킨다. Kroymann은 사본 M의 creatori ... intellegendo(이해되지 못한 창조주를 이해시키려고)를 따랐다. R은 creatore ... intellegendo, Oehler는 creatorem ... intellegendum(이해되지 못한 창조주를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으로 읽는다.

    5.28 고린도전서 1:23. scandalum을 개역개정에 맞추어 여기서는 “거리끼는 것”, 5.29에서는 “거치는 바위”로 옮겼으나 라틴어로는 같은 낱말이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낱말로 두 구절을 잇는다.

    5.29 로마서 9:33; 이사야 8:14; 28:16. “그런데 그 바위는 그리스도였다”는 고린도전서 10:4이다. 마르키온의 본문에도 이 구절이 남아 있으므로, 이사야가 말한 “바위”를 그리스도로 읽을 근거가 마르키온의 사도서 안에 있다는 논증이다.

    5.30 고린도전서 1:25. mors dei(하나님의 죽음)는 사본 M의 읽기이고 R과 이전 판들은 mors Christi(그리스도의 죽음)이다.

    5.31 고린도전서 1:25. hominibus는 Kroymann의 추정이고 M은 homini, R은 homine이다.

    5.32 고린도전서 1:27-28. “곧 참으로 있지 않은 것들”, “곧 참으로 있는 것들”은 테르툴리아누스가 덧붙인 풀이이다. 그리스도의 육신과 수난이 실제가 아니라면 바울의 이 대조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반(反)가현설 논증이다. sapientia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sapientiam이다.

    5.34 autem iam은 Engelbrecht의 추정이고 M은 aut etiam, R과 이전 판들은 autem etiam이다. “옛것들”은 옛 언약의 제사와 정결 규정을 가리키며, 이어지는 5.35-37에서 열거된다.

    5.35 레위기 6:9-18의 번제와 소제 규정 참조. holocaustomatum nidorosorum은 R3의 읽기이고 MR1은 holocaustomata idolorum(우상들의 번제)이다.

    5.36 그릇과 침상의 정결 규정은 레위기 15:4, 12, 26에 있다. “이미 부끄러워하는 육신을 또 다른 방식으로 욕되게 하는 것”은 할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5.37 출애굽기 21:24(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레위기 11:2-44(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

    5.38 고린도전서 1:27, 29. 줄표 안은 Kroymann이 삽입구로 표시했다. aemulatur는 “다투어 애쓰다”라는 뜻과 함께 창조주의 질투(aemulatio)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어서 “질투”로 옮겼다. contrariis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a contrariis이다.

    5.39 고린도전서 1:31; 예레미야 9:23-24. deo는 사본 MR의 읽기이고 F와 Pamelius는 domino(주)로 읽는다. “이것을 명한 이”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 말을 한 창조주를 가리킨다.

    5.40 in deo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in deum이다. 창조주가 마르키온의 신 안에서 자랑하라고 명한 적이 없으므로, “하나님 안에서 자랑하라”의 하나님은 창조주라는 반어이다.

  6. 6 본문으로

    6.1 고린도전서 2:6(온전한 자들 가운데서 지혜를 말함)과 이사야 29:14, 고린도전서 1:19-20, 27-28을 엮은 문장이다. sapientia mundi는 뒤의 stulta eius(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와 짝을 이루는 중성 복수로 보아 “세상의 지혜로운 것들”로 옮겼다. disponens in salutem은 “구원에 이르도록 경륜한”으로 옮겼다.

    6.2 고린도전서 2:7(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지혜). 천한 것들 앞의 in은 Kroymann이 보충한 말이어서 <안에>로 표시했다. allegoriis는 Pamelius의 수정이고 사본 M과 R은 allegoricis로 읽는다.

    6.3 이사야 49:6(민족들의 빛)과 이사야 45:3(숨은 보화와 은밀한 곳에 감추어진 재물).

    6.4 egit는 R의 독법이고 M과 F는 legit로 읽는다. ‘그 신’은 마르키온의 신이다.

    6.7 고린도전서 2:7의 ante saecula는 개역개정에서 “만세 전에”이다. 6.8-14에서 테르툴리아누스가 saecula를 시간과 날, 달, 해로 짜인 단위로 논증하므로 이 장에서는 saeculum을 일관되게 “세대”로 옮겼다.

    6.8 창세기 1:14.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는 “달과 해의 표징이 되리라”(in signa mensium et annorum)이고, 개역개정은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이다. 라틴어의 solibus et lunis는 복수형이다.

    6.9 organa eorum(시간들의 도구들)은 Kroymann의 추정이다. 사본 M과 R은 ortaneorum, R3 여백은 ortum eorum이며, Ursinus는 notas eorum, Oehler는 ordinem eorum을 제안했다.

    6.10 고린도전서 2:7의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in gloriam nostram)를 테르툴리아누스는 “우리의 영광을 미리 정했다”는 뜻으로 다룬다. 동사의 주어는 마르키온의 신이어서 “그 신”으로 옮겼다.

    6.14 Kroymann은 첫 et를 etiam으로 보고 praeministrauit에 연결한다. 이에 따라 “세대들의 중간 기간에도 ... 미리 준비해 두었다”로 옮겼다. proposuisse는 R3의 독법이고 M과 R1은 profuisse로 읽는다.

    6.15 고린도전서 2:8. dominum 뒤의 탈문은 Kroymann이 표시한 것이다. Kroymann은 dominum <eius intellegendum, creatorem, qui gloriae dominum>을 보충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이 세대의 통치자들”을 그들의 주인인 창조주로 이해해야 하며 그 창조주가 영광의 주, 곧 다른 신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논증이 된다. Engelbrecht는 huius aeui 뒤에 <malos angelos (siue uirtutes et potestates) creatoris non esse, qui gloriae>를 보충하자고 한다. 단수 crucifixerit는 Kroymann의 수정이며(M과 R1 cruci eum fixerint, R3 cruci confixerint), redigat는 M과 R1의 독법이다(R3 recidas).

    6.16 deputanda는 Kroymann이 손상 부호를 붙인 말이다. Kroymann은 cleptanda(감추어 두어야 할)를 추정했고 Engelbrecht는 depalata(드러난)를 제안했다. 전해진 deputanda를 “정해져야”로 옮기고 그 앞에 †를 두었다. ignoratam은 Kroymann이 사본의 ignotam을 고친 형태로, 뜻은 같아 <알려지지 않았던>으로 표시했다. ab omnibus는 M과 R의 독법이고 Rigaltius는 ab hominibus, Engelbrecht는 abominationibus로 고쳤다. dispositiones는 “경륜”으로 옮겼다.

    6.17 uirtutes et potestates는 창조주에게 속한 천사적 세력들을 가리키며 “능력들과 권능들”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고린도전서 2:8이 통치자들에게 무지를 돌리므로, 예수를 알아본 영적 세력들은 이 구절의 통치자들이 될 수 없다고 논증한다.

    6.18 Kroymann은 사본의 autem을 enim으로 고쳤다. “우리의 복음서”의 시험 기사는 마태복음 4:1-11(누가복음 4:1-13)이며, 마르키온의 복음서는 누가복음 4:31 이전을 싣지 않아 이 기사가 없다. “공통의 문서”는 마르키온과 교회가 함께 쓰는 누가복음 본문이고, 인용된 장면은 누가복음 4:34(“나사렛 예수여 ...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이다. “그들을”(eorum)은 마귀와 악한 영들을 가리킨다.

    6.19 누가복음 11:21-22. oppressit는 R3의 독법이고 M과 R1은 obrepsit로 읽는다. 탈문은 Kroymann이 표시했고, 그는 “그 비유를 마귀에 관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도 마귀가 주를 알았다는 증언이다”라는 뜻의 문장이 빠졌다고 본다. creatoris는 M과 R의 독법이고 Ursinus는 creatorem으로 고쳤다. 두 곳의 dominum(영광의 주)은 사본의 deum을 Kroymann이 고친 것이다. 줄표 안의 삽입구 표시와 crucifixerint(R3 crucifixisse)도 Kroymann을 따랐다. “그의 그리스도”는 창조주의 그리스도다.

    6.20 누가복음 22:3(사탄이 가룟인 유다에게 들어감). 사본 M은 satanan으로 적는다.

    6.21 archontes는 고린도전서 2:6, 8의 ἄρχοντες(통치자들)를 반향하는 그리스어 차용어로, 유대 백성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므로 “관원들”로 옮겼다. 사도행전 4:25-27은 시편 2:2의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사도행전 4:26 “관리들”)을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에게 적용한다. “으뜸 백성”(populus principalis)은 이스라엘이다.

    6.22 argumentationes는 Gelenius의 수정이고 사본 M과 R은 argumentatione로 읽는다.

    6.24 et deus는 M의 첫 필사자가 여백에 보탠 말이다. “같은 문서”는 창조주의 성경, 곧 구약을 가리킨다.

    6.25 이사야 40:13, 고린도전서 2:16(로마서 11:34도 같은 구절을 인용한다). 개역개정 고린도전서 2:16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이다.

    6.26 Esaiae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과 R은 Esaias로 읽는다. 고린도전서 3:10(지혜로운 건축자). depalator는 말뚝(palus)을 박아 집터의 경계를 표시하는 사람을 뜻하므로 “터를 잡는 자”로 옮겼다.

    6.27 이사야 3:1-3. 칠십인역 3:3은 σοφὸν ἀρχιτέκτονα(지혜로운 건축자)이고 개역개정은 “정교한 장인”이다. “다른 것들과 함께”(inter cetera)는 이사야 3:2-3의 긴 목록을 줄인 말이다.

    6.28 numqui non은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과 R은 numquid로 읽는다. 고린도전서 3:10-11(그리스도라는 터).

    6.29 이사야 28:16. 개역개정의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와 달리 라틴어는 칠십인역처럼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이다(로마서 9:33, 베드로전서 2:6 참조).

    6.31 고린도전서 3:12-15. nostra(우리의)는 Engelbrecht의 수정이고 사본 M과 R은 uestra(너희의)로 읽는다. 불로 심판하는 것을 창조주의 행위로 보는 논증이다.

    6.32 고린도전서 3:16.

    6.33 창세기 1:26-27(형상과 모양), 2:7(흙과 생기). totus는 Rigaltius의 수정이다(M과 R1 tutus, R3 tuus). Kroymann은 si non을 그리스어 εἰ δὲ μή(그렇지 않다면)에 해당하는 말로 보고 “마르키온의 신이 남의 것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면”을 보충해 읽으므로 “그렇지 않다면”으로 옮겼다. 통상본은 si non creatoris sumus templum을 이어 읽어 “우리가 창조주의 성전이 아니라면 마르키온의 신은 남의 것 안에 거한다”는 뜻이 된다. 줄표 안의 삽입구 표시는 Kroymann을 따랐다.

    6.34 고린도전서 3:17. uitiare는 망가뜨리다, 더럽히다의 뜻이며 개역개정은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이다.

    6.35 intentauit는 Engelbrecht의 수정이다(M, R3, F intentabit, R1 intentabis). 이어지는 인용은 고린도전서 3:18이다.

    6.36 고린도전서 3:19.

    6.38 욥기 5:13을 인용한 고린도전서 3:19. 개역개정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이다.

    6.39 시편 94:11을 인용한 고린도전서 3:20. 시편은 “사람의 생각”, 고린도전서는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이다. “그 하나님을 위해”(illi)는 창조주를 가리킨다.

    6.40 고린도전서 3:21.

    6.41 예레미야 17:5(개역개정 “무릇 사람을 믿으며 ... 그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와 시편 118:8(개역개정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7. 7 본문으로

    7.1 고린도전서 4:5. 개역개정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문장의 주어 ipse를 창조주로 읽고, 그리스도를 통해 일한다고 해석한다. “민족들의 빛”은 이사야 42:6, “콩팥과 마음을 살피는 등불”은 잠언 20:27과 예레미야 11:20을 합친 표현이다. in lumen nationum(사본 inluminationum, illuminationem)과 quique se(사본 quoque se, se quoque)는 Kroymann의 교정이다.

    7.2 고린도전서 4:5 후반부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를 받아, 칭찬하는 이가 벌하는 심판자이기도 하다고 논증한다.

    7.3 고린도전서 4:9. 개역개정은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이다. 마르키온파는 mundo를 천사들과 사람들과 별개인 ‘세상의 신’으로 읽었다. 그 해석이 드러나도록 “세상에게, 그리고 천사들과 사람들에게”로 옮겼다. hominibus, quia는 Ursinus의 교정이다(사본 hominibus. qui).

    7.4 quomodo는 사본 M과 R1의 독법이고, R3와 대부분의 편집자는 quidnam으로 읽는다.

    7.5 dum은 앞 인용을 풀이하는 접속사로 보아 “곧”으로 옮겼다. 천사들이 세상을 섬기고 사람들은 그 섬김을 받는다는 풀이로 ‘세상’을 세상의 신이 아닌 피조 세계로 읽는다.

    7.6 반어적인 문장이다. 바울이 ‘세상의 신’을 거슬러 선포했다면 이름을 드러내어 말했을 것이라는 논증이다. 복음으로 낳은 아들들은 고린도전서 4:15를 가리킨다. <quem>은 R3의 보충이며 “<그 신을>”로 옮겼다.

    7.7 고린도전서 5:1. 바울 자신이 ‘이방인 중에도 없는’ 음행이라고 하므로, 테르툴리아누스는 바울의 단죄가 창조주의 율법(레위기 18:8)이 아니라 이방인도 공유하는 일반 도덕에서 나왔다고 양보한다. secutus sit의 주어는 사도로 읽었다. Kroymann은 displicuisse <ei> illum을 제안했고, Engelbrecht는 이 대목을 삽입구로 표시했다.

    7.9 고린도전서 5:5와 5:13. ‘악을 가운데서 제거하라’는 신명기 13:5, 17:7, 22:24 등에 되풀이되는 명령이다.

    7.10 고린도전서 5:7. 개역개정은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는 sicut estis azymi(너희가 누룩 없는 자들인 것처럼)로 끝난다.

    7.11 고린도전서 5:7 후반부. pascha는 유월절과 유월절 어린양을 함께 가리키므로 “유월절”로 옮기고, 이어지는 7.12의 논증에서도 같은 말을 유지했다. sic는 ‘예표적으로’라는 뜻으로 읽었다.

    7.12 출애굽기 12장의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가리킨다. pecoris et는 Kroymann의 교정이다(사본 et pecoris; Engelbrecht는 et pecoris <et>).

    7.13 induit는 Ursinus의 교정이며 사본은 imbuit(물들였다)이다.

    7.14 고린도전서 6:13. ‘성전이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이 성전을 위하는 것처럼’이라는 문구는 바울 본문에 없다. Kroymann은 이를 마르키온이 고린도전서 6:19를 바탕으로 자기 본문에 덧붙인 문구로 본다.

    7.15 고린도전서 6: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를 받는다. Kroymann은 deus(사본 dominus; Pamelius dominum)와 suscitauit(M; R과 이전 판본은 suscitabit)로 읽고, “하나님이 일으켰고 또 우리를 일으킬 그 이(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몸으로도 일으켰다”로 풀이한다. 번역은 이 풀이를 따랐다.

    7.16 고린도전서 6:15. 테르툴리아누스는 ‘몸’을 복수 corpora로 인용한다.

    7.18 고린도전서 6:20. 개역개정은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이다. magno는 M과 R1의 독법이고, F, R3, Gelenius와 이전 판본은 pretio magno로 읽는다. nullo si는 R3의 독법이다(M과 R1은 nullus in).

    7.19 admittenda는 Kroymann의 교정이다(사본 eadem mittenda; Pamelius ea committenda). 고린도전서 6:19-20의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를 반영한다.

    7.20 고린도전서 6:20. 개역개정은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본문에는 하나님을 몸에 ‘지니고 다니다’(tollere)는 동사가 더 있어 그대로 옮겼다.

    7.21 고린도전서 7:7-11. constantior apostolo(사도보다 더 철저한)는 마르키온의 혼인 금지를 비꼬는 표현이다. <et>는 Pamelius의 보충이다.

    7.22 마태복음 5:32, 19:9와 신명기 24:1-2. 마르키온은 혼인하지 않은 자나 혼인 관계를 끊은 자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다(제1권 29장). 그래서 세례를 받지 않은 예비 신자(catechumeni)는 혼인 상태로 남을 수 있었고, 삽입구는 이 점을 비꼰다. repudium ante nuptias는 혼인 자체를 금지한 것을 ‘혼인 전의 이혼’이라고 부른 표현이다. nuptias는 M과 R1의 독법이다(R3와 대부분의 편집자는 nuptae).

    7.23 고린도전서 7:10-11. 사본은 Christus이지만, Kroymann은 약어 apls(apostolus)와 xps(Christus)가 혼동되었다고 보고 apostolus로 교정했다. Pamelius는 Christi <apostolus>로 읽었다.

    7.24 고린도전서 7:29. 개역개정은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이다.

    7.25 <a>는 보충된 전치사로, a quo는 R3의 독법이고 M과 R1은 quod이다. 이 문장은 7.26의 ab eo erit로 이어지므로 “<누구에게서> 오든, ... 그에게서 올 것이다”로 두 단위에 나누어 옮겼다.

    7.28 고린도전서 7:39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allophyli는 칠십인역이 이방 족속, 특히 블레셋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이방인과의 혼인 금지는 출애굽기 34:16, 신명기 7:3에 있다.

    7.29 고린도전서 8:5.

    7.31 고린도전서 8:4.

    7.32 고린도전서 8:6. creatorem deum non negat는 ‘신이라 불리지만 신이 아닌 자들’과 대비되는 술어이므로 “창조주가 신이라는 것”으로 옮겼고, deus pater는 “하나님 아버지”로 옮겼다.

    7.33 <ex quo omnia>는 Latinius의 보충이며 사본과 다른 편집자들에게는 없다. ‘앞에 나온 대목’은 고린도전서 3:21-22이다.

    7.34 고린도전서 3:21-22. mundus를 이 장 전체에서 “세상”으로 옮겼으므로 개역개정의 “세계” 대신 “세상”을 썼다.

    7.36 고린도전서 9:7. Kroymann은 uiuere와 satis를 묶어 ‘넉넉한 생계를 얻다’로 읽는다. 번역은 이를 따랐다.

    7.37 illis는 Kroymann의 교정이다(사본 illa; Engelbrecht illic; Pamelius illi). ingratis를 Engelbrecht는 ‘배은망덕한 자들에게’로 옮겼고, Kroymann은 ‘마지못해’로 보는 편이 더 개연적이라고 했다. 번역은 Kroymann을 따랐다. Kroymann에 따르면 opponit(맞세운다)는 마르키온의 『안티테시스』를 비꼬아 가리키는 말이다. quam destruebat(그가 허물고 있던)도 바울이 율법을 폐했다는 마르키온의 주장을 비꼬는 표현이다.

    7.38 고린도전서 9:9, 신명기 25:4. 개역개정 고린도전서 9:9 후반부는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본문(num quid de bobus pertinet ad dominum)에는 ‘주’가 나오고 ‘염려하다’ 대신 ‘상관이 있다’는 표현을 쓴다.

    7.39 Kroymann은 문장 첫머리에 탈문을 표시하고, 빠진 말을 ut ostendat scilicet dominum(곧 주가 ... 인자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정도로 추정했다. 탈문 자리는 **로 표시했다. [de]는 Ursinus가 삭제를 제안한 말이며 “[에 관해서]”로 옮겼다. Rigaltius는 et bobus로 읽었다. 인용은 고린도전서 9:10이다.

    7.41 고린도전서 9:12, 9:18. potestas는 이 대목에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에서 말하는 사도의 권리를 가리키므로 “권리”로 옮겼다. ‘값없이 수고하다’는 고린도후서 11:7을 반영한다.

    7.42 고린도전서 9:15. gloria는 바울의 ‘자랑’을 가리킨다. ‘다른 이가 그 율법을 쓴다’는 고린도전서 9:12의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에 해당한다.

    7.43 고린도전서 10:1-4.

    7.44 고린도전서 10:4. Kroymann은 utique creatoris, cuius et populus를 삽입구로 표시했다. extranei sacramenti는 창조주와 무관한 ‘낯선 신비’를 뜻한다. 바울이 창조주의 바위를 다른 신의 신비에 대한 예표로 해석할 이유가 없다는 논증이다.

    7.46 고린도전서 10:6. 개역개정은 “그런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이다. ‘나머지 결말’은 고린도전서 10:7-10에서 백성이 우상숭배와 음행과 원망으로 멸망한 일을 가리킨다. autem은 M과 R3의 독법이고, R1과 다른 편집자들은 enim으로 읽는다.

    7.48 Kroymann은 de illo와 a quo를 중성으로 읽어, 마르키온의 신이 믿음을 떼어 내려는 바로 그 옛 사건들을 가지고 겁준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Engelbrecht는 terret 뒤에 끊고 sibi a quo로 읽는다. <an>은 Kroymann의 보충이고, aduersarius(적수)는 창조주를 가리킨다. 번역은 Kroymann의 해석을 따랐다.

    7.51 Engelbrecht의 풀이에 따라 si a creatore 뒤에 ‘(그런 일들을) 당하겠는가’를 보충하여 읽었다.

    7.52 deus zelotes(질투하는 하나님)는 출애굽기 20:5, 34:14의 칭호이다.

    7.53 Kroymann은 ad와 disciplinam 사이에 탈문을 표시하고, confirmandam(확증하다) 같은 말이 빠졌다고 추정했다. 탈문 자리는 **로 표시했다.

    7.54 고린도전서 10:11. 개역개정은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는 ‘세대들의 끝이 우리에게 다다랐다’(fines aeuorum decucurrerunt)이다. ‘서두’는 고린도전서 10:6을 가리킨다.

    7.55 paria eorum, quae retractata sunt는 앞선 책들에서 이미 다룬 논점과 같은 내용을 가리킨다. praetereo si는 M과 R3의 독법이고, R1은 praeter eos로 읽는다.

    7.56 고린도전서 10:25 “시장에서 파는 것은 ... 먹으라”. opsonia는 시장에서 파는 먹을거리를 가리킨다. expungo는 R3의 독법이고, M과 R1은 expugno로 읽는다.

    7.57 율법의 짐을 지운 창조주가 새 일을 약속했다는 것은 이사야 43:19, 예레미야 31:31 등을 가리킨다.

    7.58 창세기 1:29와 9:3. 창조주가 처음에 모든 먹을거리를 주었고, 율법으로 음식 규정을 두었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돌려주었다는 논증이다.

  8. 8 본문으로

    8.1 고린도전서 11:3. auctor(창시자)와 8.2의 auctoritas(권위)는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놀이다. 남자를 지은 이가 남자에게 권위를 가진다는 논리로, 남자의 머리인 그리스도가 남자를 지은 창조주의 그리스도라고 논증한다.

    8.3 고린도전서 11:7.

    8.4 창세기 1:26. 창조주가 장차 사람이 될 말씀인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람을 지었다는 해석은 『육신의 부활에 관하여』 6에도 나온다. 줄표 사이의 삽입절은 8.5의 인용문까지 이어진다.

    8.7 고린도전서 11:8-10. potestas는 고린도전서 11:10의 ἐξουσία에 해당하므로, 개역개정의 “권세 아래에 있는 표”에 맞추어 ‘권세’로 옮겼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지어졌다는 창조주의 제정(institutio, 창세기 2:21-23)에서 그 사도가 너울에 관한 규율(disciplina)의 이유를 끌어낸다는 논증이다.

    8.8 고린도전서 11:10. ‘창조주에게서 떨어져 나간 천사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은 하나님의 아들들(창세기 6:1-2)을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처녀들의 너울에 관하여』 7에서도 고린도전서 11:10을 이 이야기와 연결한다.

    8.9 마르키온파는 혼인을 금했다(1권 29장). 마르키온파 사람들조차 여자를 탐하지 않으니 그들의 신의 천사들이 여자를 탐할 리 없다는 풍자다.

    8.10 고린도전서 11:18-19. ‘악들 가운데 하나의 악’은 이단(haereses)을 육체의 일 가운데 열거한 갈라디아서 5:20을 가리킨다. probabiles는 고린도전서 11:19의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에 해당한다.

    8.11 고린도전서 11:23-29. ‘복음서에서 입증했다’는 4권 40장에서 최후의 만찬(누가복음 22:19-20)을 다루며, 빵이 몸의 표상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몸이 참된 몸이어야 한다고 논증한 대목을 가리킨다. 여기서 sacramentum은 성례로 옮겼다.

    8.12 고린도전서 12:1. Kroymann은 promissa 뒤에 ‘같은 창조주가 실현하기도 했다’는 취지의 말이 빠졌다고 보아 결락을 표시했다. Engelbrecht는 Christum <suum>(자기 그리스도에게)으로 고쳐 읽고 결락이 없다고 보았다. 결락 자리에 **를 두었다.

    8.13 이사야 11:1-2. Kroymann은 flos 뒤의 de radice를 삽입으로 보아 [ ]로 묶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의 육신에 관하여』 21과 『화관에 관하여』 15에서 이 구절을 ‘가지에서 나온 꽃’으로 인용한다. 개역개정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 곧 ...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로 옮긴다.

    8.14 이사야 11:2-3. 칠십인역을 따르는 이 본문에는 ‘경건의 영’(religio, 그리스어 εὐσέβεια)이 들어 있어 영의 종류가 일곱이 된다. 개역개정 11:2에는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재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만 있다. ualentia는 8.29의 uirtutes(능력 행함)와 짝을 이루므로 ‘능력’으로 옮겼다.

    8.15 uirga(가지)와 uirgo(동정녀)의 말놀이로, 가지는 다윗 가문의 동정녀 마리아를, 꽃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그리스도의 육신에 관하여』 21). ‘그는 육신을 입기 전에도 언제나 하나님의 영이었다’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영으로 부르는 테르툴리아누스의 표현이다. 줄표 사이의 문장은, 창조주의 그리스도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다윗 혈통에서 날 한낱 사람이라는 마르키온의 주장을 겨냥한다. requiescere는 ‘머물다’와 ‘쉬다, 그치다’를 함께 뜻하여, 영이 그리스도 위에 머문다는 이사야의 말과 유대인들에게서 영의 활동이 그친다는 주장을 잇는다. 그래서 ‘머물러 쉬며’로 옮겼다.

    8.16 이사야 3:2-3을 암시한다. 칠십인역은 하나님이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거두어 갈 이들 가운데 예언자와 모사와 지혜로운 건축자(σοφὸν ἀρχιτέκτονα)를 든다. spirante(숨 쉬다)는 R3의 읽기이며, M과 R1은 sperante로 전한다.

    8.17 누가복음 16:16. 개역개정은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로 옮긴다.

    8.18 시편 68:18(칠십인역 67:19); 에베소서 4:8. 개역개정 에베소서 4:8은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로 옮기지만, 테르툴리아누스가 captiuitas를 ‘죽음 또는 인간의 종살이’로 풀이하므로 추상명사 ‘사로잡힘’으로 옮겼다.

    8.19 문구는 시편 68:18(“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보다 에베소서 4:8(“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에 가깝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사람들’ 대신 ‘사람의 아들들’로 읽는다. data dedit의 어순은 M의 읽기이며 R은 dedit data로 전한다. donatiua는 황제가 병사들에게 내리던 하사금을 가리키는 말이다.

    8.21 고린도전서 4:15; 갈라디아서 4:19. 8.20의 ‘사도들의 아들들’을 그 사도가 신자들을 낳은 아버지라는 이 두 구절로 뒷받침한다. absoluta(이루어졌다)는 Kroymann이 M과 R의 absolute를 고친 읽기이며, Engelbrecht는 absoluta est로 읽는다.

    8.22 요엘 2:28-29(히브리어 본문과 칠십인역 3:1-2); 사도행전 2:17-18. 개역개정 요엘 2:28은 “그 후에”로 시작하고 “너희 자녀들이”라고 하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사도행전 2:17처럼 ‘마지막 때에’로 시작하고 ‘그들의 아들들과 딸들’이라고 한다. Pamelius는 temporibus를 diebus(날들)로 고쳤다.

    8.24 갈라디아서 4:4.

    8.25 고린도전서 7:29. in collecto는 ‘모아졌다, 짧아졌다’는 뜻이며, 개역개정은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로 옮긴다. ‘그것을 선포한 이의 그리스도’는 마지막 때를 미리 선포한 창조주의 그리스도다.

    8.26 고린도전서 12:8-10의 은사 목록을 8.14에 인용한 이사야 11:2-3의 영의 종류들과 짝지운다(8.26-8.30). 그 사도의 말은 개역개정의 ‘성령으로’, ‘같은 성령으로’에 해당하는데,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per spiritum, in eodem spiritu다.

    8.30 conspirare(같은 숨을 쉬다, 한뜻이 되다)는 spiritus와 어근이 같아, 한 영을 말하는 그 사도가 예언자와 같은 숨을 쉰다는 말놀이를 이룬다.

    8.31 고린도전서 12:12-27; 12:31-13:13. ipsum quod는 Kroymann이 M과 R의 ipsum qui를 고친 읽기로, ‘바로 ...했다는 사실로’라는 뜻이다. merita는 R1 난외의 읽기이며 다른 사본과 대부분의 판본은 meritum으로 전한다. <지체들의>는 Kroymann의 보충이다. 몸의 지체들 사이에 공로의 우열이 없듯(12:21-25) 은사들도 내세울 공로가 아니라는 뜻이다. apostolum은 R3의 읽기이며 M과 R1은 apostolorum으로 전한다.

    8.32 누가복음 10:27; 신명기 6:5; 레위기 19:18.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마음, 힘, 영혼의 세 항목을 들고, 개역개정 누가복음 10:27은 마음, 목숨, 힘, 뜻의 네 항목을 든다. 그리스도가 인정한 이 으뜸 계명은 창조주의 율법(신명기 6:5)에 있는 계명이다.

    8.33 고린도전서 14:21; 이사야 28:11. 그 사도는 이사야의 말을 “율법에 기록된 바”로 인용한다. et si quod는 Kroymann이 M과 R의 quod etsi를 고친 읽기다. alienum(남의)은 창조주가 아닌 다른 신에게 속한 것을 뜻한다.

    8.34 고린도전서 14:34-35; 11:5; 창세기 3:16. 고린도전서 14:34의 “율법에 이른 것 같이”를 창세기 3:16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로 읽는다. 마지막 관계절의 quam은 문법상 auctoritas(근거)를 가리킬 수도 있는데, 마르키온의 사도라면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만 알았어야 한다는 논리에 맞추어 ‘그 율법’으로 옮겼다.

    8.35 마르키온은 창조주의 그리스도가 아직 오지 않았으며 유대인들만을 위해 정해져 있다고 주장했다(3권). 이 문장은 그 주장을 따르더라도 은사들이 테르툴리아누스 편에 맞서는 증거가 될 수 있는지를 사실로 가리자는 뜻이다. an nostrae parti는 Rigaltius의 고친 읽기이며 M과 R1은 a nostrae partis로 전한다.

    8.36 고린도전서 14:24-25. ‘마음의 숨은 것들을 드러냄’은 고린도전서 14: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에 해당한다. 여기의 dei spiritus는 humanus sensus(인간의 생각)와 대비되는 신적인 영을 뜻하므로 ‘신의 영’으로 옮겼다.

    8.37 고린도전서 14:26. 황홀경(ecstasis)을 정신을 잃은 상태(amentia)로 설명하는 것은 예언하는 자의 탈아 상태를 옹호한 테르툴리아누스의 견해(4권 22장)와 같다.

    8.38 magnis, dicam은 M과 R1의 읽기다. R3은 magnidicam(큰소리치는 여자를), Rigaltius는 magniducam으로 읽는다. Kroymann의 읽기에서 dicam(나는 말하겠다)은 8.39의 조건문을 이끈다. ‘더 거룩한 위대한 여인들’은 혼인을 거부하는 마르키온파 여성들을 비꼬는 말이다.

    8.39 regulae(규칙), dispositiones(경륜), disciplinae(규율)는 각각 신앙의 규칙, 창조주의 구원 계획, 교회 생활의 규율을 가리킨다.

    8.40 professio는 공적으로 신고하거나 서약한 내용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다. 8.39의 결론을 증서처럼 내놓았으니 누구든 그 이행을 요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9. 9 본문으로

    9.1 앞 장(고린도전서 12-14장의 영적 은사)에서 이어지는 논증이다. Kroymann은 이곳의 장 구분이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9.1-9.3은 앞 장의 논증을 마무리한다. 사본 MR의 qui를 Kroymann은 cui로 고치고 pronuntiare 뒤에 est를 보충해 읽는다. 마르키온파는 영의 증거를 내보이지 못하므로 그에게 누구의 그리스도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지 밝혀 주어야 한다는 뜻으로 옮겼다.

    9.2 사본 MR은 primordio 뒤에 sit를 두는데 Kroymann은 이를 sic으로 고쳐 9.3의 첫머리로 삼았다.

    9.3 사본 MR의 nullum을 Kroymann이 ullum으로 고쳤다. 이단자가 어떤 그리스도를 믿든 그보다 낫다는 뜻으로 옮겼다. nullum으로 읽으면 이단자는 아무 그리스도도 믿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9.4 고린도전서 15:12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를 가리킨다.

    9.7 Kroymann은 첫 번째 carnis를 삽입으로 보아 [ ] 안에 두었다. 이 경우 사도가 반박하는 대상은 부활 일반을 부인하는 자들이고, 그들이 부인하던 것이 육신의 부활이라는 결론이 문장 끝에서 나온다.

    9.8 사본에서는 mortuorum 뒤에 곧바로 mortuum이 이어진다. Kroymann은 필사자의 눈이 mortuorum에서 비슷한 mortuum으로 건너뛰는 바람에 et ‘resurrectionis’가 빠졌다고 보아 <과 “부활”>을 보충했다. Ursinus는 ita와 uocabulum을 삭제하자고 제안했고, Kroymann은 두 낱말을 [ ] 안에 두었다. 9.8-9.10은 “죽은 자들”을, 9.11-9.16은 “부활”을 다루므로 보충된 낱말이 뒤의 논증과 맞아떨어진다.

    9.11 resurrectio는 re(다시)와 surgere(일어나다)로 이루어진 말이다. 9.11-9.16의 어원 논증을 살리려고 surgere는 “일어난다”, resurgere는 “다시 일어난다”로 옮기고 명사 resurrectio는 “부활”로 옮겼다. cadere는 “쓰러지다”로 옮겼다.

    9.15 창세기 3:19. 개역개정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이다. terra를 9.14에서는 “땅”, 인용과 9.16에서는 “흙”으로 옮겼으며 같은 낱말이다.

    9.16 사본 MR의 abit을 Ciacconius의 추정에 따라 cadit으로 읽었다. Kroymann은 어순을 quod in terram ibit, hoc cadit; quod cadit, hoc resurgit(“흙으로 갈 것, 이것이 쓰러지고, 쓰러지는 것, 이것이 다시 일어난다”)로 바꾸어 읽어야 할지 판단을 보류한다.

    9.17 고린도전서 15:21. 개역개정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와 달리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에는 “죽은 자의”가 없다.

    9.18 고린도전서 15:22. Kroymann은 두 번째 corpore를 sic을 풀이한 주석으로 보아 [ ] 안에 두었다. 사본 MR1의 et를 살려 “그리스도 안에서도”로 옮겼다.

    9.19 similitudo는 창세기 1:26의 “모양”을 뜻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9.18의 “… 것과 같이 …”라는 비교 구문을 가리키므로 “비교”로 옮겼다. 사본의 mortificationis를 Kroymann이 여격 mortificationi로 고쳐, 살림이 죽임과 맞물린다는 뜻으로 읽는다.

    9.20 생략된 주어는 사도 바울이다.

    9.22 고린도전서 15:25.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본문은 inimicos eius sub pedes eius로, 원수들을 발아래 두는 이(하나님)와 다스리는 이(그리스도)를 구별하여 읽을 수 있다. 이 구별에서 원수를 굴복시키는 보복하는 하나님과, 시편 110:1에서 그리스도에게 이것을 약속한 하나님을 끌어낸다. ultorem은 사본 MR3의 읽기이고 R1은 cultorem이다.

    9.23 시편 110:1(칠십인역·불가타 109:1). 개역개정은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이다.

    9.24 시편 110:2. 개역개정은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명령형 대신 3인칭 미래 dominabitur(“다스릴 것이다”)를 쓰고, 끝에 다음 절 시편 110:3(칠십인역 109:3 “통치가 너와 함께”) 첫머리의 tecum이 붙어 있다. 사본 M은 uirtutis, R은 uirtutis tuae이다. Pamelius는 dominaberis(“네가 다스릴 것이다”)로 고쳤다.

    9.26 유대인들은 시편 110편을 히스기야에게 적용했다. 히스기야가 산헤립의 위협 앞에서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이 앗수르 군대를 물리친 일(열왕기하 18-19장, 이사야 37:14-20, 36-38)을 근거로 삼는다. quia is sederit는 R3의 읽기이고 사본 MR1은 qui ait sedit이다.

    9.27 시편 110:3의 칠십인역(109:3) “내가 샛별보다 먼저 모태에서 너를 낳았다”를 따른 인용이다. 히브리어 본문을 옮긴 개역개정 110:3(“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과는 전혀 다르다. lucifer는 새벽에 뜨는 샛별(금성)이다. in Ezechiam은 R3의 읽기이고 사본 MR1은 ante Ezechiam이다. Engelbrecht는 사본의 읽기를 변호하여, 본문이 “낳을 것이다”가 아니라 “낳았다”이므로 그들이 이 구절을 히스기야의 탄생 이전에도 해당한다고 보았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9.28 마태복음 2:2, 9-10(동방 박사들이 본 별), 누가복음 2:8-11(밤에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 누가복음 2:7(구유와 여관)을 가리킨다. “이토록 방대한 저작”은 다섯 권으로 된 『마르키온 반박』 전체, 특히 복음서를 다룬 제4권을 가리킨다. fides는 여기서 복음서의 신빙성을 뜻한다.

    9.29 diuersorium은 누가복음 2:7의 “여관”이다.

    9.30 사본 MR의 puero(“아이에게”)를 Ciacconius의 추정에 따라 uero(“참된”)로 읽었다. dixisset는 R3의 읽기이고 사본 MR1은 edixisset이다.

    9.31 이사야 1:2. 개역개정은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이고, 칠십인역은 “내가 아들들을 낳았다”이다.

    9.33 사본 MR은 carni deputans ex utero spiritus. quod et ipso hic accedit로 전해져 뜻이 통하지 않는다. Kroymann은 <quod>를 보충하고 spiritui quod ex ipso. his accedit로 고쳐 “모태에서 난 것은 육신에, 그 자신(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영에 돌렸다”는 뜻으로 읽는다. 9.34의 첫머리 his accedit도 이 수정에 따른 것이다.

    9.34 시편 110:4. 개역개정은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이다.

    9.35 창세기 14:18-20. 아브라함의 할례는 창세기 17장에 나오므로,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만날 때 아직 할례를 받지 않았다. 테르툴리아누스는 할례받지 않은 제사장과 할례자의 조상을 대비하려고 아브라함을 circumcisum이라 부른다. accepta는 R의 읽기이고 사본 MF는 acceptat이다.

    9.36 로마서 10:20-21(구하지 않은 자들에게 찾아진 하나님)과 로마서 11:26-27(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배경으로 한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받고 그를 축복한 일을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할례자들을 받아들이고 축복하는 일의 예표로 읽는다. 사본 MR1은 bene에서 끊기고 R3가 bene<dictione>로 보충했다. 이 보충을 <축복>으로 옮겼다. agnituram은 사본 M의 읽기이고 R과 대부분의 판본은 cognituram이다.

    9.37 시편 72:1(칠십인역·불가타 71:1). 개역개정은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이다.

    9.38 시편 72편의 표제는 개역개정에서 “솔로몬의 시”이고 칠십인역에서는 “솔로몬에 관하여”(εἰς Σαλωμων)이다. dicitur는 Engelbrecht의 읽기이고 사본 MR은 dicetur이다.

    9.40 시편 72:6. 칠십인역은 “양털 위에 내리는 비처럼”(ἐπὶ πόκον)이고, 개역개정은 “벤 풀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내리리니”이다. 사본 MR의 descendit를 Kroymann이 칠십인역의 미래형 καταβήσεται에 맞추어 descendet로 고쳤다.

    9.42 시편 72:8.

    9.44 시편 72:11.

    9.45 시편 72:17. 개역개정은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이다.

    9.46 시편 72:17. 칠십인역 “해보다 먼저 그의 이름이 머물 것이다”를 따른 인용이다. 개역개정은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이다. sermo dei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옮겼다.

    9.47 시편 72:17. 개역개정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이다.

    9.48 9.48-9.49는 시편 72:17-19를 이어서 인용한다. quoniam은 R3의 읽기이고 사본 MR1은 quomodo이다. quoniam으로 읽으면 “그를 복되다 할 것이다”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는 찬송받는다”가 이유 관계로 이어져, 복되다 일컬어지는 이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근거가 된다.

    9.50 열왕기상 11:1-8.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 때문에 우상 숭배에 빠진 일을 가리킨다. 라틴어는 단수 mulier를 써서 “여자”로 옮겼다.

    9.51 시편 72:9. 개역개정은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이다. 원수들이 발아래 굴복한다는 표현으로 9.22의 고린도전서 15:25와 시편 110:1로 되돌아간다. dispositio는 “경륜”으로 옮겼다. 끝의 creatoris는 “창조주의 (그리스도)”를 뜻하며 “창조주에게 속한 이”로 옮겼다.

  10. 10 본문으로

    10.1 ‘따로 한 권’은 테르툴리아누스의 『육신의 부활에 관하여』(De resurrectione carnis)를 가리킨다.

    10.3 고린도전서 15:29.

    10.4 kalendae Februariae는 2월 초하루다. 로마 사람들은 2월에 죽은 조상을 기리는 파렌탈리아(Parentalia) 축제를 지냈고 그 마지막 날(2월 21일)이 페랄리아(Feralia)였다. 2월 초하루에 죽은 자를 기렸다는 기록이 따로 없어서 Kroymann은 kalendae fabariae(6월 초하루, 콩을 바치는 날)로 고칠 가능성을 apparatus에서 제기했으나, Engelbrecht를 따라 ‘2월 초하루’를 2월이라는 달 전체를 가리키는 환유로 보고 전승된 본문을 유지했다. 죽은 자를 대신해 세례를 받는 관습을 이교도가 2월에 죽은 자들을 위해 비는 의례에 견준 말이다.

    10.6 ‘세례는 하나뿐’은 에베소서 4:5를 가리킨다. tingi(물에 잠기다)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세례를 가리킬 때 자주 쓰는 동사다. ‘죽은 것이 몸’이라는 논증은 9.8-10에서 폈다. Kroymann은 줄표 뒤에 ‘그 사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같은 말이 빠졌다고 보아 결락(**)을 표시했고, Engelbrecht는 결락을 상정하지 않는다. 뒤의 인용은 고린도전서 15:29의 ‘죽은 자들’을 ‘몸들’로 바꾸어 읽은 것이다. 『육신의 부활에 관하여』 48.11에서도 테르툴리아누스는 같은 구절의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을 ‘세례받는 몸들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si non quae baptizantur corpora resurgent)으로 풀이하고, 죽은 자를 위한 대리 세례(uicarium baptisma)가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10.8 고린도전서 15:35. 10.12에서도 같은 구절을 다시 인용한다.

    10.10 마르키온은 영혼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으므로(제1권 24장), 부활한 몸의 성질을 묻는 문제는 육신의 부활을 인정하는 다른 상대와 다룰 문제라는 뜻이다.

    10.13 고린도전서 15:37-41. 고린도전서 15:39의 ‘물고기의 육체’는 언급하지 않는다. caro는 ‘육신’으로 통일하여 개역개정의 ‘육체’ 대신 ‘육신’으로 옮겼고, carnalis와 corporalis는 ‘육신에 속한’, ‘몸에 속한’으로 옮겼다.

    10.15 고린도전서 15:42.

    10.16 고린도전서 15:42-43. Kroymann은 in corruptela 뒤에 in dedecoratione, in infirmitate, resurgit autem in incorruptelam(욕됨 가운데, 약함 가운데 뿌려지고, 썩지 않음으로 다시 살아나며)이 빠졌다고 보아 결락(**)을 표시했다. 전승된 본문만 옮겼다.

    10.18 Kroymann은 sicut et granum(낟알과 마찬가지로)이 10.15에서 잘못 끼어든 말이라고 보아 [ ]로 묶었다. Engelbrecht는 sicut et grani로 읽기를 제안한다.

    10.19 고린도전서 15:44. 사본(M, R)은 seritur anima(영혼이 뿌려진다)로 되어 있고, Kroymann은 <corpus> anima<le>(영혼에 속한 몸)로 보충했다(Gelenius는 animale). corpus animale는 개역개정의 ‘육의 몸’, corpus spiritale는 ‘신령한 몸’에 해당하지만, 이 단락은 animale와 anima(영혼), spiritale와 spiritus(영)의 어원 관계에 기대어 논증하므로 ‘영혼에 속한 몸’, ‘영에 속한 몸’으로 옮겼다. ‘불릴 수 있는’은 capit(…할 수 있다)를 옮긴 것이다.

    10.21 고린도전서 15:46. Kroymann은 인용 뒤에 ‘영혼에 속한 것이 먼저요 그다음에 영에 속한 것이다’(sed quod animale, deinde quod spiritale)가 빠졌다고 보아 결락(**)을 표시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15:46을 먼저 인용하고, 그 앞에 있는 15:45를 그 사도가 ‘앞서 놓은’ 기초로 이어서 인용한다.

    10.22 고린도전서 15:45. 개역개정은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로 옮긴다. anima를 ‘영혼’으로 통일하여 ‘살아 있는 영혼’으로 옮겼다.

    10.23 마르키온의 본문은 고린도전서 15:45의 ‘마지막 아담’을 ‘마지막 주’로 바꾸어 읽었다. 사본에는 si et dominum nouissimum haberet ‘Adam’으로 되어 있으나, Kroymann은 dominum을 [ ]로 묶어 ‘마지막도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다면’으로 읽는다.

    10.29 고린도전서 15:47을 마르키온의 본문대로 인용한다. 개역개정은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로 옮기지만, 마르키온의 본문은 ‘둘째 사람’ 대신 ‘둘째는 하늘에서 온 주’로 되어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10.30-31에서 ‘사람’이라는 말이 빠진 것을 문제 삼는다.

    10.31 ‘그’는 마르키온이다. 마르키온의 복음서(누가복음을 잘라 낸 것)에서도 그리스도는 자신을 ‘인자’(filius hominis, 사람의 아들)라고 부른다(제4권 10장 참조).

    10.32 고린도전서 15:48. 개역개정은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앞 구절에서 ‘사람’을 보충해 읽고, ergo et(그렇다면 이렇게도 된다)로 10.33의 뒷구절에도 ‘사람’을 넣어 읽는다.

    10.33 고린도전서 15:48 후반. homo(사람)와 homines(사람들)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앞 구절과 짝을 맞추어 넣어 읽은 말이다.

    10.36 고린도전서 15:49. 개역개정은 미래형 ‘입으리라’(φορέσομεν)를 따르지만,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권유형 portemus(지니자, φορέσωμεν)로 되어 있으며, 이 읽기는 많은 그리스어 사본에도 있다. 10.37은 이 차이에 기대어 논증한다. Kroymann은 사본의 ullam을 illam(저)으로 고쳤다.

    10.37 ‘옛 사람’은 에베소서 4:22, 골로새서 3:9를 떠올리게 한다.

    10.38 고린도전서 15:50. 개역개정의 ‘혈과 육’을 caro=육신에 맞추어 ‘육신과 피’로 옮겼다. 갈라디아서 5:19-21은 육신의 일을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로마서 8:8이다.

    10.45 expiatio(속죄)를 Kroymann은 apparatus에서 사후의 정화(in purgatorio)로 설명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영혼에 관하여』 58에서 영혼이 부활 전에 하데스에서 작은 허물까지 갚는다고 말한다.

    10.48 고린도전서 15:51-52. in atomo는 그리스어 ἐν ἀτόμῳ(나눌 수 없는 것 안에서)를 옮긴 말로, 개역개정은 ‘순식간에’로 옮긴다. ‘눈이 깜박이는 사이에’는 in oculi momentaneo motu(눈의 순간적 움직임 속에)를 옮긴 것이다.

    10.49 고린도전서 15:53. ‘자기 육신을 붙잡고’는 그 사도가 ‘이’(hoc)라고 말하며 자기 몸을 가리켰다는 테르툴리아누스의 해석이다. 줄표로 시작한 삽입은 10.50의 ‘천사들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까지 이어진다.

    10.50 마태복음 22:30, 누가복음 20:36.

    10.51 ‘하나님이 그것에게 줄 몸’은 고린도전서 15:38(‘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을 되받는다.

    10.52 고린도전서 15:50. 10.38에서는 possidebunt(소유하다)로, 여기서는 consequentur(얻다)로 인용한다.

    10.53 apud creatorem은 창조주의 성경, 곧 구약을 가리킨다.

    10.54 고린도전서 15:54-55, 호세아 13:14. 개역개정은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다툼’(contentio)으로 읽는데, 이는 그리스어 νῖκος(승리) 대신 νεῖκος(다툼)로 읽은 본문에 해당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육신의 부활에 관하여』 47, 51, 54에서도 이 구절을 uictoria 없이 contentio로만 인용하며, Kroymann은 이 대목들을 근거로 uictoria, ubi를 [ ]로 묶었다. mors는 장 전체에서 ‘죽음’으로 옮겼다.

    10.55 Kroymann은 per prophetam 뒤에 <Osee>(호세아)를 보충했다.

    10.56 고린도전서 15:57. ‘죽음을 조롱하고 개가를 올리는 말씀’은 10.54의 호세아 13:14 인용을 가리킨다. Kroymann은 사본에 없는 <a>(…에게서)를 보충했다.

  11. 11 본문으로

    11.1 고린도후서 1:3. 그리스어 본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ὁ θεὸς καὶ πατήρ)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하는 본문(benedictus deus domini nostri Iesu Christi)에는 ‘아버지’가 없다. 개역개정은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로 옮긴다. Ursinus는 Christi 뒤에 <pater>를 보충했으나 Kroymann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창조주가 만물을 축복한 일은 창세기 1:22, 28, 만물이 창조주를 찬송하는 일은 칠십인역 다니엘 3:52-90(세 젊은이의 노래)을 가리킨다.

    11.2 Kroymann은 사본의 dei를 deus로 고쳐 sterilis deus를 아무것도 짓지 않은 마르키온의 신으로 읽고, nullius magis nomine quam creatoris를 삽입으로 보아 [ ]로 묶었다.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자비가 풍성하다’는 시편 103:8과 요나 4:2의 표현이다.

    11.3 Kroymann은 사본의 exemplo를 exemplum으로 고쳤고, cum ipso의 ipso를 요나 4:2의 “은혜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이라는 칭호로 풀이했다. 그래서 ‘그 칭호 자체와 함께’로 옮겼다. 니느웨는 요나 3:10, 히스기야는 열왕기하 20:5, 아합은 열왕기상 21:27-29, 다윗은 사무엘하 12:13, 죄인의 죽음보다 뉘우침을 원한다는 말은 에스겔 33:11이다. indulgens는 사본의 indulgere를 고친 Kroymann의 읽기다.

    11.5 Kroymann은 사본의 et nos를 nos et로 바꾸고, illum을 ‘자비의 아버지’로 풀이했다. 마르키온의 신이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때(티베리우스 15년, 제1권 19장)부터 그를 ‘자비의 아버지’라 부른다면, 그 계시 시점부터 이미 그 신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뜻이다. 사본에서 이 문장 뒤에 오던 non potest igitur ... adscribit를 Kroymann은 11.8 자리로 옮겼다.

    11.6 posset은 사본의 potest를 고친 Kroymann의 읽기다.

    11.7 accidens는 사물에 덧붙어 그 사물이 먼저 존재해야 성립하는 속성을 가리키는 철학 용어로, ‘부수적 속성’으로 옮겼다. ‘자비의 아버지’라는 칭호가 이런 속성이므로 그 신의 존재가 먼저 입증되어야 한다는 논증이다.

    11.10 enim은 Kroymann이 보충했다.

    11.11 고린도후서 3:6, 예레미야 31:31(새 언약의 약속), 고린도후서 3:3(돌판). Kroymann은 사본의 littera를 litterae(γράμματος)로, etsi를 et si로 고쳤고, eius를 ‘문자의’로 풀이했다. hoc erit nouitas를 삽입구로 표시하고 is를 보충했다.

    11.12 요엘 2:28(히브리어 본문과 칠십인역은 3:1).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 de meo spiritu는 사도행전 2:17의 형태와 같다. 이어지는 말은 고린도후서 3:6이다.

    11.13 신명기 32:39. ‘두 가지 힘’을 입증했다는 말은 제2권에서 창조주의 선함과 정의(심판)가 한 하나님에게 함께 속한다고 논증한 것을 가리킨다. uindicauimus는 Pamelius의 읽기다(사본 uindicamus).

    11.15 quae는 Rigaltius의 읽기다(사본 qui).

    11.16 고린도후서 3:13. uelamen은 개역개정을 따라 ‘수건’으로 옮겼다.

    11.17 고린도후서 3:7-11. claritas는 고린도후서 3장의 δόξα에 해당하는 말로, gloria와 구별하여 ‘광채’로 옮겼다.

    11.19 고린도후서 3:14.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하는 본문은 sensus mundi(세상의 생각)로, 그리스어 본문과 개역개정의 ‘그들의 마음’과 다르다. 마르키온파는 ‘세상의’를 세상을 지은 창조주와 연결하여 읽었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세상에 있는 백성, 곧 이스라엘로 풀이한다. Kroymann은 non utique에서 11.20의 eorum까지를 삽입구로 표시했다.

    11.20 고린도후서 3:14-15. figuram tum은 사본의 figuratum을 고친 Kroymann의 읽기다(Rigaltius는 figuram).

    11.21 고린도후서 3:14의 “오늘까지”(adhuc)를 받는다. 마르키온은 창조주의 그리스도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제3권 참조). 그렇다면 모세에게서 아직 가려진 것이 다른 신의 사도인 바울과 상관이 없다는 논증이다.

    11.22 apertius는 Kroymann이 고친 읽기다(M opertus, R3과 통용본 operta, Engelbrecht operta sunt). 통용본을 따르면 ‘가려진’이 유대인들의 마음을 꾸미는 말이 된다. Kroymann의 읽기를 따라 ‘더 드러내어 말하자면’이라는 삽입구로 옮겼다.

    11.24 고린도후서 3:16.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ad deum(하나님에게로)으로, 개역개정의 “주께로”와 다르다. intelleget은 사본의 intellegit을 고친 Kroymann의 읽기다.

    11.25 Kroymann은 apparatus에서 creatoris를 in Christo와, uelamentum을 dei alterius와 묶어 ‘창조주의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신의 수건이 어떻게 벗겨지겠는가’로 읽으라고 하고, 어순도 그렇게 고쳐 써야 할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번역은 전해진 어순대로 ‘다른 신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의 수건’으로 옮겼다. 이어지는 cuius 절의 ‘그 신’은 다른 신이다.

    11.26 고린도후서 3:18. qua는 imagine를 받는 것으로 보아 ‘모세도 변화되었던 그 형상’으로 옮겼다. 모세의 얼굴이 주의 영광으로 빛난 일은 출애굽기 34:29-35이다.

    11.27 고린도후서 3:18 끝부분.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tamquam a domino spirituum(영들의 주에게서 말미암은 것처럼)으로, 개역개정의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와 다르다. reuelatio는 수건(uelamen)을 벗긴다는 뜻과 계시라는 뜻을 함께 지니며, 여기서는 몸의 수건과 짝을 이룬다.

    11.28 고린도후서 4:4를 두고 끊어 읽기의 문제를 다룬다. distinctio는 문장을 어디서 끊어 읽는가를 가리킨다.

    11.29 고린도후서 4:4. 마르키온은 ‘이 세상의 신’을 창조주로 읽어 다른 세상에 속한 다른 신, 곧 자기의 선한 신과 대비했다.

    11.30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세상의’를 ‘신’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과 연결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의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눈멀게 했다’로 읽는다. 이레나이우스도 『이단 논박』 3.7.1에서 같은 끊어 읽기를 제시했다.

    11.31 고린도후서 4:3.

    11.32 이사야 29:13.

    11.33 이사야 6:9.

    11.34 이사야 7:9와 29:14. 앞의 인용은 칠십인역을 따른 형태로, 개역개정의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와 다르다. 뒤의 인용은 고린도전서 1:19의 형태와 같다.

    11.36 Kroymann은 사본의 etsi huius를 유지했다. Pamelius는 non huius(이 세상의 신이 아니라)로 고쳤다.

    11.37 Kroymann은 ultro 뒤에 결락을 표시하고, obsim(방해하지)이나 quid detraham(무엇을 덜어내지) 같은 말이 빠졌다고 추정했다. 통용본은 contentus uictoriae(승리에 만족하여)로 읽고, Engelbrecht는 결락 없이 ultra로 읽었다. 결락 자리에 **를 두었다.

    11.38 Kroymann은 simpliciori를 ‘더 단순한 사람에게’로 풀이하고, 사본의 responso를 responsu로, dominum을 deum으로 고쳤으며, esse를 ‘해도 된다’(licere)의 뜻으로 보았다.

    11.39 이사야 14:14, 13.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말을 마귀의 말로 읽는다. superstitio는 우상 숭배를 가리킨다.

    11.40 고린도후서 4:6. gloriae는 Kroymann이 보충했다. persona는 ‘얼굴’과 ‘인격’의 뜻을 함께 지니며, 고린도후서 4:6의 πρόσωπον과 11.43-45의 시편 인용에 맞추어 ‘얼굴’로 옮겼다.

    11.41 창세기 1:3. de는 Pamelius가 보충했고, inluminatione는 Pamelius의 읽기다(사본 inluminationem).

    11.42 이사야 49:6과 이사야 9:2(누가복음 1:79 참조).

    11.43 시편 4:6(라틴어 성경 4:7).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주의 얼굴의 빛이 우리 위에 새겨졌다’로, 개역개정의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와 다르다. Kroymann은 M과 F의 복수 respondent를 따랐으므로 spiritus를 ‘영들’로 옮겼다. R과 통용본은 단수 respondet로 읽어 ‘영이 대답한다’가 된다. inquit는 Kroymann이 삽입으로 보아 [ ]로 묶었다.

    11.44 ‘하나님의 얼굴은 주 그리스도다’는 칠십인역 예레미야애가 4:20(πνεῦμα προσώπου ἡμῶν χριστὸς κύριος)에 기댄 표현으로, 개역개정의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와 다르다. ‘그는 형상이다’는 고린도후서 4:4이며, 11.45의 ‘하나님의’까지가 한 인용이다.

    11.45 Kroymann은 Christus 뒤의 et를 삽입으로 보아 [ ]로 묶었다. et를 빼면 apostoli는 속격 단수가 되어 ‘사도의 그리스도’로 읽힌다. 번역은 [와]를 남기고 apostoli를 복수 ‘사도들’로 옮겨 사본의 구문을 따랐다. ‘끝 문장’은 11.40에서 인용한 고린도후서 4:6을 가리킨다.

    11.46 『라오디게아인들에게』는 마르키온의 사도서에서 에베소서에 붙은 제목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교회가 『에베소인들에게』라는 제목으로 받은 편지를 마르키온파가 이 제목으로 부른다고 말한다(제5권 17장 참조). 괄호는 11.48의 ‘분명하다’에서 닫힌다.

    11.47 에베소서 2:12. conuersatio는 그리스어 πολιτεία에 해당하여 ‘시민권’으로 옮겼다. deo는 Pamelius의 읽기다(사본 domino). etsi de creatore를 Kroymann은 ‘그 세상이 창조주의 것이라 하더라도’로 풀이했고, 번역은 이를 따랐다.

    11.48 deum은 사본의 dominum을 고친 Kroymann의 읽기이고, id est in corporibus도 그가 보충했다. 괄호가 닫힌 뒤의 물음은 고린도후서 4:7을 다룬다.

    11.49 고린도후서 4:7. iam은 사본의 nam을, sit는 사본의 sunt를 고친 Kroymann의 읽기다. ‘하나님의 영광’은 고린도후서 4:6의 표현을 받는다.

    11.51 고린도후서 4:8-10. mortificatio는 고린도후서 4:10의 νέκρωσις(죽어 감)에 해당한다.

    11.52 고린도후서 4:10-11.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예수의 생명’ 대신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11.54 고린도후서 4:18.

    11.55 고린도후서 4:16. corrumpi는 개역개정의 “겉사람은 낡아지나”를 따라 ‘낡아지다’로 옮겼다. ‘앞서 말한 수고와 괴로움’은 고린도후서 4:8-9를 가리킨다.

    11.56 고린도후서 4:16. non deficiemus는 개역개정의 “낙심하지 아니하노니”에 해당한다.

  12. 12 본문으로

    12.1 Kroymann은 문장 첫머리에 탈문을 표시하고 고린도후서 5:1에 따라 Ita et dissoluto tabernaculo(“그러므로 장막이 무너질 때에도”)를 보충하자고 제안했다. 전해진 속격 terreni domicilii nostri(땅에 있는 우리 거처의)를 그대로 옮겼다. Kroymann의 해설대로 non sic(…라는 뜻이 아니다)는 뒤의 quia절과 이어 읽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손으로 지은 것’, 곧 창조주가 지은 몸이 죽은 뒤 완전히 소멸한다는 마르키온파의 해석을 부정한다.

    12.2 고린도후서 5:2. 사본 MR의 manifestius 대신 Kroymann의 추정 manifestus(est)를 따라 “분명하다”로 옮겼다.

    12.3 고린도후서 5:3.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본문은 siquidem et despoliati non inueniemur nudi(“벗김을 당하더라도 벌거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을 것이므로”)로, 개역개정의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와 달리 ‘벗김을 당함’을 명시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벗었던 몸을 부활 때 다시 받는다는 뜻으로 읽는다.

    12.4 고린도후서 5:4.

    12.5 고린도전서 15:52. ‘첫째 편지’는 고린도전서다. “이미 죽은 이들이다”와 “하나님에게 붙들릴 이들이다”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 사이에 끼워 넣은 해설이다. reprehensi(붙들린)에는 deprehensi(발견된)라는 이문이 있고, 문장 끝 hic.과 다음 단위의 et illi는 Engelbrecht의 읽기를 따른 것이다.

    12.6 ‘저들’은 이미 죽은 자들, ‘이들’은 그리스도의 오심 때 살아 있는 자들이다. compendium mortis는 죽음을 단축하거나 생략하는 길이라는 뜻으로, 살아 있는 자들이 죽음을 거치지 않고 변화를 통해 썩지 않음에 이른다는 의미다. ‘적그리스도에게 당하는 고난’은 요한일서 2:18의 적그리스도와 종말의 환난을 가리킨다. sed mutati(변화된 채로)의 sed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et다.

    12.8 고린도전서 15:53.

    12.9 <아니다>는 R3의 보충 non을 옮긴 것이다. 이 보충이 없으면 사도가 “경솔하게 말했다”는 뜻이 되어 문맥과 맞지 않는다.

    12.10 고린도후서 5:4. “이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진다”는 개역개정의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에 해당한다. uita praeueniri는 죽음이 오기 전에 생명이 먼저 와서 앞지른다는 뜻이다.

    12.11 고린도후서 5:5-8. arrabo(보증)는 개역개정 5:5의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에 해당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5:6의 “몸으로 있을 때에는”을 in carne(육신 안에 있는 동안)로 읽는다. mortis ... praeuentu는 그리스도의 오심보다 죽음이 먼저 닥치는 경우를 가리킨다.

    12.12 고린도후서 5:10.

    12.13 cum domino(주와 함께)는 Kroymann의 추정이고, 사본 MR은 cum deo(하나님과 함께)다. 심판대에서 보상이 이루어진다면 그 전에 이미 주와 함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들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12.14 corporalem(몸을 지닌)은 Kroymann의 추정이다. 사본 M과 R1은 temporalium, R3과 이전 판본들은 corporum을 읽는다. dispunctio는 회계의 결산을 뜻하는 말로 ‘결산’으로 옮겼다. utriusque sententiae iudicem(두 가지 판결을 다 내리는 재판관)은 상과 벌을 모두 선고하는 재판관이라는 뜻으로, 선하기만 한 신을 내세우는 마르키온에 맞서 심판자가 선함과 정의를 함께 지닌다는 논점을 겨냥한다.

    12.16 deus 뒤에 마침표가 찍혀 있지만 si절이 앞 문장의 조건이므로 한 문장으로 옮겼다. per id punitur는 R의 읽기이고, M은 perdit punit, F는 periit punitur다.

    12.17 고린도후서 5:17. conditio는 condere(짓다)에서 온 말로 ‘지음’, 곧 피조물을 뜻한다.

    12.18 이사야 43:18-19(“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의 성취를 말한다. 이어지는 명령은 고린도후서 7:1인데 개역개정의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과 달리 테르툴리아누스는 inquinamentum carnis et sanguinis(육신과 피의 더러움)로 읽으며, 이는 고린도전서 15:50의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를 겨냥한다. Kroymann은 substantiam 뒤에 탈문을 표시하고 non substantiam <negat, sed opera substantiae>, 곧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한다고 그가 부정하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실체의 행위들이다”라는 보충을 제안했다. Migne 판은 substantium으로 읽으며 Engelbrecht가 이를 지지했다.

    12.19 고린도후서 11:2. imago(형상)는 교회와 그리스도를 신부와 신랑에 견주는 혼인의 비유를 가리킨다. 혼인을 금한 마르키온의 신은 그 비유의 실재인 혼인에 적대하므로, 사도가 쓴 이 형상이 그 신과 이어질 수 없다는 논지다.

    12.20 고린도후서 11:13. 개역개정의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과 달리 테르툴리아누스는 transfiguratores sui(자기를 가장하는 자들)로만 인용한다. 거짓 사도들이 고발당한 것은 다른 신을 선포했기 때문이 아니라 행실 때문이라는 것이 테르툴리아누스의 해석이다.

    12.21 고린도후서 11:14. transfigurare se in angelum lucis는 개역개정을 따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로 옮겼다. disciplina는 행실과 생활 규범을, diuinitas는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 하는 신성의 문제를 가리킨다.

    12.22 deum lucis는 가정된 칭호이므로 ‘광명의 신’으로 옮겼다. 12.22-23은 한 문장이다. 사도가 창조주를 가리켰다면 ‘천사’가 아니라 ‘신’이라고 했을 것이라는 논리다.

    12.24 고린도후서 12:2-4에서 바울이 낙원으로 이끌려 간 일을 말한다. 『낙원에 관하여』(De paradiso)는 테르툴리아누스가 낙원에 관해 따로 쓴 저술로, 현재 전하지 않는다. suus stilus는 이 주제를 다룬 별도의 저술을 뜻한다.

    12.25 dispositio는 세상을 짓고 질서 지우는 경륜을 뜻하며, 마르키온의 신이 땅에 속한 것을 아무것도 짓지 않았다는 점을 겨냥한다.

    12.26 precario는 남의 허락을 얻어 빌려 쓰는 것을 뜻하는 법률 용어다.

    12.27 열왕기하 2:11. 고린도후서 12:2의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에 대응한다.

    12.28 고린도후서 12:7-8. angelus satanae는 개역개정을 따라 “사탄의 사자”로 옮겼다. angelus는 앞의 ‘천사’와 같은 단어다. colaphizare는 “주먹으로 치다”를 뜻한다.

    12.29 누가복음 1:52(“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aemulari는 ‘질투하다’로 옮겼다.

    12.30 욥기 2:6과 고린도후서 12:9(“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ipse는 마르키온의 신을 가리킨다. 사도를 사탄의 사자에게 맡긴 그 신이 욥을 사탄에게 맡긴 창조주와 같은 존재가 아니냐는 반문이다.

    12.31 고린도후서 13:1과 신명기 19:15. ‘갈라디아 사람들을 꾸짖은 이’는 율법의 행위를 문제 삼은 갈라디아서의 저자 바울이다.

    12.32 고린도후서 13:2, 10. in praesentia는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직접 가 있을 때를 뜻한다. 개역개정 13:10의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게 대하지 않으려 함이라”에 해당한다.

  13. 13 본문으로

    13.1 이 장부터 마르키온의 사도서 모음에서 네 번째 편지인 로마서를 다룬다. quanto는 quanto magis의 뜻으로 보아 ‘마무리되어 갈수록’으로 옮겼다. quaedam uero et tramittenda는 M의 읽기이며, R1은 extra mittenda로 읽는다.

    13.2 concessio legis는 율법이 양보하고 물러나는 일, 곧 율법의 효력이 그침을 뜻하므로 ‘율법의 물러남’으로 옮겼다. qui totiens probauerim은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quotiens probat uera로 읽는다. <이>는 Kroymann이 보충한 ista를 옮긴 것이다.

    13.4 로마서 1:16. 13.5까지 인용이 이어진다.

    13.5 로마서 1:16-17과 1:18. 개역개정의 ‘먼저는 유대인에게요’에 있는 ‘먼저’(primum)가 이 인용에는 없다. 테르툴리아누스는 ex fide in fidem을 율법의 믿음에서 복음의 믿음으로 옮겨 가는 일로 풀이한다. 인용 안의 iustitia dei는 로마서의 표현이므로 ‘하나님의 의’로, 마르키온의 구분에서 선한 신과 맞세워진 iustus deus는 ‘정의로운 하나님’으로 옮겼다. <하나님의>는 Pamelius가 보충한 dei, <안에>는 R3가 보충한 in이다.

    13.7 로마서 2:2. 개역개정은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로 옮긴다.

    13.8 ulciscitur의 목적어가 ueritatem이므로 ‘진리를 위해 보복한다’로 옮겼다. 창조주가 남의 신의 진리를 위해 분노할 리 없다는 반어이다.

    13.9 foueae(구덩이)는 마르키온이 본문을 떼어 내어 생긴 빈자리를 가리킨다. 이 장의 인용은 로마서 1-2장에서 3:21, 5장, 7장으로 건너뛰는데,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의 로마서에서 큰 부분이 삭제되었다고 본다. auferendo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aut referendo로 읽는다.

    13.11 로마서 2:12, 2:14, 2:16. ‘율법 안에서 범죄한’은 개역개정의 ‘율법이 있고 범죄한’에 해당한다. <비록>은 Kroymann이 보충한 etsi를 옮긴 것이며, 이어지는 at도 Kroymann의 추정이다(M과 R은 et hi legem ignorant et). Ciacconius는 ignorantes로 고쳐 읽는다. iudicabit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iudicauit로 읽는다.

    13.12 로마서 2:16. 개역개정의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에서 ‘나의’(meum)가 이 인용에는 없다. a deo는 Latinius의 읽기이고(M과 R은 adeo), de quo는 Kroymann의 추정이다(M과 R은 dei quod). uindicare는 ‘변호하다’와 ‘보복하다’의 뜻을 함께 지니는데, 주어가 율법과 본성이므로 ‘옹호되다’로 옮겼다.

    13.13 ‘진리를 따른다’는 13.7에서 인용한 로마서 2:2를 다시 가리킨다. ‘앞의 문장’(pristinus sensus)은 로마서 2:2, ‘이 문장’(hic sensus)은 로마서 2:16이다. <이것들을> 옹호하기 <위해>는 Kroymann이 보충한 <ad> defendenda <ea>를 옮긴 것으로, ea는 앞에서 말한 율법과 본성을 가리킨다. 사본은 defendenda만 전하며, Engelbrecht는 defendenda <ea>로 보충하고 ea를 진리로 본다.

    13.14 로마서 2:21과 출애굽기 12:35-36(3:22, 11:2 참조).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인들에게서 금은 패물을 구해 가지고 나온 일을 마르키온 쪽은 창조주가 사기를 명한 증거로 들었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제2권 20장에서 이 비난에 답했다. retorquent의 주어는 마르키온파이다.

    13.15 scilicet로 시작하는 반어이다. 사도가 창조주를 떠났다면 그를 공공연히 비난하는 것을 꺼릴 이유가 없었으리라는 뜻이다.

    13.16 로마서 2:24. 바울은 이사야 52:5를 인용한다. incesserat는 R3의 읽기이고 M과 R1은 ingesserat로 읽는다.

    13.18 로마서 2:29. 사본의 praeputiationi는 뜻이 통하지 않아 Kroymann이 praeputi. atenim으로 고쳐 읽었고, praeputi는 praeputii(포피의)이다. 13.19의 예레미야 4:4 ‘마음의 포피’에 맞추어 ‘마음의 포피에 행하는 할례’로 옮겼다. ‘율법의 하나님에게서’(apud deum legis)는 마르키온의 신이 아니라 율법을 준 하나님에게서라는 뜻이다.

    13.19 예레미야 4:4, 신명기 10:16, 로마서 2:28-29. 신명기 10:16의 라틴어 duricordia는 칠십인역의 σκληροκαρδία(완고한 마음)를 따른 것으로, 개역개정은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로 옮긴다. 두 인용의 circumcidemini는 미래형이나 명령의 뜻이므로 명령문으로 옮겼다. Moysei는 Kroymann의 추정이고 M과 R은 moyses로 읽는다.

    13.20 로마서 3:21-22를 요약한 문장이다. per fidem Christi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로 옮겼다.

    13.21 dispositio는 하나님이 시대에 따라 일을 배열하고 다스리는 계획을 뜻하므로 ‘경륜’으로 옮겼다.

    13.23 dispositionum은 Pamelius의 읽기이고 M과 R은 dispositio nunc로 읽는다.

    13.24 로마서 5:1. 그리스어 사본 사이에 ἔχομεν(가지고 있다)과 ἔχωμεν(가지자)의 차이가 있으며, 개역개정은 ‘화평을 누리자’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monet(권한다)로 받아 권고로 읽는다. numquam은 M의 읽기이고 R은 nusquam으로 읽는다.

    13.26 로마서 5:10(‘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을 염두에 둔 문장이다.

    13.27 로마서 5:20. subintroiuit(παρεισῆλθεν)는 ‘곁으로 슬며시 들어왔다’는 뜻이어서 ‘슬며시 들어온’으로 옮겼다. 둘째 인용 ‘은혜가 더욱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는 개역개정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를 목적절로 요약한 형태이다.

    13.28 로마서 5:21. 라틴어는 in uitam이어서 개역개정의 ‘영생’ 대신 ‘생명’으로 옮겼다. <아래에서>는 Kroymann이 보충한 apud를 옮긴 것으로, 앞의 apud ipsum(그 자신 아래에서)과 짝을 이룬다. aemulus는 질투(aemulatio)와 같은 어근이지만 여기서는 맞서는 경쟁자를 가리키므로 ‘경쟁하는 신’으로 옮겼다.

    13.29 갈라디아서 3:22(로마서 11:32 참조), 로마서 3:19, 3:27. 문장 끝의 느낌표는 Engelbrecht의 구두점을 따른 것으로, 마르키온의 해석을 따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는 반어이다.

    13.30 ‘뒤따를 문제’는 14장에서 다루는 로마서 8:3의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가리킨다.

    13.31 로마서 7:4.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는 Kroymann이 『일부일처제에 관하여』(De monogamia) 13장의 같은 인용을 근거로 보충한 per corpus Christi를 옮긴 것이다. 이 보충이 없으면 뒤따르는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는 몸이 있다’의 근거가 문장 안에 없다.

    13.32 따옴표 안의 문장은 마르키온파의 반론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곧 육신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est. potest는 Kroymann의 추정이고 M과 R은 et potest, Engelbrecht는 et<si> potest로 읽는다. ‘죽음의 법이 선고된 육신’은 창세기 2:17과 3:19에서 사람에게 내려진 죽음의 선고를 가리키며, 여기서 lex는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그 선고이므로 ‘법’으로 옮겼다. ‘그 몸의 주인’은 로마서 7:4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이’이다.

    13.34 로마서 7:7. 개역개정은 마지막 문장을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았다면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로 옮긴다. 줄표 사이는 테르툴리아누스가 마르키온에게 하는 말이다. Kroymann은 그 안의 둘째 absit를 후대의 삽입으로 보아 [ ]로 묶었다. 이를 [그럴 수 없다며]로 옮겼다. 이 장에서 delictum은 ‘범죄’, peccatum은 ‘죄’로 옮겼다.

    13.35 <없었다>는 Kroymann이 보충한 non을 옮긴 것이다. 보충이 없으면 ‘율법을 통해 범죄가 숨어 있을 수 있었다’가 되어 율법에 대한 찬사가 성립하지 않는다.

    13.36 로마서 7:8, 7:11. 개역개정은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로 옮긴다.

    13.37 로마서 7:12. 인용 안의 iustum은 로마서의 표현이므로 ‘의롭다’로 옮겼다. 13.38에서는 같은 iustus가 마르키온의 ‘정의로운 신’과 ‘선한 신’의 구분에 쓰이므로 ‘정의롭다’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논증은 계명이 iustum이면서 bonum이라는 데 기대고 있다.

    13.39 로마서 7:14. spiritalis를 ‘영적’으로, figurata를 ‘예표적’으로 옮겼다.

    13.40 율법 안의 예표를 통해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논증은 제3권과 제4권에서 길게 전개되었다.

  14. 14 본문으로

    14.1 로마서 8:3. similitudo는 바울 본문에서는 ‘모양’이고, 14.10-14.15의 논증에서는 ‘닮음, 같음’의 뜻으로 쓰인다. 같은 낱말의 두 뜻에 논증이 기대고 있으므로 전체를 ‘모양’으로 통일했다. 마르키온은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육신이 환영(phantasma)이라는 근거로 썼다.

    14.2 로마서 7:23. lex sensus는 개역개정의 ‘마음의 법’에 맞추었다. supra는 앞선 로마서 7장의 논의를 가리킨다.

    14.3 테르툴리아누스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실체는 같은 육신이고 죄만 없는 육신이라는 뜻으로 읽는다. 같은 해석이 『그리스도의 육신에 관하여』 16에도 나온다.

    14.7 14.7-14.9의 ‘죄 있는’은 라틴어 peccati(죄의)를 옮긴 것이다. 그 사도가 carnis(육신의)에 peccati를 덧붙였으므로 ‘모양’은 실체가 아니라 죄에 걸린다는 논증이다.

    14.11 si는 Kroymann이 보충했다. ‘씨에서 난 것이 아니다’는 그리스도가 남자의 씨 없이 처녀에게서 났다는 뜻이다.

    14.12 MR은 simili sed uera로 읽고, Kroymann은 Latinius를 따라 similis et uera로 고쳤다. 뒷부분 de censu non uero dissimilis는 non 다음에 similis를 보충하고 uero를 ‘오히려, 그러나’로 읽어 ‘기원으로는 비슷하지 않고 오히려 다르다’로 옮겼다. 앞 문장의 ‘씨에서 난 것은 아니다’와 맞는 읽기다.

    14.15 로마서 8:8-9(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을 가리킨다. 그 사도가 ‘육신 안에 있지 않음’을 ‘육신의 일 안에 있지 않음’으로 풀이한다는 것이 논거다.

    14.16 고린도전서 15:50. 이 구절은 앞의 10장에서 길게 다루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로마서 8장의 ‘육신 안에 있지 않음’을 근거로, 이 구절도 육신의 실체가 아니라 육신의 일을 정죄한다고 읽는다.

    14.17 quia는 R3에서 보충되었다. conuersatio는 ‘생활, 행실’이다.

    14.18 로마서 8:10. 이 절에서 iustitia는 성경 본문의 ‘의’로 옮겼다. 줄표 사이의 삽입은 Kroymann이 표시했다. 사본에 빠진 부분은 Ursinus가 ‘분명히 의 때문에 생명이 올 것이다’(ei utique obueniet uita propter iustitiam)로 보충했다. 보충을 따르면 문장은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이라면, 죄 때문에 죽음이 닥친 쪽, 곧 몸에게 분명히 의 때문에 생명이 올 것이다’가 된다.

    14.19 alii quid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alicui다. 쉼표는 Kroymann을 따라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인 이상, 몸들의 부활’로 끊었다. 이전 판본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은, 몸들의 부활인 이상’으로 끊었다.

    14.20 로마서 8:11. 사본 MR1은 uiuificauit(살렸다)이고 R3의 uiuificabit(살릴 것이다)를 따랐다.

    14.21 두 번의 aliquid(어떤 것)는 Kroymann이 사본의 aliud(다른 것)를 고친 것이다.

    14.22 nostra(우리의)는 R의 읽기이고 M은 uestra(너희의)다.

    14.23 로마서 10:2. 테르툴리아누스는 로마서 8:11에서 곧바로 10:2로 넘어가며, 그 사이를 ‘잘려 나간 성경의 아주 넓은 낭떠러지’라고 부른다. 마르키온의 사도서에서 로마서 9장 전체를 포함한 이 부분이 빠져 있었다는 뜻이다. zelus는 이 책에서 대개 하나님의 ‘질투’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로마서 10:2의 ‘열심’을 옮겼다. ‘자기들의 하나님’(sui)은 유대인들이 열심을 낸 대상이 그들이 아는 창조주라는 뜻이다.

    14.24 로마서 10:3. 개역개정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이지만, 마르키온의 본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deum ignorantes)로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Kroymann). 14.25의 이단자의 논증이 이 읽기에 기대고 있다.

    14.25 로마서 10:4.

    14.26 dispositiones는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을 뜻한다. ‘율법에 완성을 세워 줄 그리스도’는 14.25의 ‘율법의 마침’(finis legis)을 완성의 뜻으로 받는다.

    14.28 이사야 1:3. Gelenius는 populus 뒤에 meus(나의)를 보충했다.

    14.29 마태복음 15:9, 이사야 29:13. 이어지는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모였다’는 시편 2:2다.

    14.31 ‘자기들의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자기들이 알지 못하던 신’은 마르키온의 신이다. 유대인들이 알 수 없던 신을 몰랐다는 것은 잘못이 될 수 없으므로, 그 사도가 꾸짖은 무지는 창조주에 대한 무지라는 논증이다.

    14.32 로마서 11:33. Kroymann은 마르키온의 사도서에 이 절이 줄어든 형태로 있었다고 본다. 개역개정의 ‘지식’과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가 빠져 있다. 사본의 inuestigabiles는 in-을 부정 접두사로 읽어 ‘찾을 수 없는’으로 옮겼다. Pamelius는 ininuestigabiles로 고쳤다.

    14.33 ista는 Jun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irae(분노의)다. ‘앞에서 펼쳐 읽어 온 성경’과 ‘위에서 풀이했던 신비’는 마르키온의 사도서에서 빠진 로마서 9-11장의 구약 인용과 이스라엘에 관한 논의를 가리킨다.

    14.34 Ursinus는 erasit 앞에 non을 넣어 ‘지우지 않았다면’으로 읽었다. Kroymann은 사본대로 ‘지워 버렸다면’을 유지했다. ‘남의 영역으로 내려온 자’는 창조주가 만든 세상에 내려온 마르키온의 신을 가리킨다.

    14.35 사본 MR1은 apostolus(사도)이고, R3와 이전 판본들은 opes(재물)로 읽었다. Kroymann은 apostolus를 유지하고 ‘사도도 창조주의 것이고, 부요도 창조주의 것’으로 해석한다.

    14.36 이사야 45:3.

    14.38 ‘이것은 이사야의 말’은 앞 문장의 보화가 열렸다는 표현이 이사야 45:3에서 왔다는 뜻이다. instrumentum은 문서, 책이다.

    14.39 로마서 11:34, 이사야 40:13. eius는 R3에서 보충되었다.

    14.40 로마서 11:35. Kroymann은 14.39-14.40의 인용을 이사야 40:13-14와 연결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14.38에서 이 인용을 이사야의 책에서 온 것으로 소개한다.

    14.41 로마서 12:9. 사본 M의 여백에 첫 필사자가 antifrasin(반어)이라고 적었다. ‘창조주에게는 물론 다른 말이 있다’는 반어로, 이어지는 구약 인용이 같은 내용임을 드러낸다. 14.43-14.44의 ‘같은 것이 아니다’도 같은 반어다.

    14.42 고린도전서 5:13(신명기 17:7; 21:21)과 시편 34:14(라틴어 시편 33:15).

    14.43 로마서 12:10.

    14.44 레위기 19:18, 로마서 12:12, 시편 118:8-9(라틴어 117:9).

    14.45 로마서 12:12와 시편 20:1(라틴어 19:2). habes psalmum(그대에게 그 시편이 있다)은 Engelbrecht가 후대의 덧붙임으로 보아 [ ]로 묶었다.

    14.46 로마서 12:14. ‘만물을 축복으로 지은 이’는 창세기 1:22, 28에서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복을 준 것을 가리킨다.

    14.47 로마서 12:16과 이사야 5:21(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adsectantes는 M의 읽기이고 R은 assentantes다.

    14.48 로마서 12:17과 스가랴 7:10.

    14.49 로마서 12:19, 신명기 32:35.

    14.50 로마서 12:18. hominibus는 Pamelius가 두 사본 전통을 합쳐 omnibus hominibus로 읽은 것이다. talio(동해 보복)는 출애굽기 21:24의 ‘눈은 눈으로’ 규정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제2권 18장에서도 이 규정이 보복을 허락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복을 두려워하게 하여 해악을 막으려는 것이었다고 논한다.

    14.51 로마서 13:9, 레위기 19:18. conclusit는 로마서 13:9의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ἀνακεφαλαιοῦται)에 해당하여 ‘요약했다’로 옮겼다.

    14.52 supplementum은 로마서 13:10의 ‘율법의 완성’(πλήρωμα)을 받는다. 14.52-14.53은 반어다. 율법을 완성하는 계명이 율법 자체에서 나왔으니, 마르키온의 신이 율법의 하나님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는 조롱이다.

    14.53 Christi autem non est creatoris는 ‘그리스도의 것은 창조주의 것이 아니다’라는 마르키온의 전제를 가정으로 세운 것으로 옮겼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율법의 계명으로 완성된다면 그 전제는 스스로 무너지므로 더 다툴 것이 없다는 논증이다.

    14.54 마태복음 5:17. 이 구절은 마르키온이 받아들인 누가복음에는 없다. non은 Engelbrecht가 보충했다. Ponticus(폰토스 사람)는 폰토스의 시노페 출신인 마르키온을 가리킨다. 사본 MR은 Pontus이고, Ponticus는 R1의 여백, Pamelius, Rigaltius의 읽기다. Engelbrecht는 laborauit(애썼다) 대신 laborabit(애쓸 것이다)를 선호했다.

    14.55 로마서 14:10. clausula(끝맺는 대목)는 마르키온의 로마서 끝부분을 가리킨다. 오리게네스(루피누스 라틴어 역 『로마서 주석』 10.43)는 마르키온이 로마서 14:23 이후를 모두 잘라 냈다고 전한다. promerendum은 ‘호의를 얻어야 할, 은혜를 구해야 할’ 대상이라는 뜻이다.

  15. 15 본문으로

    15.1 15장은 마르키온의 사도서에서 로마서 다음에 오는 데살로니가전서를 다룬다.

    15.2 데살로니가전서 2:15. 개역개정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로 되어 있어 “자기”가 없다. 15.5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suos(자기)를 마르키온이 덧붙인 말로 본다. 후대 비잔틴 계열 그리스어 사본에도 τοὺς ἰδίους προφήτας(자기 예언자들)라는 읽기가 있다.

    15.4 laesus는 ‘손상, 피해’를 뜻하는 명사(= laesura)로 보아 ‘피해’로 옮겼다. Kroymann은 이 낱말이 다른 곳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삽입일 가능성을 열어 둔다. 이 낱말이 없으면 ad quem pertinet의 주어는 ‘불의’가 되어 ‘그 불의가 관계되는 이’가 된다. exprobrabit는 Junius의 교정이다(사본 exprobrauit).

    15.7 status는 수사학 용어로 논쟁의 쟁점을 뜻한다. 여기서는 주와 예언자들을 함께 죽였다고 말하는 것이 죄를 가중하려는 논법이라는 뜻이어서 ‘죄를 가중하는 논법’으로 옮겼다. est는 Kroymann의 보충이다.

    15.8 impietatem은 Kroymann의 교정이다(사본 impietates). aequauit와 exaggerauit의 주어는 다른 신의 사도로 상정된 바울이다. 두 신에게 각각 저지른 죄는 서로 대등하게 나열될 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무겁게 만들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15.9 deum은 Kroymann의 교정이다(사본 dominum, ‘주’).

    15.10 데살로니가전서 4:3. agnoscere est는 Kroymann의 교정이다(사본 agnosceres). 15.10의 줄표부터 15.12 끝의 줄표까지를 Kroymann은 삽입구로 표시했고, 번역에서도 줄표로 표시했다. stuprum은 개역개정 4:3의 ‘음란’에 맞추어 옮겼다.

    15.11 데살로니가전서 4:4-5. uas(그릇)는 그리스어 σκεῦος를 옮긴 말이며, 개역개정은 4:4에서 이를 ‘자기의 아내’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그릇을 혼인 안에서 존귀하게 다루어야 할 몸으로 읽는다(15.13).

    15.12 luxuriae -: est는 Kroymann의 교정이다(사본 luxuria est). 그는 15.13 첫머리 est의 생략된 주어를 15.10의 sanctitas(거룩함)로 보며, 번역도 15.13의 주어를 ‘그 거룩함’으로 옮겼다. 다른 읽기로는 lex uxoria est(Latinius), <lex naturae> luxuriae est(Oehler), <sanctitas> luxuriae est(Ursinus)가 있다.

    15.13 quaque는 Kroymann의 교정이다(사본 quoque). contraria는 M과 R3의 읽기이고 R1은 non contraria로 되어 있다.

    15.14 ‘다른 거룩함, 곧 더 온전한 거룩함’은 절제와 동정을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동정을 혼인보다 높이 두면서도 혼인 자체를 금하는 마르키온의 입장을 반박한다.

    15.15 dei nuptiarum은 하나님에게 속한 혼인, 곧 창조주가 제정한 혼인을 뜻한다고 보아 ‘하나님의 혼인’으로 옮겼다. 마르키온은 세례 받는 이들에게 혼인을 금했다. 인용은 데살로니가전서 4:15-17이다. aërem은 Pamelius의 교정이다(사본 aere).

    15.16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갈라디아서 4:26을 따른 표현이다.

    15.17 이사야 60:8. 개역개정은 비둘기가 보금자리로 날아가는 모습으로 옮겼으나,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는 칠십인역(ὡσεὶ περιστεραὶ σὺν νεοσσοῖς ἐπ' ἐμέ)을 따라 ‘새끼들과 함께 나에게’로 되어 있다.

    15.18 praeparabit는 Engelbrecht의 교정이다(사본 praeparauit). 다음 인용은 아모스 9:6이다. 사본은 Osee(호세아)로 되어 있고 Junius는 Amos로 고쳤으나, Kroymann은 이 책의 다른 대목에 있는 같은 혼동을 근거로 사본 읽기를 유지한다. 번역은 사본대로 ‘호세아’로 옮겼다.

    15.19 아모스 9:6. 개역개정은 “그의 궁전을 하늘에 세우시며”로 되어 있다. 칠십인역은 ὁ οἰκοδομῶν εἰς τὸν οὐρανὸν ἀνάβασιν αὐτοῦ(하늘로 자기의 올라가는 길을 세우는 이)이며, 테르툴리아누스의 ascensum도 이를 따른다.

    15.21 데살로니가전서 5:19-20. 개역개정은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이다. nihil haberi(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다)는 그리스어 ἐξουθενεῖτε를 직역한 말이어서 직역을 살렸다.

    15.22 destruit의 주어는 다른 신의 사도로 상정된 바울이다. 마르키온의 전제대로라면 그 사도는 창조주의 영과 예언을 이미 꺼뜨리고 무효로 만든 셈이므로, 그것들을 소멸하거나 멸시하지 말라고 금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ipse는 Kroymann의 교정이다(사본 nihil). Gelenius는 destruit를 destruxit로 고쳤다.

    15.24 ‘마음에 숨은 것들을 드러내며’는 고린도전서 14:25, ‘신비들을 풀어 설명하기’는 고린도전서 14:26을 반영한다. prouocaturos는 R3의 읽기이다(M, R1 prouolaturos).

    15.25 secundum ipsum의 ipsum은 창조주로 보아 ‘창조주를 따라’로 옮겼다.

    15.26 영이 일한다는 표현은 고린도전서 12:11을 반영한다. promissio celebratur는 약속된 영의 은사가 교회에서 실제로 행해진다는 뜻으로 보아 ‘약속도 이루어진다’로 옮겼다. qui는 R3의 읽기이다(M, R1 quod).

    15.27 데살로니가전서 5:23. 개역개정은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 흠 없게 보전되기를”의 순서이나 테르툴리아누스는 ‘영과 몸과 영혼’의 순서로 인용한다. 구원을 비는 바울의 기원(uotum)에 몸이 포함되므로 육신도 구원받는다는 논증이다. in nobis substantias는 Zahn의 교정이다(사본 in nouis substantiis). salutificatoris는 R3의 읽기이다.

    15.29 [et]는 Kroymann이 삭제한 말이어서 ‘[또한]’으로 옮겼고, <autem>은 그의 보충이어서 ‘<그런데>’로 옮겼다. 영혼도 그 나름의 성질을 지닌 몸이라는 견해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영혼에 관하여』에서 자세히 논한다.

    15.31 cum quae는 R3의 읽기이고(M, R1 cumque), nomine는 R의 읽기이다(M nominatur). 이 구절에서는 ‘몸’이 영, 영혼과 나란히 따로 이름이 붙어 있으므로 육신을 가리킨다는 뜻이다.

  16. 16 본문으로

    16.1 16장은 데살로니가후서를 다룬다. 인용은 데살로니가후서 1:6-8이다. utriusque meriti(두 가지 공과)는 선행에 대한 보상과 악행에 대한 벌을 함께 가리킨다. reuelatione는 R의 읽기이다(M reuelationem). 1:8의 in flamma ignis(ἐν πυρὶ φλογός)는 ‘타오르는 불 가운데’로 옮겼다.

    16.2 테르툴리아누스에 따르면 마르키온은 데살로니가후서 1:8의 ‘타오르는 불 가운데’를 지웠다. extinxit(껐다)는 불이라는 낱말을 지운 일을 불을 끈 일에 빗댄 말놀이이며, 16.3의 lucet(빛나다)도 같은 비유를 잇는다. nostratem deum은 ‘우리 편의 하나님’, 곧 정통 교회가 섬기는 창조주를 뜻한다.

    16.3 데살로니가후서 1:8-9. 개역개정 1:9는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이다.

    16.4 crematoris(불사르는 이의)와 creatoris(창조주의)는 소리가 비슷한 말놀이이다. 둘째 [est]는 Kroymann이 삭제한 말이어서 ‘[이다]’로 옮겼다. ethnici는 이방인들을 뜻한다.

    16.5 Kroymann은 여기에 탈문이 있다고 보고 deum ignorantes, id est ethnicos, seorsum(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곧 이방인들을 따로, 또)을 보충할 것을 제안한다. 데살로니가후서 1:8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나누어 든다.

    16.6 마르키온의 신은 창조 세계를 통해 알려지지 않고 복음으로만 계시되었다는 마르키온의 주장을 겨냥한 논증이다.

    16.8 ignorari는 M의 읽기이다(R ignorare).

    16.9 데살로니가후서 1:9; 이사야 2:10, 19, 21. ‘땅을 부수려고 일어나는’은 칠십인역 이사야 2:19, 21의 ὅταν ἀναστῇ θραῦσαι τὴν γῆν을 따른 표현이다. Esaiae et ex ipsa causa는 Kroymann의 교정이며, 그는 ipsa를 eadem(같은)의 뜻으로 보아 이에 따라 ‘같은 이유로’로 옮겼다(사본 Esaiae, ex ipsa causa).

    16.10 데살로니가후서 2:3-4. consessurus는 Pamelius의 교정이다(사본 consecuturus). religio는 개역개정 2:4의 ‘숭배함을 받는 것’에 해당하는 말이어서 ‘숭배’로 옮겼다.

    16.11 요한일서 4:1-3과 요한일서 2:18 참조. soluentes Iesum(예수를 해체하는)은 요한일서 4:3의 고대 라틴어 역본과 일부 그리스어 전승의 읽기 λύει τὸν Ἰησοῦν을 따른 표현이다(개역개정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scilicet in deo creatore는 예수를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떼어 놓는다는 뜻이다. ueteres ac nouae prophetiae는 ‘옛 예언과 새 예언’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작품의 제3권 24장(novae prophetiae sermo)과 제4권 22장(in causa novae prophetiae)에서 ‘새 예언’이라는 말로 몬타누스 운동의 예언을 가리킨다.

    16.12 enim은 Ursinus의 보충이다. nescio ne는 ‘혹시 ...가 아닐까 싶다’는 뜻이다. 마르키온은 창조주의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을 위해 장차 올 것이라고 보았으므로, 그의 체계에서는 이 ‘죄의 사람’이 창조주의 그리스도일 수 있다는 논리이다.

    16.13 데살로니가후서 2:9. quisquis는 Latinius의 교정이다(사본 cuiusquis).

    16.14 데살로니가후서 2:10. 개역개정은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이다. ut salui essent를 목적절로 보아 옮겼다.

    16.15 데살로니가후서 2:11-12. <in>과 <credant mendacio, ut>는 Kroymann의 보충이다. 정경 본문은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πέμπει αὐτοῖς ὁ θεὸς ἐνέργειαν πλάνης)이나, Kroymann은 마르키온의 사도서가 καὶ διὰ τοῦτο ἔσται αὐτοῖς εἰς ἐνέργειαν πλάνης(그리고 이 때문에 그것이 그들에게 미혹의 역사가 될 것이다)로 되어 있었다고 추정한다. 이 경우 ‘하나님이 보낸다’는 주어가 마르키온의 본문에 없었던 셈이다.

    16.16 est secundum creatorem은 Migne 판의 읽기이다(사본 et secundum creatorem, Ursinus est secundum nos et).

    16.17 eas는 Oehler의 교정이며(사본 ea, Pamelius ex), 진리와 구원을 가리킨다. 진리와 구원이 멸시받은 것을 미혹을 보냄으로써 갚는다는 뜻이다. decipere(속이다)와 cepit(사로잡았다)는 같은 어근을 이용한 말놀이이다.

    16.18 라틴어 본문의 antiohristus는 antichristus의 오자이다.

    16.19 summittat의 주어는 마르키온의 신이다. 창조주의 그리스도를 ‘죄의 사람’으로 볼 경우, 마르키온의 신이 자기 진리를 멸시한 자들을 벌하려고 창조주의 그리스도를 보내는 셈이 된다는 반박이다.

    16.20 si는 Migne 판의 보충이다(Ursinus sed <si> et, Oehler at si et). consentit의 주어는 마르키온이고, illi는 마르키온의 신을, ab eo는 데살로니가후서 2:8에서 불법한 자를 죽이는 주를 가리킨다. illi는 R3의 읽기이다(M, R1 illis).

    16.21 suum은 R3 여백의 읽기이다(M, R summum). zeloten은 그리스어 ζηλωτής(질투하는 이)를 라틴 문자로 옮긴 말이다(출애굽기 20:5 ‘질투하는 하나님’ 참조). desultores는 신앙을 버리고 떠나는 자들을 뜻하여 ‘변절하는 자들’로 옮겼다.

    16.22 instrumentum은 법적 증거 문서를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마르키온이 내세우는 단 하나의 복음서를 가리킨다.

    16.23 uindicta는 ‘응징’으로 옮겨 ultio(‘보복’)와 구별했다.

    16.24 데살로니가후서 3:10; 신명기 25:4(고린도전서 9:9에도 인용됨). 테르툴리아누스는 바울의 노동 명령을 신명기 율법을 준 창조주의 가르침으로 연결한다.

  17. 17 본문으로

    17.1 마르키온의 바울 서신 모음(Apostolikon)에서 에베소서는 『라오디게아인들에게』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교회의 진리(ecclesiae ueritas)에 따라 이 편지의 수신자를 에베소인들로 본다. 골로새서 4:16이 언급하는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마르키온의 제목과 연결하는 해석이 있다.

    17.2 “제목마저”(et titulum)는 Kroymann의 수정이다. 사본 MR은 ei titulum(“그것에 제목을”)이다. gestit는 M의 독법이고 R과 이전 판들은 완료형 gestiit(“하려 했다”)이다.

    17.4 에베소서 1:9-10. secundum boni existimationem(“선한 판단에 따라”)은 그리스어 εὐδοκία(개역개정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에 해당한다. “다시 머리 아래로 모으는 일”은 recapitulare를 옮긴 것으로, 그리스어 ἀνακεφαλαιώσασθαι(개역개정 “통일되게 하려”)의 직역이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처음으로 되돌리다” 또는 “처음부터 다시 헤아리다”로 풀이한다. adimpletio는 “충만”으로, 개역개정의 “때가 찬 경륜”에 해당한다. “<과 그 충만>”은 Engelbrecht의 보충 adimple<tio et adimple>tionis를 옮긴 것이다. 사본 MR은 adimpletiones, Oehler는 adimpletionis이다. competet는 Pamelius의 수정이고 MR은 competent이다.

    17.8 actas(“행해진”)는 Junius의 수정이고 MR은 acta이다.

    17.12 에베소서 1:12. <그의>(eius)는 Kroymann의 보충이다. praesperare(“미리 소망을 두다”)는 그리스어 προηλπικότας(개역개정 “전부터 바라던”)에 해당하며, 17.13-14의 논증은 이 “미리”에 근거한다.

    17.13 Kroymann은 in deum(“하나님에게”) 대신 in dominum(“주에게”)이 원래 독법일 가능성을 적어 둔다.

    17.15 에베소서 1:13.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그의 약속의 거룩한 영”(spiritu promissionis eius sancto)으로, 개역개정 “약속의 성령”보다 “그의”가 더 있으며, 17.16은 이 “그의 약속”이 누구의 약속인지 묻는다.

    17.16 요엘 2:28(히브리어 본문과 칠십인역 3:1). 사도행전 2:17도 같은 본문을 인용한다. 개역개정 요엘 2:28은 “만민에게”, 사도행전 2:17은 “모든 육체에”이다.

    17.17 <둘 다>는 R3의 보충 <et>(et spiritus et euangelium, “영도 복음도”)를 옮긴 것이다.

    17.18 에베소서 1:17의 “영광의 아버지”를 시편 24편의 “영광의 왕”과 연결한다. “올라가며”(ascendens)는 이 시편을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한 노래로 읽는 해석을 반영한다.

    17.19 시편 24:10(칠십인역 23:10). dominus uirtutum은 개역개정의 “만군의 여호와”에 해당한다.

    17.20 에베소서 1:17의 “지혜의 영”을 이사야 11:2-3과 연결한다. 칠십인역 이사야 11:2-3은 지혜, 총명, 모략, 재능, 지식, 경건, 하나님을 경외함의 영을 열거하며, 이것이 교부들이 말하는 “일곱 영”이다. enumeratur는 Oehler의 수정이고 MR은 enumerantur이다.

    17.21 에베소서 1:18.

    17.22 이사야 42:19.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본문은 “내 종들”, “하나님의 종들”로 복수형이며, 개역개정(“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맹인이겠느냐”)과 문형이 다르다.

    17.23 에베소서 1:18. 개역개정은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다. hereditas를 에베소서와 시편 2:8(17.24)에서 모두 “기업”으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같은 낱말로 두 본문을 연결한다. 개역개정 시편 2:8은 “유업”이다.

    17.24 시편 2:8, 이어서 에베소서 1:20-22. 1:21(“모든 통치와 권세 ... 위에”)이 빠져 있다. Kroymann은 마르키온 본문에서 이 절이 갈라디아서 쪽으로 옮겨져 있었다고 보고, 갈라디아서를 다룬 앞부분(CSEL 47, 581쪽 20행)을 가리킨다. inoperatus est in Christum ualentiam suam은 “그리스도 안에 자기 능력을 역사했다”로 옮겼다.

    17.25 시편 110:1(칠십인역 109:1).

    17.26 시편 8:6(칠십인역 8:7). 시편의 말을 아버지를 향한 영의 말로 읽는다. 개역개정은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이다.

    17.28 에베소서 2:1-2. 사본에는 in quibus 앞에 non이 있으며, R3와 Kroymann은 이를 삭제 대상으로 표시했다. 이 부정어를 “행[하지 않]았던”으로 옮겨 괄호 안에 두었다. aeuum mundi huius는 개역개정 “이 세상 풍조”, princeps potestatis aëris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 해당한다. filii incredulitatis는 개역개정 “불순종의 아들들”이지만, 테르툴리아누스가 17.33에서 incredulitas를 유대인과 이방인이 창조주를 믿지 않는 일로 다루므로 “불신”으로 옮겼다. Pamelius는 aëris 뒤에 <huius>를 보충했다.

    17.29 마르키온은 고린도후서 4:4의 “이 세상의 신”을 창조주로 해석했다(제5권 11장). 여기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세상의 시대”의 “세상”(mundus)을 같은 방식으로 세상의 신, 곧 창조주로 풀이할 수 없다고 말한다.

    17.34 competant는 Ursinus의 수정이고 MR은 competat이다.

    17.35 potitus(“차지하고서”)는 Gelenius의 수정이고 MR은 potius이다. propheta refert는 Junius의 수정이고 MR은 profert et refert이다. obstruere는 “막아 쌓다”라는 뜻으로, 마귀가 불신의 아들들을 창조주 앞에 장벽처럼 세운다는 뜻으로 옮겼다.

    17.36 이사야 14:13-14. 라틴어 본문 “내가 구름 속에 내 보좌를 두겠다”는 개역개정 14:13(“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과 14:14(“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를 합친 꼴이다. “다른 곳”은 고린도후서 4:4이다. 제5권 11장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그 절을 “하나님이 이 세상의 불신자들의 마음을 눈멀게 했다”로 끊어 읽자고 제안했다. 여기서는 마르키온파가 “이 세상의 신”이라는 읽기를 고집한다면 그 신은 마귀라고 답한다.

    17.38 <다고 해도>는 Kroymann이 보충한 <si>를 옮긴 것이다. 이전 판들은 apostolus 뒤에서 문장을 끊는다(“그 사도는 유대교 안에서 살았다. 그가 ... 때문이 아니다”).

    17.39 에베소서 2:3 앞부분. habens는 R3의 독법이고 MR1은 habenti이다. 바울이 교회를 박해한 일은 갈라디아서 1:13, 빌립보서 3:6 참조.

    17.40 에베소서 2:3. ira와 iracundia는 “분노”로 옮겼다(개역개정 “진노의 자녀”). filii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창조주가 유대인들을 아들들이라고 불렀다”(출애굽기 4:22, 이사야 1:2 참조)와 연결하므로 “아들들”로 옮겼다. R1은 non iracundiae(“분노의 아들들이 아니었다”)이다. 이전 판들은 “inquit, sed natura. ne”로 끊는다. haereticus는 M의 독법이고 R과 이전 판들은 hoc haereticus이다.

    17.41 adlectio patrum은 하나님이 조상들(족장들)을 택한 일을 가리키며, 유대인들이 “아들들”인 근거를 출생이 아닌 선택에 둔다.

    17.42 reputans는 Engelbrecht의 수정이다. M은 reputaris, R은 reputari, Ursinus는 reputare이다. <물들게>는 Rigaltius의 보충 <in>fecit(“물들였다”)을 옮긴 것으로, 사본 MR은 fecit(“만들었다”), Ursinus는 infecit, Pamelius는 suam fecit(“자기 것으로 만들었다”)이다.

    17.43 에베소서 2:10. facere(“만들다”)와 condere(“짓다”)는 그리스어 ποιεῖν(“만든 바”)과 κτίζειν(“지으심을 받은”)에 해당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첫째를 실체의 창조, 둘째를 은혜에 의한 새 창조로 구별한다(17.45).

    17.46 에베소서 2:11-12. conuersatio Israhelis는 그리스어 πολιτεία(개역개정 “이스라엘 나라”)에 해당하며, 17.52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안에 있는” 것으로 설명되므로 “이스라엘의 공동체”로 옮겼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본문은 “언약들에 대해 나그네”와 “그 약속의 소망을 가지지 못했다”를 이어 읽으며, 17.50의 “약속의 소망”도 같은 읽기를 따른다. praeputiatio는 M의 독법이고 R과 이전 판들은 praeputium이다.

    17.49 에베소서 2:13.

    17.52 nos(“우리가”)는 R3의 독법이고 MR1은 non이다.

    17.54 이사야 46:12-13. 라틴어 본문(칠십인역 계통)은 “나에게서 멀리 있던 자들이 내 의에 가까이 왔다”이며, 개역개정(“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과 문형이 다르다.

    17.55 에베소서 2:14. 대시 안의 “곧 유대인 쪽과 이방인 쪽, 가까운 쪽과 먼 쪽을”은 테르툴리아누스의 설명이다. gentile는 Kroymann의 수정이고 MR은 gentilem이다. R과 이전 판들은 Iudaicum scilicet populum(“곧 유대 백성”)이다.

    17.56 마르키온 본문은 “자기 육신으로” 대신 “육신으로”만 남겨, 이 말을 그리스도가 벽을 허문 수단이 아니라 “적대”를 꾸미는 말로 읽게 했다. 이렇게 하면 육신은 그리스도의 육신이 아니라 적대를 일으키는 악덕이 된다. “적대라는 말에”(inimicitiae)와 “육신으로”(carne)는 Kroymann의 읽기이며 MR은 carnem이다. non은 Kroymann이 삭제 대상으로 표시했으며 “맞서[지 않]는”으로 옮겼다.

    17.57 Marrucine와 Pontice는 호격이다. 카툴루스 12.1은 남의 냅킨을 훔친 아시니우스 마루키누스를 Marrucine Asini라고 부르며, Marrucinus는 이탈리아 중부 마루키니족 출신이라는 뜻의 별명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출신지 호칭을 바꾸어, 바울 본문의 낱말을 훔친 마르키온을 그의 출신지 폰토스에 따라 Pontice라고 부른다. 출신지를 부르는 호칭의 대구를 살려 “마루키니 사람아”, “폰토스 사람아”로 옮겼다. “앞에서 그의 피는 고백해 놓고”는 17.49에서 인용한 에베소서 2:13의 “그의 피로”를 가리킨다. sicubi는 MR의 독법이고 Pamelius는 sicuti, Junius는 sic uti이다. dixi는 R3, MR1은 dixit이다.

    17.58 17.58-62는 에베소서 2:15-16을 따라가며 해설을 삽입한 한 문장이다. Kroymann은 삽입부를 괄호(여기서는 대시)로 표시하고 주절이 17.62의 ita et(“그렇다면 여기서도”)에서 시작한다고 본다. sententiis(“선언들로”)는 그리스어 ἐν δόγμασιν(개역개정 “의문에 속한”)에 해당하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마태복음 5장의 그리스도의 선언으로 읽는다. “율법을 성취함으로써”는 마태복음 5:17을 가리킨다.

    17.59 출애굽기 20:14과 마태복음 5:27-28. uacat는 더 엄한 계명이 주어지면 이전 계명이 따로 할 일이 없어진다는 뜻으로, “쓸모없어지다”로 옮겼다.

    17.60 출애굽기 20:13과 마태복음 5:21-22. “욕하지도 말라”(nec maledices)는 마태복음 5:22의 “라가”,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에 대한 말씀을 요약한 것이다. potes는 Pamelius의 수정이고 MR은 potest이다. “만들었던 이가 바로 짓는 이다”는 17.43-45의 facere와 condere 구별을 다시 적용한 것이다.

    17.61 에베소서 2:10을 다시 인용한 뒤 2:15-16을 이어 간다. “새롭다는 것은 ... 새롭게 태어났다는 뜻에서다”의 ut noue는 Kroymann의 수정이고 MR은 et noue이다. deo, quem은 R의 독법이고 MF는 dei, quem이다. et gentile는 M의 독법이고 R과 이전 판들은 et gentilem populum이다. Kroymann은 inquit를 삭제해야 할 수도 있다고 본다. cum interfecisset는 R3의 독법이고 MR1은 tum interfecit, sed이다.

    17.63 에베소서 2:17-20. et aduenae(“외인도”)는 M의 독법이고 R과 이전 판들은 nec aduenae이다.

    17.64 마르키온은 에베소서 2:20의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터”에서 “예언자들의”를 지웠다. “주가 교회 안에 사도들처럼 예언자들도 세웠다”는 고린도전서 12:28과 에베소서 4:11을 가리킨다. si non timuit(“두려워한 것이 아니라면”)는 Kroymann의 읽기이다. MR1은 prophetas. timuit si non, R3와 이전 판들은 prophetas. timuit scilicet(“예언자들을. 물론 그는 두려워했다”)이다. fundamentum은 M의 독법이고 R과 이전 판들은 fundamenta이다.

    17.65 에베소서 2:20의 summus angularis는 그리스어 ἀκρογωνιαῖος(개역개정 “모퉁잇돌”)에 해당하며, “맨 위 모퉁잇돌”로 옮겨 시편의 in summo anguli와 연결되게 했다.

    17.66 시편 118:22(칠십인역 117:22). 개역개정은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이다.

  18. 18 본문으로

    18.1 사본 MR은 manibus haeretici praecidendis(이단자의 손으로 잘라내야 할 것들에 관해)로 읽는다. Kroymann은 mania(그리스어 μανία) haeretici praecidendi로 고치고 miror를 보충했다. 번역은 이 본문을 따라, 여러 쪽을 통째로 빼는 이가 음절 하나까지 손대는 것이 오히려 놀랍다는 뜻으로 옮기고 보충어를 <그것이 놀랍다>로 표시했다. Engelbrecht는 보충 없이 사본 본문을 그대로 해석했다.

    18.2 에베소서 3:8-9. nouissimo omnium은 개역개정의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에 해당하며, 라틴어 표현에 따라 “모든 이 가운데 가장 나중 된”으로 옮겼다. sacramentum은 신비로, dispensatio는 경륜으로 옮겼다.

    18.3 마르키온의 본문은 에베소서 3:9의 전치사 ἐν(in)을 빼서, 신비가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만물을 창조한 신, 곧 창조주“에게” 감추어졌다는 뜻이 되게 했다.

    18.4 에베소서 3:10. in supercaelestibus는 Gelen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insuper caelestibus로 읽는다. principatus et potestates는 개역개정을 따라 “통치자들과 권세들”로 옮겼다.

    18.6 princeps는 통치자들과 권세들 위의 우두머리, 곧 창조주를 가리킨다. principatus(통치자들)와 구별하려고 “우두머리”로 옮겼다.

    18.7 첫째 illi(그에게)는 Kroymann이 사본의 illis를 고친 것이고, 둘째 illi는 Rigaltius의 읽기이다(R ille). 사본의 manifestum(분명하다)을 Kroymann은 manifest<at>um(드러났다)으로 고쳤다. 보충된 부분을 <밝히 드러났>으로 표시했다.

    18.8 로마서 11:34. 이사야 40:13을 인용한 구절이다.

    18.9 mutabit(바꿀 것이다)은 Junius의 수정이고 사본과 이전 편집본은 mutauit(바꾸었다)로 읽는다.

    18.12 et(도)는 Kroymann의 보충이다. scriptura는 여기서 마르키온 쪽 본문의 문구를 가리키므로 “본문”으로 옮겼다.

    18.13-14 마르키온의 독법대로라면 에베소서 3:10도 신의 지혜가 창조주 “에게” 알려지고 이어서 권세들과 통치자들에게 알려진다고 되어 있어야 한다는 논증이다. 실제 3:10에는 창조주가 따로 언급되지 않는다.

    18.15 subtractum constat quod et sic ueritati suae saluum est를 “무엇인가를 빼낸 것이 분명한데, 그 대목은 그렇게 해도 자기 진리를 온전히 지닌다”로 옮겼다. in을 빼더라도 3:10이 이어지는 한 마르키온의 독법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았다.

    18.16 non uis와 habuisse는 Kroymann의 수정이다. 사본은 nouus, habuisset로 읽는다. 마르키온은 예언서를 문자 그대로 읽어 창조주의 그리스도를 지상의 전사로 보았다. 제3권 13-14장에서 테르툴리아누스가 같은 예언 본문으로 이 문제를 다루었다.

    18.17 에베소서 4:8, 시편 68:18(칠십인역 67:19). captiuitas는 포로 상태 또는 포로 무리를 뜻하며, 18.20의 captiuitas spiritalis와 연결되도록 “포로”로 옮겼다.

    18.19 시편 45:3(칠십인역 44:4), 이사야 8:4. 개역개정은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로 옮기며, 테르툴리아누스는 uirtutem Damasci(다메섹의 힘)로 인용한다.

    18.20 extundis(두들겨 빚어내다)는 Oehler의 수정이고 사본은 excondis로 읽는다. illius(그의)는 예언자들이 말한 그리스도 또는 그를 보낸 창조주를 가리킨다.

    18.21 에베소서 4:25(스가랴 8:16), 에베소서 4:26(시편 4:4, 칠십인역 4:5). 개역개정 시편 4:4는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로 옮기고, 칠십인역과 에베소서는 “화를 내라(ὀργίζεσθε)”로 읽는다. 사본에서 sol 뒤에 있던 ut를 Kroymann이 이 자리로 옮겼다.

    18.22 에베소서 4:26b, 5:11, 시편 18:25-26(칠십인역 17:26-27). 시편에서는 하나님에게 하는 말로, 개역개정은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의로운 자와 함께하면 너도 의로울 것이고 비뚤어진 자와 함께하면 너도 비뚤어질 것이다”라는 라틴어 본문을 사람 사이의 사귐에 적용한다. occidat는 R3의 교정이고 사본은 excidat로 읽는다.

    18.23 고린도전서 5:13(신명기 17:7 등의 인용), 고린도후서 6:17(이사야 52:11).

    18.24 이사야 52:11(개역개정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 에베소서 5:18(개역개정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Kroymann은 사본 MF의 dedecore를 형용사 dedecor의 탈격으로 보아 “수치스러운 포도주”로 해석했다. R과 이전 편집본은 dedecori로 읽는다.

    18.25 아모스 2:12(나실인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한 일), 레위기 10:9. dabatis는 Pamelius의 수정이고 사본은 dabitis로 읽는다.

    18.26 에베소서 5:19, 이사야 5:12. 이사야는 수금, 비파, 소고, 피리를 갖추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여호와의 일을 돌아보지 않는 자들을 책망한다.

    18.28 에베소서 5:22-23.

    18.29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질서는 창세기 2장의 창조 기사에서 나온다. opus creatoris를 “창조주의 작품”으로 옮겼다.

    18.30 statum(위상)은 R의 교정이고 사본은 satum으로 읽는다.

    18.31 에베소서 5:23.

    18.32 에베소서 5:28-29. 개역개정 5:28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이고, 테르툴리아누스는 carnem suam(자기 육신)으로 읽는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과 같다”는 5:29 끝부분과 5:25를 함께 반영한다.

    18.33 에베소서 5:29. 마르키온은 육신의 부활을 부정했다.

    18.34 ut(것처럼)는 Kroymann의 보충이다.

    18.36 ueritate honoris는 Ursinus의 수정이고 사본은 ueritatis honore로 읽는다. ueritas는 모양(similitudo)에 맞서는 원형, 곧 실재를 뜻하므로 “실재”로 옮겼다. et(와)는 R3의 보충이고, disserente(풀이하다)는 R3의 교정이다. 사본 M은 deferente, R1은 differente로 읽는다.

    18.37 창세기 2:24, 에베소서 5:31. propter hanc(이 여자 때문에)는 사본의 독법이며 Pamelius는 hoc(이 때문에)로 고쳤다. 개역개정 에베소서 5:31은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이다.

    18.38 에베소서 5:32a. 사본은 inter ista로 읽으며, Kroymann은 interim, ista로 고치고 “창조주의 이 말들이 이단자들에게서는 가장 하찮은 신비인데 그 사도에게서는 큰 신비라면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다”로 해석했다. 번역은 이 해석을 따랐다.

    18.39 에베소서 5:32b. habes(그대가 얻는다)는 R1 난외의 독법이고 사본 M과 이전 편집본은 habet(그가 제시한다)로 읽는다.

    18.40 <sacra>menti는 R의 독법이고 사본 MF는 menti로 읽는다. 보충된 부분을 <신비>로 표시했다.

    18.42 a destruendo(멸망시켜야 할 신에게서)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은 ad destruendum(멸망시키기 위해)으로 읽는다.

    18.43 에베소서 6:1-2.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이 에베소서 6:2b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를 빼 버렸다고 전한다.

    18.44 출애굽기 20:12, 에베소서 6:4. 에베소서 그리스어 본문은 “아버지들아(πατέρες)”이고, 테르툴리아누스는 parentes(부모들아)로 인용한다. 개역개정은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이다.

    18.45 출애굽기 10:2. audisti ... ueteribus dictum은 마태복음 5:21의 “옛 사람에게 말한 바 ... 너희가 들었으나”를 반향한다. 사본 M은 audistis로 읽는다.

    18.47 에베소서 6:12. munditenentes는 그리스어 κοσμοκράτορες의 번역이며 개역개정을 따라 “세상 주관자들”로 옮겼다. 마르키온파가 이들을 창조주와 연결하자, 테르툴리아누스는 복수형이므로 창조주가 여럿이 된다고 반박한다.

    18.49 에베소서 6:11-12.

    18.54 diabolus는 그리스어 διάβολος(중상하는 자)에서 왔다. delatura(중상, 고발)는 이 어원을 겨냥한 말이다. 창세기 3:4-5에서 뱀은 하나님이 사람이 신처럼 될까 봐 나무 열매를 금했다고 말하여 창조주의 의도를 거짓으로 꾸며 말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마귀를 타락한 대천사로 본다.

    18.55 창세기 2:17, 3:5. arbuscula는 arbor의 지소형으로 “작은 나무”로 옮겼다.

    18.56 에베소서 6:12, 개역개정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spiritalia nequitiae를 이 표현에 맞추어 “악의 영들”로 옮겼다.

    18.57 창세기 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았다는 대목을 테르툴리아누스는 천사들의 타락으로 읽는다(『여성의 옷차림에 대하여』 1.2 참조). Kroymann 판 본문의 scandalizaterum은 scandalizatorum(걸려 넘어진)의 오식이며, 같은 판의 비판 장치에는 scandalizatorum으로 적혀 있다.

    18.58 에베소서 6:19-20. quo는 R3가 지운 말이며 Kroymann은 이를 [ ]로 묶었다. sibi(자기를 위해)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ibi로 읽는다. libertas praedicationis는 에베소서 6:19의 παρρησία(담대함)에 해당하며 “선포의 자유”로, constantia는 “굳센 담대함”으로 옮겼다.

  19. 19 본문으로

    19.1 이 장은 마르키온의 사도서 모음에 있는 골로새서를 다룬다(Kroymann 판의 표제 Ad Colossenses). praescriptio는 소송에서 본안 심리 전에 상대의 청구 자격을 막는 법적 항변이며, 테르툴리아누스의 『이단 규정』(De praescriptione haereticorum)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 책에서 그는 진리가 앞서고 이단은 나중에 생겼다는 시간 순서로 모든 이단을 반박한다. regula는 신앙 규범(regula fidei)을 뜻하므로 ‘규범’으로 옮겼다. haeresis는 M의 철자이고 R은 haereses로 적는다.

    19.2 골로새서 1:5-6.

    19.4 Antoniniani Marcionis는 마르키온이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재위 138-161년) 때 활동했음을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제1권 19장에서도 마르키온의 등장 시기를 안토니누스 시대로 잡아 그의 교회가 사도 시대보다 늦다고 논증한다.

    19.6 ‘저 하나님의 복음으로’는 탈격 euangelio를 옮긴 것이다. Junius는 대격 euangelium으로 고쳐 읽기를 제안했다.

    19.7 시편 19:4(칠십인역 18:5). 라틴어 본문은 칠십인역을 따라 ‘그들의 소리’, ‘그들의 말’로 복수이며, 개역개정 시편의 ‘그의 소리’, ‘그의 말씀’과 다르다. 바울도 로마서 10:18에서 같은 구절을 복음 선포자들에게 적용한다.

    19.8 골로새서 1:15. 테르툴리아누스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나타난 장면들은 모두 아들이 아버지의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고 아버지 자신은 보이지 않는다고 본다(제2권 27장, 『프락세아스 반박』 14-15장 참조).

    19.9 ‘그’는 마르키온을 가리킨다. 마르키온은 보이는 창조주와 보이지 않는 선한 신을 나누는 근거로 이 구절을 쓸 수 있었으므로, 테르툴리아누스는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창조주에 대한 구약의 정의라고 답한다.

    19.10 출애굽기 33:20; 골로새서 1:15-16; 요한복음 1:3. 라틴어 primogenitus conditionis는 개역개정 골로새서 1:15의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에 따라 옮겼고, 왕권들, 주권들, 통치자들, 권세들도 개역개정 1:16의 용어를 따랐다. 사본 M과 F는 복수 oportebant로, R과 이전 판들은 단수 oportebat로 적는다. 19.15의 ‘마르키온이 잘라 낸 것들’과 함께 보면, 마르키온의 본문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1:15b-16의 진술이 없고 1:17의 ‘그는 모든 이보다 먼저 있다’는 남아 있었다.

    19.11 골로새서 1:17. 테르툴리아누스가 인용한 본문은 남성 복수 ante omnes(‘모든 이보다’)이고, 그리스어 πρὸ πάντων은 남성으로도 중성으로도 읽힌다. 그는 이 남성형을 중성 ante omnia(‘모든 것보다’)로 넓혀,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보다 앞선 창조주의 말씀이라는 결론을 끌어낸다.

    19.13 autem은 Kroymann이 보충한 말이다.

    19.14 골로새서 1:19. boni duxit는 그리스어 εὐδόκησεν(‘기뻐하였다’)을 옮긴 표현으로, ‘좋게 여겼다’로 옮겼다. 라틴어 문장에는 주어가 드러나 있지 않으며, 재귀대명사 in semetipso 때문에 ‘자기 안에’로 옮겼다. 사본 M과 F는 item, R은 autem이다.

    19.15 ‘마르키온이 잘라 낸 것들’은 골로새서 1:16의 창조 진술을 가리킨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충만’을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하늘과 땅의 존재들로 풀이한다.

    19.16 ‘우리의 거짓 사도들과 유대적 복음 전도자들’은 반어이다. 마르키온은 바울 서신의 창조주 관련 대목을 유대주의자들이 끼워 넣었다고 주장했으며(갈라디아서 2:4의 ‘거짓 형제들’ 참조), 테르툴리아누스는 그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가정하고 말한다. edat(‘내놓아 보라’)는 Kroymann의 추정이며, 사본 M과 R은 et ad로 적는다. 관계사 qui는 문법상 마르키온에게도 걸릴 수 있으나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은’이라는 내용에 따라 마르키온의 신을 꾸미는 말로 옮겼다.

    19.18 골로새서 1:20. uniuersa(‘만물’)는 R1 여백의 읽기이고, M과 R의 본문은 una ipsa로 적는다. cuius nouissime fuerant는 만물이 반역하여 떨어져 나가기 직전까지 창조주의 소유였다는 뜻으로 보아 ‘바로 전까지 속해 있던 이’로 옮겼다.

    19.19 conciliari(‘화목하게 되다’)와 reconciliari(‘다시 화목하게 되다’)의 대조를 살리기 위해, 이 장에서 reconciliare는 일관되게 ‘다시 화목하게 하다’로 옮겼다. 다시 화목하게 된다는 말은 이전에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므로, 만물과 화목하게 되는 이는 본래 만물을 소유한 창조주라는 논증이다.

    19.20 골로새서 1:21; 로마서 1:25(‘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creatori redigit in gratiam은 ‘창조주와의 호의 관계로 되돌린다’는 관용 표현이며, gratia를 은혜로 옮겨 ‘창조주의 은혜 안으로 되돌려 놓는다’로 옮겼다.

    19.21 골로새서 1:24. 사본 M과 R1에는 19.21-19.22의 문장이 약간 다른 형태로 두 번 적혀 있다. Kroymann은 두 번째 형태를 후대 교정자의 손으로 보아 본문에서 빼고, 그 형태에서 per mortem과 ecclesia만 받아들였다. 그는 이 문장을 ‘사도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더라도, 몸이라는 개념을 육신의 실체에서 완전히 떼어 놓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으로 풀이하며, 분사 transferens를 그 뜻에 맞추어 정동사로 옮겼다.

    19.22 골로새서 1:22. 그리스어 본문은 ‘그의 육체의 몸 안에서’(ἐν τῷ σώματι τῆς σαρκὸς αὐτοῦ)인데, 테르툴리아누스의 인용은 ‘그의 몸 안에서’이며 ‘육체의’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19.23에서 그는 이 몸이 곧 육신이라고 논증한다.

    19.23 사본 M과 R은 mori potuit per carnem, mortuus est(‘육신을 통해 죽을 수 있었던 [몸], 그는 죽었다’)로 적는다. Kroymann은 이를 mori potuit, per carnem mortuus et로 고쳐 ‘육신을 통해서 죽었고’가 ‘교회를 통해서가 아니라’와 짝을 이루게 했으며, 번역은 이 읽기를 따랐다. ‘몸을 몸과 맞바꾸었다’는 그리스도가 육적인 몸을 내주고 영적인 몸인 교회를 얻었다는 뜻이다.

    19.24 골로새서 2:8. 그리스어 본문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이고, 테르툴리아누스의 인용은 ‘교묘한 말’(subtililoquentia)을 덧붙인다. elementa는 하늘과 땅 같은 물리적 원소와 글자 및 학문의 기초를 모두 뜻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첫째 뜻을 배제하고 둘째 뜻(litterae saeculares, ‘세속의 학문’)을 택하며, 개역개정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옮긴다. 철학이 이단의 원천이라는 논증은 『이단 규정』 7장에 있다. Kroymann은 R3를 따라 nec를 삽입된 말로 보아 괄호에 넣고, 이어지는 nec를 ne로 읽는다. 괄호 안의 말을 빼고 읽으면 마르키온이 에피쿠로스의 신처럼 무감각하여 노하지 않는 신을 내세운다는 뜻이 된다. deum은 F의 읽기이고 M과 R은 dominum으로 적는다. 마르키온이 창조주에게 태어나지 않은 영원한 물질을 세계의 재료로 붙여 준다는 점은 제1권 15장에서도 다룬다.

    19.25 cuius는 앞 문장의 철학을 받는다. Kroymann은 ingeniis 앞에 ab를 보충할 가능성을 기록했으나 본문에는 넣지 않았다.

    19.26 고린도전서 1:27; 이사야 29:14(고린도전서 1:19에서 인용). dispositio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뜻하므로 ‘경륜’으로 옮겼다.

    19.27 hac는 R의 읽기이고 M은 hanc로 적는다.

    19.28 골로새서 2:13. ‘예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이’는 그리스도의 오심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마르키온의 신을 가리킨다. 아무도 그 신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 신을 거슬러 지은 죄도 없고, 따라서 그 신이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논증이다.

    19.29 골로새서 2:16-17. in parte diei festi는 그리스어 ἐν μέρει ἑορτῆς(‘절기에 관하여’)를 글자대로 옮긴 표현이므로 ‘절기와 관련하여’로 옮겼다.

    19.30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폐지되었다는 문제는 제4권과 이 책 앞부분의 갈라디아서 및 로마서 논의에서 다루었다. figura는 ‘예표’로 옮겼다.

    19.31 두 번째 cuius는 Kroymann이 보충한 말이다. lex(율법)는 Ursinus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lux로 읽는다.

    19.33 골로새서 2:18-19, 21. 테르툴리아누스는 2:18의 ‘천사 숭배’와 ‘본 것’을 ‘천사들의 환상’으로 요약한다. 라틴어 constituerit에는 주어가 드러나 있지 않으며, 앞의 ‘모세’를 받는 것으로 보아 ‘마치 모세가’로 옮겼다.

    19.34 골로새서 2:22; 에베소서 1:10. recensentur는 에베소서 1:10의 ἀνακεφαλαιώσασθαι(‘하나로 모으다’, 개역개정 ‘통일되게 하다’)에 해당하는 말로 보아 ‘총괄되다’로 옮겼다. in Christum은 Kroymann이 삽입된 말로 보아 괄호에 넣었다. differentia(구별)는 Kroymann의 수정이고 사본 MR은 indifferentia(구별 없음)로 읽는다. ‘처음으로 되돌려진다’는 음식의 구별이 없던 창조 때의 상태(창세기 1:29)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읽었다.

    19.35 ‘같은 것들이므로’(ut eadem)는 나머지 계명들이 앞선 권들에서 이미 창조주의 것으로 다룬 계명들과 같다는 뜻이다. ‘옛것들이 지나가리라’, ‘모든 것을 새롭게 하려’는 이사야 43:18-19와 65:17을 반영한다.

    19.36 예레미야 4:3. 라틴어 nouate uobis nouamen nouum은 칠십인역 νεώσατε ἑαυτοῖς νεώματα를 따른 것으로, 개역개정은 ‘너희 묵은 땅을 갈고’로 옮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새로 일구다’라는 말을 골로새서 3:9-10(에베소서 4:22-24 참조)의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와 연결한다.

  20. 20 본문으로

    20.1 이 장부터 빌립보서를 다룬다. 빌립보서 1:14-17. Kroymann은 이 인용을 마르키온 판본의 본문으로 표시한다. 동기의 목록(시기와 다툼, 평판, 사랑, 질투, 반목)은 개역개정 1:15-17의 순서와 구성과 다르다. ‘per sermonis existimationem’은 사본 MR의 읽기로, Kroymann은 20.5의 ‘nimis docta’와 연결하여 그대로 두었고 ‘말솜씨에 대한 평판을 얻으려고’로 옮겼다. Junius는 ‘boni existimationem’으로 고쳐 개역개정의 ‘착한 뜻으로’(εὐδοκία)에 가깝게 읽었다.

    20.2 ‘regulas sacramentorum’은 신앙 내용의 규범, 곧 무엇이 선포되는가를 가리킨다. ‘마음가짐의 동기’(causae animorum)와 대비되어, 바울이 선포자들의 동기만 문제 삼고 선포 내용은 문제 삼지 않았다는 논증의 근거가 된다.

    20.3 빌립보서 1:18. 테르툴리아누스의 ‘nihil mea’(나와는 상관없다)는 개역개정의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와 표현이 다르다. ‘causatio’(구실)는 개역개정의 ‘겉치레’에 해당한다.

    20.5 ‘nimis docta’는 R의 교정자(R3)의 읽기이고, 사본 MR1은 ‘animis docta’이다.

    20.6 ‘nouitas rei’는 R3의 읽기이고, MR1은 ‘non ita spei’이다.

    20.9 빌립보서 2:6. 20.9-20.18에서 ‘effigies’(μορφή)는 ‘형체’, ‘similitudo’(ὁμοίωμα)는 ‘모양’, ‘figura’(σχῆμα)는 ‘모습’, ‘imago’(εἰκών)는 ‘형상’으로 일관되게 옮겼다. 개역개정은 2:6의 μορφή를 ‘본체’, 2:7의 μορφή를 ‘형체’로 옮긴다.

    20.10 빌립보서 2:6-7. ‘그 실재를 취한 것은 아니었고’(non ueritate), ‘사람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non in homine), ‘실체로, 곧 육신으로 발견된 것은 아니었다’(non substantia, id est non carne)는 바울의 본문이 아니라 마르키온파가 붙인 해석이다. ‘rapinam’은 R의 읽기(MF ‘rapina’), ‘exhausit’는 R3의 읽기(MR1 ‘et haec sit’)이다. 개역개정 2:6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로 옮긴다. Kroymann은 ‘hominis’ 뒤에 γενόμενος에 해당하는 ‘factus’가 빠졌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20.12 골로새서 1:15.

    20.13 ‘사람의 형체로’(in effigie hominis)는 빌립보서 2:7의 ‘사람의 모양’(similitudo)이 아니라 2:6의 ‘하나님의 형체’와 짝을 맞춘 표현이다. ‘deus’는 Pamelius의 교정이고 MR은 ‘dei’이다.

    20.15 <하나님의>는 Kroymann이 보충한 ‘dei’이다. ‘참으로 하나님이라면, ... 이미 판가름 났다’(uere deus, praeiudicatum est)는 Oehler의 교정이고, 사본 MR은 ‘dei praeiudicatus est’이다. ‘filius hominis’는 ‘아버지의 아들’(filius patris)과 짝을 이루어, 사람의 아들이므로 사람의 형체 안에서도 참으로 사람으로 발견되었다는 논증의 근거가 된다. 낱말 뜻이 논증에 쓰이므로 ‘인자’ 대신 ‘사람의 아들’로 옮겼다.

    20.17 ‘것<처럼>’은 Kroymann이 ‘sic’을 ‘sic<ut>’으로 보충한 부분이다. 사본 MR은 ‘sic et ... sicut’이고 Kroymann은 뒤의 ‘sicut’를 ‘sic et’로 고쳤다. Engelbrecht는 앞을 ‘sicut’로 읽었다. ‘죽음에 복종하게 되었다’(morti subditum)는 빌립보서 2:8을 가리키며, 개역개정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로 옮긴다.

    20.18 빌립보서 2:8. 개역개정은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로 옮긴다. ‘exaggeraret’는 Latinius의 교정이다(MR ‘exaggerat’). ‘고투’로 옮긴 ‘colluctationis’는 Engelbrecht의 교정으로 죽음과 벌이는 사투를 뜻하며, MR1은 ‘collectionis’, R3와 이전 판본들은 ‘subiectionis’이다. <안에서>는 Kroymann이 보충한 ‘in’이다.

    20.19 빌립보서 3:7과 3:3-5. ‘Pharisaeae candidae dignitatem’의 ‘candida’는 공직 후보자가 입던 흰 토가(toga candida)를 연상시키는 말로 보고 ‘바리새파의 흰 옷이 주는 위엄’으로 옮겼다. 형용사로 ‘흠 없는 바리새파’로 읽을 수도 있다. ‘in nota’는 MR1의 읽기이고, R3와 이전 판본들은 ‘notam’이다.

    20.20 ‘nunc’는 Junius의 교정이고 MR1은 ‘non’, R3는 ‘modo’이다.

    20.21 빌립보서 3:8-9. Kroymann은 ‘existimat’ 뒤에서 끊어 ‘prae comparatione’부터를 주문장으로 읽었고, 이에 따라 ‘... 여기기까지 한다 해도, 그것은 ... 비교해서이다’로 옮겼다. ‘그를 통해 난 의’(quae per ipsum)는 Kroymann이 마르키온 판본으로 표시한 읽기로, 개역개정 3:9의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와 달리 ‘믿음’이 없다.

    20.23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를 통해’의 ‘그’가 율법을 준 하나님과 같은 이를 가리킨다고 보아, 의가 율법과 같은 근원에서 온다고 논증한다.

    20.24 빌립보서 3:20. ‘municipatus’(πολίτευμα)는 개역개정을 따라 ‘시민권’으로 옮겼다.

    20.25 창세기 22:17; 고린도전서 15:41.

    20.26 빌립보서 3:21. ‘transfigurabit’은 R3의 읽기이고, MR1은 ‘transfigurauit’이다. 여기서 ‘passiones’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아니라 사람이 겪는 고난을 가리키므로 ‘고난’으로 옮겼다.

    20.27 고린도전서 15:51-53과 데살로니가전서 4:16(개역개정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주가’(domini)는 Kroymann의 교정이고 사본 MR은 ‘dei’이다. ‘변화를 겪게 될’은 Latinius의 교정에 따른 것이다. Kroymann의 본문은 649쪽 13행에 ‘demutare’로, 비평 장치는 ‘demutari’로 인쇄했다. 사본 MR과 다른 판본들은 ‘deputari’로 읽는다.

    20.28 데살로니가전서 4:17. Kroymann은 ‘transfigurentur’ 뒤에 물음표를 두어 앞 문장을 수사 의문으로 읽었고, 이전 판본들은 평서문으로 끊었다.

  21. 21 본문으로

    21.1 빌레몬서. 마르키온의 바울 서신 모음에서 열 번째 편지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편지가 마르키온의 손질을 받지 않았다고 보고 별도의 논증 없이 넘어간다.

    21.2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는 마르키온의 사도서 모음(Apostolikon)에 들어 있지 않았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이 이 세 편지를 알면서 거부했다고 기술한다. ‘de ecclesiastico statu’는 교회의 직제와 질서를 가리키며 ‘교회의 질서’로 옮겼다.

    21.3 ‘interpolare’는 손을 대어 바꾼다는 뜻으로 ‘변조하다’로 옮겼다. ‘여기’는 제5권, ‘저기’는 제1-4권을 가리키며, ‘이 책으로 미루어 두었던 것’은 앞선 권들에서 사도에 관한 논의로 넘긴 논점들이다. ‘이전의 논점’(rem pristinam)의 ‘rem’은 Engelbrecht의 교정이고 사본 MR은 ‘spem’이다. ‘제때에’(tempori)는 Kroymann의 추정으로, 사본 MR은 ‘tempora ista’, Junius는 ‘tempore ista’, F와 Oehler는 ‘ipsa ista’, Engelbrecht는 ‘temporius ista’로 읽었다.

    21.4 ‘opusculum’(작은 저작)은 다섯 권 전체를 가리킨다. 이 문장으로 『마르키온 반박』 전체가 끝나며, 사본 M에는 ‘ADVERSVS MARCIONEM LIBER QVINTVS EXPLICIT’(마르키온 반박 제5권 끝)라는 맺음말이 있다.